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의원들 공천에서 탈락하며 탈당 여부에 관심 집중…당내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우려도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3월13일 밤 11시30분, 유승민 의원이 탄 KTX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날 저녁 7시30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가 발표한 영남 지역 공천 확정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올라 있었지만, 이 지역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친박근혜) 의원 10명을 비롯한 박근혜계의 정치적 진로를 의논하러 부리나케 상경하는 길이었다. 친박 의원 중 최고의 전략가로 통하는 그는 기자와의 짧은 통화에서 여러 차례 “충격적”이란 표현을 썼다. 역에서 내린 그는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인 여의도로 향했다. 곧바로 친박 의원들의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을 만났다. 공천 명단에서 이름이 빠진 김 의원은 1시간 전쯤 분노에 찬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한 참이었다. “결국 예상대로 박근혜 죽이기가 집행됐다. 공천 기준은 없었다. 집권 여당임에도 공천의 기준 없이 이현령비현령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적을 죽인 결과다. 부당한 공천에 대해서 혼자 일이 아니고, 박근혜 전 대표를 도왔다는 이유로 탈락한 동지들을 위해서 내일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서 그 내용을 따지겠다.” 흥분한 회견의 말미에 밝힌 거지만, 그가 말하는 ‘자기들’은 “대통령 모시는 간신”들이다.
모든 건 예고된 드라마
‘피의 목요일’. 주식시장의 폭락을 빗댄, 좀 섬뜩한 말이지만, 이날은 분명 지난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서 박근혜를 도왔던 한나라당 의원들에겐 잊을 수 없는 참혹한 날이다. 한 친박 의원은 “오늘은 정말 아무 말 안 하고 싶다”며 흐느꼈다. 이날 김무성을 비롯해 박종근·이해봉·이인기·김재원·김태환·김기춘·이강두·엄호성·유기준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박근혜 대표 시절 대변인을 지낸 유기준 의원도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선 승리한 진영의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희생양이 됐다. 살생부가 거의 맞아들어가는 걸 보면 보복 공천, 표적 공천이 확실하다”고 분노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는 떨어진 의원들에게 일일이 위로 전화를 돌렸을 뿐, 긴 밤 내내 침묵을 지켰다.
박근혜 전 대표를 따랐다가 희생된 의원들은 다음날 온통 그의 입만 쳐다봤다. 그는 영남권 공천이 있기 하루 전인 12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당에 충분한 ‘경고’를 보냈다. “이런 공천 갖고는 앞으로 선거가 끝나도 한나라당은 화합하기 힘든 상황이 올 것이다. 이리 잘못되고 기준이 없는 공천은 처음 본다.” 하지만 경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까만 남았다. 다가올 총선의, 적어도 한나라당 쪽의 가장 큰 총선 변수로 다시 박근혜가 떠오른 것이다.
사실 수위·강도의 문제였지 모든 건 예고된 드라마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8월20일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되는 순간, 다시 그가 12월19일 대통령이 되는 순간, 박근혜계의 쇠락은 정치적 필연으로 굳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승민 의원은 지난해 경선 직후 “앞으로 3년이 박근혜 (전) 대표에게 가장 큰 정치적 시련기가 될 것”이라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시련이 닥치기까지 시간이 잠시 지체됐을 뿐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무소속 출마했을 때만 해도 박 전 대표를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 대접했다. 당선된 뒤에는 여당이 된 한나라당의 헤게모니를 좌우할 제18대 국회의원 공천을 놓고 두 번이나 박 전 대표를 만나 의견을 들어주는 제스처를 취했다. 대신 박 전 대표는 공천 시기나 공천심사위원회 구성을 양보했다. 그리고, 지금 사태는 유승민 의원이 예상한 시나리오 쪽으로, 그것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수족’들이 잘려나가고 있지만 박 전 대표는 마땅한 카드를 쥐고 있지 않다. 한 친박 초선 의원은 “박 전 대표가 경고 외에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기자회견 뒤 한 말이다.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친이’(친이명박) 쪽 인사는 “기자회견 하는 것 자체가 박근혜가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 방증하는 것”이라며 “안돼 보이고 가엽기까지 하더라”라고 말했다. 탈당은 어렵지 않겠냐는 전제에서 내놓는 예상이자 분석이다.
그런데 상황이 악화했다. 앞서 박 전 대표 스스로 “앞으로 남은 걸(영남·서울 공천) 지켜보고 판단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영남 공천의 뚜껑이 열린 이상 달라진 판단을 내놔야 한다. 더 높은 수위의 정치적 발언이나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 게 사실이다. 그게 탈당이 될지에 정치권 모두 주목하고 있다. 박 전 대표 쪽의 이정현 전 공보특보는 “지금(3월14일)으로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대표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고 말했다. 예상을 깨고, 박 대표는 이날 입을 열지 않았다.
탈당, 잃을 게 너무 많다
주위에서는 계속 탈당을 자극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 쪽 의원들과 당원협의회 위원장들은 집단 탈당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날 김무성 의원은 탈당해 무소속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청원 전 대표는 문화방송 라디오 에 출연해 “우리가 5년 뒤에 박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씨를 뿌리고 밭을 갈자.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이 있는 게 좋지 않냐는 의견이 모아졌다”며 “기존에 실무적으로 준비해놓은 (창당 준비)팀들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무성 의원과 서청원 전 대표 등을 중심으로 한 친박 인사들의 탈당 행렬이 이어지더라도 박 전 대표가 깃대를 들고 선봉에 서지 않는다면,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박 전 대표의 탈당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잃을 게 많아서다. 어쨌든 30~40%가량 살아남은 친박 의원들이 있다. 강재섭 대표의 한 측근은 “반은 건진 거 아니냐”고 말했다. 5년 뒤 대선을 향해 암중모색할 세력적 기반이 완전히 침식된 건 아니다. 일부에서 전망하는 것처럼 총선을 코앞에 두고 새 정당을 만드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당을 만들거나 서청원 전 대표의 말마따나 기존 정당을 활용해 총선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큰 소득을 챙기기 어려운 조건이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계파 정치를 안 한다고 선언한 그가 친박 의원들의 희생을 계기로 탈당하는 것도 명분이 서지 않는다. 한 번 탈당해서 한국미래연합이란 신당을 만들었다가 실패한 쓴 경험도 떠오를 수밖에 없다. 2004년 탄핵 역풍에 침몰하던 한나라당을 다시 일으켜세운 주역으로서 박 전 대표 자신부터가 당을 떠나는 걸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일리 있다. 유승민 의원은 지난 1월 “박 (전) 대표는 오늘날의 한나라당이 있기까지 누구보다 헌신했다. 그래서 주인 의식이 있다. 그런 분이 왜 당을 떠나냐?”고 반문한 바 있다. 상황이 변한 지금도 박 전 대표를 잘 안다고 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이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손님이 싫다고 주인이 집을 나갈 순 없다는 인식이다.
물론 그가 탈당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서청원 전 대표의 지적처럼,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에 남아 있더라도 앞으로 ‘팽’당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게” 현실이다. 그러니 차라리 탈당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낫다는 게다.
무엇보다도 박 전 대표가 지난 몇 달 새 당권을 틀어쥔 이명박계의 당 운영에 극도의 불신감을 쌓아왔다는 점이 탈당이란 극단적 선택을 점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원칙’과 ‘기준’을 10차례 넘게 언급하면서, 최근 당 공천이 “정치 발전에 퇴행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측근들은 박 전 대표가 지난 4년 동안 어렵게 쌓아온 당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에 가장 분노하고 있다고 말한다. 수도권의 한 친박 의원은 “박 대표가 자기 새끼 죽는 것 갖고서 뭐라고 할 분이 아니다. 이렇게 나서는 건(기자회견) 당내 민주주의의 후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분노가 탈당의 명분으로 충분히 쓰일 수 있다.
당의 3분의 2가 이명박계로
공천을 계기로 한나라당 내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비단 박근혜계만의 주장이 아니다. 공천이 확정되기 전 친이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꼭 사람 놓고 장난하는 거 같다. 어떤 원칙과 기준도 없다. 밀실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현역 의원의 경우 의정활동 평가 등을 계량화해 심사에 반영하는 통합민주당의 공천보다 못하다는 자괴감도 한나라당에서 나오고 있다. 공천을 늦추면서 2004년 총선 이후 5·31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에서 어느 정도 안착된 상향식 공천(경선)은 완전히 사라졌다. 2004년 총선에서는 경합 지역 후보들을 공개 토론에 부치는 등 투명한 공천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계파 안배에 따른 밀실 공천뿐이라는 당 안팎의 비난이 거세다. 이명박계에 확실한 줄을 대지 않은 이상 누구도 공천을 장담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이번 한나라당 공천의 큰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공천 탈락자들의 반발 또한 더 큰 게 사실이다. 여론조사는 고무줄 잣대로 활용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돈다. 이성헌 전 한나라당 의원은 “여론조사에서 20~30%포인트 앞선 사람들도 특별한 이유 없이 공천 탈락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말한 친이 의원은 “이건 당내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자기 사람 심기만 난무할 뿐”이라고 당을 비판했다. 영남에서 43.5%에 이르는 현역 의원을 물갈이하고도 한나라당이 개혁 공천이란 소리를 못 듣는 까닭이다.
청와대가 이번 공천의 실질적 지휘부였다는 얘기도 한나라당 내부와 언론 보도를 통해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강재섭 당대표와 이방호 총장 등을 만나 공천을 조율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김무성 의원은 3월14일 청와대 개입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김 의원은 자신을 낙천시킨 건 “청와대의 지시”였다고 말했다. 그동안 “공천은 당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논평을 내왔던 청와대는 이런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부인과는 달리, 한나라당이 ‘이명박당’이 되고 있는 건 눈으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친박 공천 탈락자의 빈자리에는 대부분 친이 인사를, 친이 공천 탈락자의 자리엔 역시 친이 후보를 심는 식으로 ‘이명박 사람’ 심기에 바쁘다. 영남권의 경우 겉으로 보면 친박 탈락자(10명)보다 친이 탈락자(12명)가 더 많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빈자리엔 친이 인사들이 공천을 받는 식이다. 최근 한나라당 내에서 이명박계가 공천을 싹쓸이하는 것을 두고, “‘명’박이 ‘계’보만 ‘남’는다”는 뜻의 ‘명계남’이란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다. 가 3월14일 현재 한나라당 공천이 확정된 전국 216곳의 총선 후보 성향을 분석했더니, 이명박계가 140여명, 박근혜계가 40여명으로 집계됐다. 당의 3분의 2가 이명박계로 충원된 셈이다.
당내 일부에선 행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해야 할 국회를 이명박 정부의 거수기로 만들려 하고 있다는 자조마저 나온다. 공천에서 탈락한 한 의원은 “이명박 계파로만 심어놓은 한나라당은 청와대와의 긴장 관계가 사라질 것이고, 결국 몰락의 길로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꾀한다면서 지금처럼 한나라당을 말 잘 듣는 ‘이명박당’으로 만드는 게 되레 이명박 정부나 당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분은 무서운 사람이다”
박근혜의 침묵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깨질까? 그가 ‘이런 정도 사태가 되면 다시 발언하고 행동에 나서겠다’고 내심 설정해둔 마지노선이 있을 것이다. 그 마지노선이 언제 깨질지, 누군가가 공천에서 떨어지는 시점일지, 친박 의원들 중 몇 명이 탈락하는 시점일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기준이 있는 건지 아무도 알 순 없다. 다만, 박 전 대표의 측근인 구상찬 전 공보특보(서울 강서을 공천 확정자)의 말은 참고할 만하다. “박 대표는 무서운 사람이다. 산수를 잘 못하는 분이다. 옳고 그름만을 판단하는 분이다. 이게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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