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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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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흐르는데 사람들은 메마르네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낙동강·한강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걸어보기… 강에 기대 사는 사람들은 찬반으로 갈려 골만 깊어가</font>

▣ 글·사진 신정일 문화사학자·‘우리 땅 걷기’ 대표

<font color="#C12D84">[한반도 대운하- 2부 사람들] </font>

영남의 젖줄이고 생명선인 낙동강의 발원지는 강원 태백시 천의봉 너덜샘이다. 강의 길이는 517km고, 하구는 을숙도다. 나는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부터 하구까지 직접 발로 걸어 책 두 권을 써냈다. 2008년 3월 초, 다시 찾은 부산 을숙도 낙동강 하구둑 기념탑 앞에서 강물을 바라보자 문득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염으로 상처 입은 낙동강 사람들

“강물은 감자를 심지 않네. 목화도 심지 않네. 심는 사람은 잊혀지지만, 유장한 강물은 흘러서 갈 뿐. 유장한 강물은 흘러서 갈 뿐.” 그렇다. 그동안 수많은 나라가 일어서고 쓰려졌지만, 강은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고 흐른다.

무심하게 속삭이듯 일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길은 구포역을 지난다. 그토록 번성했던 구포장도 구포나루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일제 때까지 보부상이 불렀다던 노랫가락이 남아 전할 뿐이다. “낙동강 칠 백리에 배다리 놓고, 물결마다 흐르는 행렬 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랑 선창가에 갈매기 춤추네.”

이어 도착한 물금나루에는 고기잡이배 몇 척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래고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사연들을 지닌 채 건넜던 물금(勿禁)은 낙동강의 모든 나루가 폐쇄됐던 때에도 살아남았다. 그래서 ‘금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물구미 또는 물금이라고 불리고 있다.

장날인데도 물금시장은 한산하기만 하다. 식당에 들어가 돼지국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경부운하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가 뭐 관심이 있나. 달갑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대개 반대라. 배가 다닌다고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노.” 사람들은 국밥을 들이켜며 말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터미널이 생기니 좋다고 하지만, 농사짓는 사람들은 당장 쫓겨날 것인데, 팔십 평생 먹을 것을 누가 준다나. 턱도 없는 일이라.” 그러자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 “며칠 전 페놀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나. 운하가 완공되면 그런 사고가 안 나는 뾰족한 방법이 뭐 있나? 우리는 식수 때문에도 반대한다카이. 그리고 뭐 실어나를 것이 있기나 하나.”

낙동강 사람들 사이에만 통하는 자조 섞인 푸념이 있다. ‘안동 똥물 대구가 먹고, 대구 똥물 부산이 먹는다.’ 산업화 이후 강이 급속도로 오염되면서 강에 젖줄을 댄 낙동강 사람들은 강의 수질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사람들의 푸념 섞인 목소리를 두고 강은 산을 휘돌아 물금에서 삼랑진까지 이어진다. 원동역 너머 가야진사(伽倻津祠)와 용당진 나루터가 보이고 강 건너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들은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곳 가야진에 공주 웅진과 함께 신라 사독 중의 하나인 남독이 있었다. 해마다 향촉과 사자를 보내서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제사를 지냈으며, 한발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냈다. 원동역을 뒤로하고 길은 삼랑진으로 이어진다. 그사이 낙동강은 어느새 작원관(酌院關)에 이른다. 작원관은 동래에서 서울로 이어진 영남대로의 중요한 역원이었다. 평소엔 사람과 화물의 검문소였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군사적 전략지였다. 이곳에서 삼랑진이 멀지 않다.

삼랑진 또는 삼랑이라고 부르는 삼랑리는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하여 마을을 싸고 흘러간다’ 또는 ‘세 갈래의 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거센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낡은 삼랑진교가 옛 모습 그대로 걸려 있다. 좁은 다리를 자동차들은 행여나 서로 닿을세라 조심스레 지난다. 이곳에 있던 나루가 뒷기미 나루였다. “뒷기미 나리는 눈물의 나리, 임을랑 보내고 나 어찌 살라고 아이고 데고, 성화가 났네.”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올라간 강변에 수산과 남지 그리고 박진나루가 있다.

소작농 몰아내는 부재 지주들

박진대교 아래에 배 두어 척이 매여 있고, 마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집들은 대부분 비어 있다. 어쩌다 지나는 자동차들. 다시 도착한 곳이 나루가 있던 적포나루다. ‘낙동강 다방’이라고 쓰인 간판이 지나는 나그네를 맞는다. 적포나루 아래로 낙동강은 흐르고 강은 한없이 넓고 잔잔하다.

강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을 지나 고개를 넘자 현풍의 박석진교가 보이고 낙동강은 고령과 대구로 이어진다. 경북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부근 농경지에는 매실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다년생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몇 년 전 동강댐이 건설된다고 알려지자, 사람들은 댐 주변에 온갖 과실수들을 우후죽순으로 심었던 적이 있다. 그것도 전통이라면 전통일 것이다. 아직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부재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몰아내고 일년생 농작물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다년생 과실수들을 심고 있다.

성주대교 아래에서 갈대 잎들은 바람에 서걱인다. 여정은 왜관으로 이어진다. 저물어가는 왜관철교 옆에는 ‘낙동강 대운하 건설 운동본부’라고 쓰인 건물이 보인다.

구미에 접어들며 날이 어두워졌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 이중환의 에 실린 글이다. 인재의 곳간인 선산군에 딸린 한적한 시골이었던 구미(龜尾)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5·16이 일어난 지 두해 뒤였고, 1978년에는 선산을 병합해 시로 승격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이곳 구미에서 낙동강 페놀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90년 10월21일이었다. 두산전자 공장 배출구에서 흘러나온 페놀은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가정의 수돗물까지 흘러들어갔다. 임산부가 유산하고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구미 시민들은 밤을 새워 약수터에 긴 줄을 만들었다.

“구미 지역은 살 만하니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고령은 무덤(고분 등 유적) 가지고 못 먹고 사니까 급한기라. 한강 운하는 안 하더라도 낙동강 운하라도 먼저 해라 하는 분위기인기라. 상주나 문경 역시 적극 찬성이고 대구도 마찬가지라 카더라.”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우째 됐든 한반도의 강을 가지고 토목적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 기라. 우선 공사를 시작하게 되면 정수 문제는 어떻게 되는데. 당장 공사 기간에 식수 문제는 어떻게 할 긴데.” 사람들의 마음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진다. 일선을 거친 강물은 낙동나루로 이어진다.

‘조선조 문물의 유통은 수로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해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로 점촌·문경을 지나고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이른 뒤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했다.’ 이 말하는 것처럼 조선시대만 해도 낙동나루는 낙동강 물길 중 가장 큰 나루였다. 영남 지역 사람들이 서울로 용무를 보러 가거나 과거 보러 갈 때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였던 낙동나루는 이제 한산하기만 하다.

새도 넘기 힘들다는 조령

강을 거슬러 중동면 우물리(于勿里) 토진마을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대운하에 대해 물었다. “강가에 있는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선착장이 들어서면 경제적으로도 좋을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땅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지금 10만원에서 12만원까지 해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매매는 안 되지요. 낙동면 사무소 근처에 부동산중개소가 여남은 개가 들어섰지만 매매는 안 돼요.”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우리 생각이지만 대운하가 되겠습니까? 요즘 농촌에 살아도 멍청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보고 있어요. 괜히 사람들 바람만 잡아놓고,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낙동강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아무개씨의 말이 가슴속에 묘한 여운을 남기는데, 다시 한마디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저 산 너머 우물리에서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인 유우익씨가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기록을 보면, 한반도 대운하를 기획한 유우익씨의 고향인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는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고 솔리산·팔공산·일월산의 기맥이 만나는 이수삼산합국(二水三山合局)의 천하대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우물리에서 만난 노인들에게 대운하에 대해 물었다. “개발하면 좋지 않겠나. 우리들한테도 좋고, 나쁠 것이 뭐 있겠노.” ‘개발=이익’이라는 공식 앞에 눈이 먼 이들이 어찌 이익이 에서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지 않다면 어찌 정신을 전할 수 있겠는가?”

여정은 안동으로 향하는 낙동강 본류를 버리고 영강으로 접어든다. 영강이 다시 조령천과 만나는 두물머리의 한쪽 벼랑 끝에 고모산성이 있다. 산성에 올랐을 때 희끗희끗 눈발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아래에 진남교반이 펼쳐져 있다. 불현듯 환상처럼 5천t급 배가 지나는 풍경이 보인다.

천혜의 절경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토천과 고모산성을 뒤로하고 문경에 접어들면서 마치 한겨울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곳 문경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신라·백제 3국이 각축전을 벌인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 때 백두대간에 제일 먼저 계립령(鷄立嶺)이 개척됐고, 그 뒤를 이어 문경새재가 열렸다. 새재는 한강 유역의 중부권과 낙동강 유역의 영남권을 연결하는 국토의 대동맥 구실을 했다. 조령(새재)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한 고개 또는 억새풀이 많이 우거져 있는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드디어 한강유역권이다.

장마 때에는 어떻게 대비할까

한강은 강원 태백시 창죽동 검용소에서 514km의 여정을 시작한다. 한 방울씩 작은 물방울이 모여 실개천이 되고 실개천이 모여 지류를 이룬다. 수많은 지류들이 모여 본류가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강이다. 강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태어나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결국 화엄의 바다로 들어가는 사람의 일생과 비슷하다.

삼척·정선·영월·단양·충주를 지나온 남한강은 탄금대 아래에서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을 받아들인다. 조정지댐에 막혀 한껏 부풀어오른 강물은 넘실거리고, 나라의 중앙에 자리잡았다는 탑평리 7층석탑은 국보 6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곳에서 목계나루가 지척이다.

목계교에서 바라본 목계나루터에는 고기 잡을 때에나 쓰이는 목선 두 척이 매여 있을 뿐이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신경림 시인의 시 구절 속에 나오는 목계나루는 조선 후기 마포 다음가는 한강의 주요 하항(河港) 중 하나였다. 이중환이 에서 “목계에는 동·서해의 어물과 산간지방의 산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했는데, 지금 목계나루는 목계반점, 목계수퍼 등의 이름으로만 알아볼 수 있는 한적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충주시 목계에서 흥원창이 있는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이르는 강은 언제나 봐도 아름답고 아늑하지만 수량은 많지 않다. 저 강을 따라 수많은 뗏목과 물산이 오갔을 것이다. 웬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제방 둑으로 들어서고 여성 네 명에 중년 남성 한 명이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내리자마자 손짓을 해가며 하는 말. “저기에 터미널이 들어서고 저기는 상가 예정지입니다.” 나는 중년의 여성을 붙들고 다짜고짜 물었다. “땅 사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대운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들어야죠.” “이로운 게 뭐지요?” “운하가 만들어지면 다 이롭지요.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고속도로는 대기오염을 유발하는데, 배가 물류를 실어나르면 대기오염을 안 시키잖아요. 일자리 창출도 되고, 물류비용이 줄어들며, 국가의 7% 성장에도 도움이 되고, 관광산업도 활성화되고 좋은 점이 훨씬 많아요.” 다시 물었다. “안 좋은 점은 뭐가 있을까요?” “환경영향평가가 통과되지 않을까봐 그게 조금 걸려요.” 선종의 격언에 “물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거든 그 물을 마셔라”라는 말이 있는데, 콘크리트로 범벅을 하고 5천t급 배가 수시로 떠가는 물, 그 물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한다면 저런 말들이 나올까?

양수리는 햇살에 반짝이는데…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 여주 쪽으로 흘러가는 흥호리에는 조선 전기 강원 원주군 법천리에 설치됐던 조창인 흥원창이 있었지만 그 기능을 잃은 지 너무 오래다. 사람들은 이곳 흥호리 부근을 삼합지점이라고 부른다. 겨울철 강물이 얼면 담배 한 대 피울 참에 강원·경기·충청 3도 땅을 다 밟아볼 수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며, 3도의 물이 한데로 모인다 해서 합수머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남한강은 신륵사 부근을 지나며 여강이라는 이름을 얻은 뒤 양화나루로 이어진다. 제천시 금성면 양화리에서 여주군 대신면 당산리로 건너던 양화나루터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972년에 큰 장마가 졌을 때 여주군청이 닷새 동안이나 물에 잠겼던 적이 있어요. 여주 밑에 양섬이라는 섬이 있는데, 그 밑이 암반이에요. 그 암반을 어떻게 할는지. 청계천 하나 만들고서 우리 민족의 핏줄인 강을 가지고 장난하면 안 되지요.” 한 고등학교에 재직하는 선생님의 말이다. 이곳 양화나루 밑에 댐이 들어설 것이란다. 댐이 들어서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여울물도 사라질 것이고 여울물 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섬강 입구인 홍흥리에서 마재까지 월계탄, 대탄 등 13개의 여울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고작 몇 개만 남아 있다.

양화나루에서 만난 사람들은 운하를 찬성하고 있었다. “운하가 들어서면 수변계획이 없어지니까 이 지역이 발전되고 여주가 시가 될 것입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은 “운하를 해보지도 않고 나쁘다고 하면 되냐”고 나무란다. 해놓고 잘못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양평 양수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붉은 천에 ‘대운하 예정 화물 터미널 설치 관철하자’라고 쓰인 펼침막이 붙어 있다. 펼침막의 주인공은 양서면 해병전우회다. 저마다 추억을 안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데, 양수리에서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며 부서진다.

이곳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된다. 두 개의 큰 물길이 만나는 곳이므로 두물머리, 두머리 등으로 불리는 양수리의 옛 이름은 ‘병탄’(幷灘)이었다. 두물머리에서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냈다.

팔당댐을 지나 팔당대교 아래 미사리 부근에서 한강은 마지막으로 여울져 흐른다. 한강 가운데에 모래가 밀려 성을 이루었으므로 미사촌이라 불렸던, 그 아름답던 미사리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고 강 건너 덕소의 아파트 숲은 세상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의연하게 서 있다. 흐름을 멈춘 듯하면서도 흐르는 한강이 구리를 지나 광나루(광진)에 닿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육군 소장 워커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워커힐호텔 아래에 한양과 경기 광주를 잇던 나루터인 광나루가 있었다.

이곳 광나루에서부터의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다. 광진·송파진·동작진·용산진·마포진·공암진·조강진이 모두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나루였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사라진 것이 어디 그뿐이랴?

강을 사랑하는 이여, 걸어보라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서울의 한강에는 360만 평인 잠실섬, 36만 평인 부리도, 40만 평인 저자섬, 밤섬, 여의도, 난지도 등 여섯 개의 큰 섬이 있었고 드넓은 백사장이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시작된 공유수면 매립과 한강 종합개발의 여파 속에 그 모습이 크게 바뀌였고, 선유도와 밤섬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어나 볼까.” 이라는 민요 속에 남아 있는 노량진과 마포나루를 지난 한강은 김포와 고양 일대를 지나며 임진강을 받아들인다. 강 위에 그어진 휴전선을 따라 내려간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한강은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강물은 이제 곧 바다가 될 것이다.

지금은 ‘흔전만전 물 쓰듯 한다’는 시대가 아니고 ‘물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는 절체절명의 시대다.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옛말처럼 강을 자주 보고 느껴야 사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에 복종할 때에만 자연에 명령할 수 있다”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저 한강과 낙동강은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까.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강은 고요히 말한다. “두려워할 줄 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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