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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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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은 시청자로부터 나온다

등록 2008-06-24 00:00 수정 2020-05-03 04:25

사장 선출 과정에 정치권력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한 외국 공영방송들, 국민의 견해가 조화롭게 반영되는 시스템

▣ 김진웅 선문대 교수·신문방송학

#1. 지난 2001년 말 독일 공영방송 〈ZDF〉에서는 임기가 끝나가는 디터 슈톨테 사장의 후임 선출을 놓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사장 선출권을 갖고 있는 ‘ZDF방송위원회’(Fernsehrat)는 2001년 12월 1차 투표 및 2002년 1월 2차 투표에서 사장 선출에 실패하고, 2002년 3월 3차 투표에서야 당시 〈ZDF〉 편성본부장이었던 마르쿠스 셰흐터를 후임 사장으로 선출할 수 있었다. 또 후임 편성본부장 선임에는 무려 8개월이나 더 걸렸다. 이렇게 사장단 선출이 힘겨웠던 이유는 ZDF방송위원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보수정당 진영인 ‘흑우회’와 진보정당 진영인 ‘적우회’로 나뉘어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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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5년 1월 일본 은 여당의 유력 정치인이 공영방송 〈NHK〉의 한 프로그램에 대해 정치적 압력을 가해 방영 직전 내용이 수정·재편집됐던 사실을 폭로했다. 문제의 프로그램은 2차 대전 당시 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것으로, ‘전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제2회 전쟁시 성폭력’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2001년 1월30일 〈NHK교육텔레비전〉에서 방영됐다. 이로 인해 공영방송 〈NHK〉는 시민사회단체로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에비사와 회장이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독립적 감독기구에서 사장 선임

위의 두 사례는 정치적 독립성이 보장되고 모범적인 공영방송 체제를 견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과 일본의 공영방송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치권력의 개입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해외에서도 종종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영방송에 작용하는 정치적 입김은 우리나라와 외국이 서로 비슷한 것일까? 이는 공영방송 인사, 특히 사장 임명에 대한 각국의 제도를 비교해보면 대략 가늠할 수 있다.

먼저 독일 공영방송 사장 선임권은 방송사 단위의 독립적 감독기관인 방송위원회(제1공영채널 〈ARD〉의 방송위원회는 ‘Rundfunkrat’로, 제2공영채널 〈ZDF〉와 명칭이 약간 다름)가 전적으로 행사한다. 방송위원회는 사회단체, 정당대표, 직능단체, 종교단체 등 최대한 다양한 이해집단의 대표로 구성되는 일종의 방송평의회 성격을 띠고 있다. 방송위원 수는 최대 77명(ZDF)까지 다양한데, 추천기관에서 직접 선출해 파견하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들로 구성된 소규모 국민의회 성격을 지닌다. 사장 선임은 이 가운데 5분의 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가능하다. 고로 사장 선임 때 정부나 총리의 영향력이 행사되기 어려운 구조이다. 대신 방송위원은 보수당 혹은 진보당을 양축으로 정치성을 띠는 경향이 강해, 공영방송이 거대 정당에 의해 지배될 잠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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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우는 지난 2007년 〈BBC〉 칙허장 갱신으로 이전의 경영위원회를 대신해 신설된 규제감독기구 ‘BBC 트러스트’에서 사장을 선출한다. BBC 트러스트는 공식적으로 공익 및 공적 책임의 수호자 구실을 수행하는 기구로, 추밀원령(Order in Council)에 따라 임명되는 10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 4명은 전국 네 개 지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을 대표하는 위원으로 선출하도록 하는데, 이들은 해당 지역 시청자위원회(Audience Councils) 위원장이기도 하다. 수신료를 납부하는 국민의 다양한 견해가 트러스트에 직접 전달돼 사장 선임 등 〈BBC〉를 관리·감독하는 데 작용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일본 공영방송 〈NHK〉 역시 정부나 총리의 관여 없이 경영위원회에서 사장을 선출하는 시스템이다. 경영위원회는 총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교육·문화·과학·산업 등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되 8명은 전국 각 지역별 대표로 선발한다. 따라서 경영위원회는 지역 및 사회계층을 동시에 대표해 시청자의 견해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다. 다만 경영위원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총리가 임명하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간접적으로 행사될 가능성은 있다.

이상의 외국 사례에서는 우리나라 제도와 다른 몇 가지 점이 눈에 띈다. 첫째, 사장 선출 과정에서 정부나 총리 등 정치권력의 직접적인 참여가 배제돼 있다. 각 국가는 독립적 규제감독기구에서 사장을 직접 선임하는 시스템을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적 참여 시스템이 제도화돼 있다. 이는 각 지역 대표를 선출하거나 최대한 다양한 이익집단 대표로 규제감독기구를 구성하는 방안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셋째, 수신료 납부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적극 반영하고 있다. 공영방송 재원을 마련해주는 납부자의 견해가 통제 시스템에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수렴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독립적·다원적·참여적 통제 시스템은 한국방송 사장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우리나라 인사 구조와 대조를 이룬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고품격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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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은 한마디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방송이다. 제도상으로도 공적 통제, 공적 재원(수신료) 그리고 공공서비스라는 삼위일체적 운영 시스템을 기본으로 한다. 그중 공적 통제는 우선 국가(國)로부터의 독립성을 국민의 대의기구(公)를 통해 보장토록 하는 것을 뜻한다. 정치적 독립성이 달성되더라도 또 다른 지배권력, 즉 자본(私)으로부터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 선진 외국의 공영방송은 이 두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우리보다 최소한 두 발 앞선 셈이다. 영국 공영방송의 ‘퍼블릭 서비스’(public service), 독일 공영방송의 ‘기본 서비스’(Grundversorgung) 같은 공정하고 고품격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이러한 기반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들 나라 국민은 우리보다 최소한 몇 배 많은 수신료를 내고, 자국의 공영방송 존재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공영방송은 아직도 청와대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온 힘을 결집해야 하는 일차원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치권력을 감시·비판해야 하는 방송 저널리즘의 실현이 여의도에서는 아직 이상에 불과한 것인지 회의가 드는 수준이다. 그런데 청와대로부터의 독립이 끝도 아니다. 공영방송은 아무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텅 빈 공영(空營) 상태로는 작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모든 국민의 견해가 균형 있고 조화롭게 반영될 수 있는 공영(共營) 시스템의 작동이 중요하다. 한국방송 앞에서 지펴지고 있는 촛불이 방송사 내부로 스며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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