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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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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매운동으로 돌아오다

등록 2008-07-18 00:00 수정 2020-05-03 04:25

미국산 쇠고기에 반대하는 소비자운동 점화… 생태·여성·환경단체들이 앞장서고 급식관련 시민단체들 가세

▣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성난 민심이 촛불로 타올랐다. 여린 손들이 모여 거대한 빛줄기를 만들어냈다. 그 빛이 어둠을 갈랐다. 대통령은 거푸 고개를 숙였다. 잠시였다. 이윽고 철 지난 군홧발이 등장했다. 날선 방패는 더 이상 방어용이 아니었다. 차라리 누워버린 평화 시위는 그렇게 무참히 짓밟혔다.

숙명이었을까? 유혈이 낭자한 거리의 평화를 복원한 건 사제단이었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그이들 앞에서 ‘위로를 받았노라’고 고백했다. 그마저도 순간이었다. 권력은 오래 참지 않았다. 이내 10년 전으로 시대를 되돌렸다. 원천봉쇄, 기억에서 지워냈던 생경한 낱말이 고스란히 악몽으로 되살아났다. 사라진 줄 알았던 무한 힘의 논리가 다시 전면에 섰다. 광장은 봉쇄됐다. 촛불은 흩어졌다. 어디로 갈 것인가?

고깃집 앞 땡볕 아래 1인시위

미 캘리포니아에서 ‘결핵 소’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온 7월9일 오전, 서울 강서구 화곡동 ‘참숯불구이 전문점 오래드림’ 부근이 일찌감치 북적인다. 이날 11시45분께 고급 승용차와 언론사 차량이 뒤엉킨 사이를 비집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양복 차림의 홍보요원들이 바삐 눈짓을 주고받는다. 메인홀 중앙엔 방송 카메라가 한 줄로 자리를 잡고 섰다. 그 앞으로 ‘ㄷ’자 모양으로 놓인 식탁이 가지런하다. ‘미국산 쇠고기 시식회’란 큰 글씨 밑에 행사를 주최한 단체의 이름이 박혀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의사협회·대한병원협회·대한의학회.’ 주수호 의협 회장과 손경식 상의 회장이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오전 11시55분께, 숯불도 없이 불판부터 올려졌다. 밑반찬이 탁자마다 놓이고, 미리 도착한 참석자들은 어색한 듯 물잔을 주고받는다. 낮 12시 무렵 행사가 시작됐다. 참가자는 18명인데 2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는지, 빈자리가 두 곳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손경식 상의 회장이 조용히 미리 준비한 행사의 ‘취지’를 읽어내려갔다. “광우병 위험 파동으로 우리 사회가 심한 홍역을 앓고 있다.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손실, 국제사회의 신인도에서 피해를 봤다.” 주수호 의협 회장은 “국내외로 대한민국이 어려운 시점”이라며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는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검증되지 않고 과장된, 잘못된 정보의 유통으로 국민들이 불안해한다”며 “시식 행사를 함으로써 국민들 우려가 해소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어떤 먹을거리도 100%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항공기도 100% 안전하다고 말하지 못하지 않느냐. …(인간 광우병 발생 확률은) 합리적으로 (안심해도 좋을 만큼) 가능성이 희박하다.”

미리 구운 등심구이가 불판으로 옮겨졌다. 너나 없이 젓가락으로 구운 고기를 집어든다. 기름장을 묻혀 입에 넣은 뒤 맛나게 씹는다. 일순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김창조 오래드림 사장은 “7월5일부터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팔고 있는데, 차츰 반응이 좋아지고 있다”며 “오늘 행사를 위해 꽃살과 등심 각 15kg씩 모두 100인분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뒤늦게 숯불이 들어왔다. 다시 올려진 불판에선 잠시 뒤 뽀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값 싸고 질 좋은’ 고기 냄새가 가게 안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지, 왜 국론을 분열시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슬며시 떨렸다. 같은 날 오후 1시15분께, 서울 금천구 시흥동 수입육업체 에이미트 직판장에서 만난 아무개(61)씨는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구로구 오류동에 사는 은퇴한 공무원”이라는 그는 한사코 이름을 숨겼다. 다만 “열흘 전에도 불고깃감 등 10kg을 사갔다”며 “한우보다 질도 좋고 맛도 나은데다 가격도 싼데, 왜 기분 나쁘게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끌끌 찼다. “다 김정일 이롭게 하는 짓”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가게 앞에서 미국산 쇠고기 판매 반대 1인시위를 하고 있는 송정순 금천한우물생협 이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무개씨는 이날도 부인·손녀와 함께 와 등심과 불고깃감 등을 잔뜩 구입했다.

‘최고의 맛!! 최저의 가격!! 미국산 쇠고기 판매.’ 직판장 유리벽에는 쇠고기 부위별 가격표가 나붙었다. 꽃살(진갈비살)이 100g에 2800원, 알등심이 2300원이다. 장조림용 꾸리살은 100g에 1천원에 불과하고 윗등심(목심)과 국거리는 이보다 저렴해 각각 900원과 650원이면 구입이 가능하다. 판매 재개를 기념하기 위해 7월30일까지 30% 세일을 하고 있다지만, 과연 ‘저렴하다’고 할 만하다.

‘국민건강 위협하는 미국산 쇠고기 판매 중단하라.’ ‘유통이력제 시행 전에 쇠고기 시판 웬 말이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이날 한낮의 기온은 33~34℃를 웃돌았다. 가만히 서 있어도 연방 가슴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건물이 만들어준 그늘이 그나마 직사광선을 막아줬다. 제 몸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이는 송 이사에게 말을 붙이려는데, 고기를 사들고 나가던 6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고기만 맛있구먼…” 하고 눈을 흘긴다.

불매운동에 대한 미묘한 입장 차이

“정부가 국민 얘기를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 어쩌겠나. 직접 나서는 수밖에.” 송 이사가 헛헛하게 웃었다. “지역에서 함께 활동해온 학교급식연대 등과 함께 광우병 감시단을 공개 모집하기로 했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식당과 정육점 등을 찾아다니며, 미국산 쇠고기를 팔거나 사용하지 말라고 호소할 계획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가게가 한 곳이라도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그쪽을 밀어줄 작정이다.” 송 이사는 “지난해에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찬반 비율이 비슷해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관심이 덜했지만, 올해는 촛불을 경험한 시민들이 자기 삶과 직결된 문제로 실감하고 있다”며 “특히 청소년과 주부들의 관심이 커졌으니, 지역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라고 힘을 주었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오후 2시를 넘기면서 대여섯 평 남짓한 가게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줄이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가게 밖으로까지 사람들이 늘어선다. 송 이사가 하릴없이 그늘을 내주고 다시 양지에 섰다. 직사광선을 맞고 선 그이의 코에 금세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다. 길고 지루할 터다. 싸움은 쉽진 않을 사세다.

“어제 남편이 들어오더니 이틀 연속으로 쇠고기만 나왔대요, 구내식당에서. …근데 이 회사가 정부출연 연구소거든요. 거기가 하필 이럴 때 이틀 연속으로다가 쇠고기를 준비했다는 게 왠지 찝찝하고 떨떠름하고 그렇더라고요. …다른 분들은 남편님들 구내식당 이용, 걱정 안 하세요?” (‘82쿡닷컴’ 게시판, ID ‘남편들’)

“한 달간 아이 도시락을 쌌습니다. 매일 도시락 반찬 걱정에 반찬 연구하느라 아주 힘들더군요. …일주일 내내 고기만 나오는 식단이 불신만 가득하고, 우리 아이 혼자만 도시락을 싸서 다니니 눈치도 보이고 혹여 왕따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고….”(‘마이클럽’ 게시판, ID ‘ertre37’)

촛불을 밝혔던 주부들은 다시 ‘한숨’이다. 게시판마다 본격 유통이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걱정이 가득하다. 일부 네티즌들은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을 시작하자”고 말하지만, 아직 ‘촛불 같은’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참가단체 사이에서도 “아직은 재협상 요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쪽과 “불매운동을 통해 재협상 요구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단다. 촛불은 이대로 꺼지고 마는가?

먼저 나선 것은 생태·여성·환경단체들이다. 환경정의와 환경연합, 한살림·생태지평과 여성민우회 등은 7월9일 오후 서울 장충동 한살림 사무실에서 온라인 동호회 ‘세상을 바꾸는 여자’와 공동으로 촛불의 ‘다음’을 논의했다. 박명숙 환경정의 다음지킴이 국장은 “촛불만으로 작금의 상황이 바뀌지 않으니, 촛불 이외의 생활운동으로 가야 하지 않느냐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됐다”며 “촛불의 출발과 마찬가지로, 불매운동 역시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한 쇠고기 수입을 위한 재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배후도 주동자도 없이, 처음처럼

일찌감치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에 뛰어든 학교 등 단체급식 관련 시민·사회단체도 비슷한 생각이다. 김선희 학교급식네트워크 사무처장은 “촛불로 촉발된 불매운동은 단순 소비자 운동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 각계가 모여 시작하는 광우병 안전지대 선언운동”이라고 강조한다. “일단 불매운동으로 들어가면 주민운동이 관건이다. 학부모와 함께 지역을 돌면서 교육청, 의회, 지자체, 학교, 집단급식소를 중심으로 미국산 쇠고기를 쓰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고, 서약한 곳에는 이를 상징하는 표식을 내걸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 미국산 쇠고기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업체에 대해선 학교 등 단체급식 입찰 때 소비자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업체란 점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강구할 수 있을 게다. 무엇보다 촛불로 모인 국민의 뜻이 함께 발현될 수 있는 모델을 고민하고 있다.”

그렇게 촛불은, 흩어졌다. 더러는 여의도 방송가로 향하고, 더러는 퇴근길 강남역을 밝힌다. 종로 보신각과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도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처음 모일 때와 마찬가지다. 어차피 배후도, 주동자도 있을 리 없다. 산지사방 맘 끌리는 대로 움직여도, 해질 녘 어김없이 양초 한 자루 종이컵에 받쳐든다. 그 수는 때로 10명일 때도 있고, 100명일 때도 있고, 더러 200~300명씩 모여들기도 한다. 주말이면 다시 광장을 찾고 주중에는 제 할 일 알아서 한다. 광장을 앗긴 뒤에도 촛불은 꺼질 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 아니 진화하기 시작한다.

누가 시켜서 모인 게 아닌 것처럼, 누가 시킨다고 끝낼 일도 아니다. 인터넷 동호회 ‘엠엘비파크닷컴’은 등에 실은 광고에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말을 따 이렇게 썼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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