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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농업만이 살 길인가

등록 2008-08-01 00:00 수정 2020-05-03 04:25

농업에도 효율과 시장 강조하는 정부… 어렵게 지켜낸 쌀 자주권이 물가 상승률을 끌어내린 것을 보라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기업 프렌들리만 있고, 농업 프렌들리는 없다.’

이명박 정부의 농어업정책이 실종됐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사료값 폭등으로 축산농민의 자살이 잇따르고 어선들이 폭등한 기름값 탓에 출선을 포기하는 등 농어민들의 시름이 깊어가지만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비판이다.

의도적 방치는 아닐까

지난 6월 정부는 고유가 대책을 내놓으면서 농어민에게 기름(경유)값이 ℓ당 1800원보다 오를 경우 50%를 지원해주겠다고 발표했다. 또 어선이 많다며 어선을 감축할 경우 정부가 지원해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농어민들은 알맹이가 없는 대책이라고 지적한다. 전남 해남에서 쌀과 배추, 마늘, 양파 농사를 짓는 이무진씨는 1년 동안 콤바인과 트랙터에 20드럼 정도의 경유를 쓴다. 2006년 면세 경유 1ℓ에 600원 하던 것이 최근엔 1300원가량으로 올랐다. 2006년 240만원을 기름값으로 썼는데, 올해는 520만원을 써야 한다. 그래도 이씨는 정부 지원을 전혀 못 받는다. 그는 “생색내기에 그친 대책이다. 많은 농민들이 경유를 연료로 쓰는 농기계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정부의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선 효율을 강조해온 이명박 정부의 정책 노선 때문에 농업경제를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사실 현 정부는 출범 전부터 효율과 시장을 강조해왔다. 농업 분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시절인 지난해 11월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초청토론회에서 “근본적인 변화 없이 늘 해오던 대로 농사만 지어서 살다가 모자라면 정부가 보조를 해주고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 농림부를 뜯어고쳐 농림수산식품부로 개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이 대통령이 자신의 경험과 소신을 바탕으로 경쟁과 효율을 통해 농촌의 구조개혁에 칼을 들이대겠다는 의도다. 이를 위해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자리에 농업 전문가 대신 국내 1호 농업인 주식회사 CEO인 정운천씨를 앉히기도 했다.

농업 CEO 후보자 MBA 교육, ‘달나라 정책’

하지만 농업을 시장과 효율만으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최근의 곡물값 파동은 농업이 시장 논리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전세계 5위의 국제 곡물 수입국인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28%에 그친다. 밀(0.3%), 옥수수(0.8%), 콩(7.3%)의 자급률은 아주 낮다. 국제 곡물 가격이 1년 새 최고 80%까지 뛰자, 이는 고스란히 라면값 인상 등 물가 상승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올해 들어 국제 곡물시장에서 쌀값은 68%나 올랐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부 나라에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쌀 자급률은 97.4%다. 세계적인 쌀값 폭등에도 우리나라의 쌀값은 1.3% 상승에 그쳤다. 결과론적이지만, 농민들이 지켜낸 쌀 자주권이 물가 상승률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쌀과 같은 농산물은 시장과 효율만으로 풀 수 없다는 얘기다.

현 정부는 물론 과거 정부도 농업 개방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는 퇴출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왔다. 미국에 자동차와 반도체를 팔기 위해서는 쌀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논리와 다름없다.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뒤 1998년 한-일 어업협상, 2002년 한-중 마늘 협상, 2004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2005년 쌀 재협상 국회 비준, 2006년 한-미 FTA,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 등으로 이어지는 통상 협상 과정에서 정부의 개방 논리와 농민들의 저항은 번번이 충돌했다.

현 정부도 여전히 농업정책에 대해 시장친화적인 대책만 쏟아내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3월 대통령 업무보고 때 농업 CEO 후보자 100명에게 경영학석사(MBA) 교육을 한 뒤 시·군별 유통회사나 품목 대표조직의 CEO로 영입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전국 생산자 대표조직 결성, 대규모 농어업회사 육성 등의 대책도 내놨다.

농어민들은 정부의 이런 정책이 ‘달나라 정책’이라며 냉소를 보내고 있다. 대구 영천에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신아무개씨는 “정부가 유기농, 원예, 축산과 같은 특화 영농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민이 많다며 그렇게 하라고 한다. 하지만 자금 여건과 나이, 판로 등을 생각하면 정부 정책은 농촌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대다수 농민들은 죽으나 사나 벼·콩·고추 농사와 같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농업의 기업화·과학화를 주장하는 정부의 말이 농민에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방 협상 때마다 갈등은 사회문제로

이런 상황에서 농가소득은 매년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농협경제연구소 자료를 보면, 도시노동자 가구소득을 100%로 잡았을 때 농가소득은 2006년 78.2%에서 지난해 72.6%로 떨어졌다. 지난해 도시 노동자 가구 소득은 전년에 견줘 6.7% 늘었으나 농가소득은 오히려 1% 줄어들었다.

전문가들은 일단 사료·기름·비료값 3고에 대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정부는 농산물 유통 구조 문제를 개선해 농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쇠고기는 한우농가, 중간 수집상, 도축장, 축산물 등급판정소, 공판장 경매, 중도매인 낙찰, 식육업체 및 육가공업체, 가공육 식당 및 전문 유통업체 등을 거쳐 소비자에 이른다. 유통단계를 거칠 때마다 가격에 거품이 낀다. 축산농민들은 제값을 못 받고, 소비자는 비싸게 사먹게 되는 구조다. 농수산식품을 아무리 고급화해도 정부가 이런 유통단계를 손보지 않고서는 농촌경제를 되살리기 힘들다.

계속되는 개방 압력에도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미국산 쇠고기 졸속 개방이 반면교사가 됐다. 우리 헌법은 조약의 체결·비준 권한을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그 동의 권한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주고 있다. 하지만 통상 교섭의 절차에 관한 법률이 마련되지 않아 정부의 일방주의는 계속되고 있다. 협상 때마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2004년 노무현 정부는 농촌종합대책을 내면서 ‘선대책 후개방’이라는 정책 방향을 내놨다. 하지만 현 정부는 농업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정부가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농업대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돈 버는 농어업, 살맛나는 농어촌, 농어민에게는 복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망하는 농어업, 죽을 쑤는 농어촌, 농어민은 복지사각 지대”라는 자조적인 푸념을 하고 있다. 정부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는 농심을 보듬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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