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또 하나의 가족, 콜렉티브 하우스

등록 2008-03-14 00:00 수정 2020-05-03 04:25

언제든 누군가를 만나고 언제라도 혼자가 되는 생활, 일본의 대안주택 운동

▣ 치바(일본)=정지영 치바대 교수·도시환경시스템학과

“할아버지, 저 이거 또 만들었어요.”

꼬마 다이치가 60살 독신 남성 하기와라씨 옆에서 쫑알댔다. 다이치는 요즘 식사 때마다 하기와라씨 옆에 앉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노래를 부른다. 식사 시간에 떠든다고 하기와라씨에게 혼나느라 입이 툭 튀어나와 있던 게 엊그제지만 얼마 전 하기와라씨가 젓가락으로 조명등 만드는 법을 알려준 뒤부터 ‘할아버지-손자’ 사이가 됐다. 목공 클럽에서 목수 일을 하는 하기와라씨도 없던 손자가 생겨 싫지 않은 눈치다.

콜렉티브 하우스(Collective House·공동체 주택) 캉캉모리에서는 이렇게 새로 생긴 가족들이 모여 일주일에 3번 함께 밥을 먹는다. 캉캉모리는 2003년 6월 만들어진 민간임대 공동주택이다. 현재 1살부터 70살까지 다양한 세대가 살고 있다. 공동 식사는 한 달에 1번씩 돌아가면서 3명이 준비한다. 갑자기 누군가 급한 일이 생겨서 빠지면 ‘급함. 식사 준비 서포터 필요’라는 문구가 회원 메일링에 뜬다. 오랜만에 필자도 친자매처럼 지내는 싱글맘 히메노씨도 만나볼 겸 저녁 준비를 돕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이날의 메뉴는 한국식. 버섯야채된장국, 잡채, 돼지김치지짐이, 오이무침 등을 만들었다. 평소보다 10인분을 더 준비했는데도 금세 바닥났다. 두 아이의 아빠인 30대 기노시타씨는 “요리는 못하지만 설거지는 자신 있다”며 팔을 걷고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씻었다. 청소는 10명씩 당번을 정해 세 달을 주기로 돌아가면서 한다. 이 밖에도 가든, 인테리어, 정보통신 등 13개 클럽이 함께 활동한다. 비혈연 가족들이 모여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생활하는 곳이 캉캉모리다.

싱글라이프에 따르는 고독감 해결

콜렉티브 하우징은 1인 가정의 증가 및 핵가족화, 고령사회화에 따른 고독감을 극복하고, 가족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자녀 양육, 간병에 대한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등장한 주거 형태다. 20세기 초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등 북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일본에선 1985년 필자의 스승인 일본여자대학 고야베이쿠코 교수를 중심으로 저널리스트, 사회학자, 요리연구가 등 다양한 여성전문가들이 모여 ‘대안주택프로젝트연구회’를 만들고 도시형 콜렉티브 하우징 운동을 시작했다. 기존의 가족·주택·복지 개념의 틀을 벗어나 생활 만들기, 마을 만들기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ALCC’(Alternative Living Challenge City), ‘세타가야에 콜렉티브 하우스를 실현하는 회’ 등 비슷한 운동단체들도 뒤이어 만들어졌다. 현재는 필자가 참여하는 민간비영리조직(NPO) ‘콜렉티브 하우징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 일본의 1인 가정은 전체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일본 총무성 통계국 조사). 독신자 인구는 젊은 층에서 중장년, 고령층까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일본 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의 2002년 조사(미혼남녀 3295명 대상)에 따르면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답한 미혼자가 30% 이상을 차지하며, 정부금융기관인 주택금융공고를 이용하는 주택 구입자 중 독신여성의 비율이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일본의 ‘독신’들은 싱글라이프를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다. 그러나 한편 나이듦에 따르는 고독과 불안 또한 현실이다. 이런 시대 흐름을 반영해 만들어진 콜렉티브 하우스는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언론에 다양하게 소개됐고, 드라마의 모티브로도 사용됐다.

일본에는 캉캉모리 외에 어떤 콜렉티브 주택이 있을까. 1997~99년, 한신 대지진(1995년) 이후 그 지역의 나이 많은 독신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공영 콜렉티브 주택 10단지 341호가 공급됐다. 도시계획 기획자인 이시토나오코씨가 중심이 돼 설립한 자원활동 그룹이 주택 공급을 주도했다. 이시토나오코씨는 “언제든지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또 언제라도 혼자가 될 수 있는 생활, 가끔 대가족처럼 모여서 식사할 수 있는 주택”이 콘셉트라고 말했다. 현재 공영 콜렉티브 하우스 제1호인 가타야마후레아이 주택에는 독신 고령자 6명이 함께 살고 있다. 70대 독신여성 오우미씨는 “주말 다과회에서 서로의 건강을 확인한다. 누가 언제 저 세상에 갈지 모르지만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가 이루어진다면 먼저 죽어도 안심”이라고 말했다. 쓸쓸하게 혼자 숨지는 고독사의 걱정이 없어진 것이다.

도쿄에서 2시간 열차를 타면 시즈오카현 이즈시에 있는 도모다치무라(친구들 마을)에 갈 수 있다. 이곳에도 독신 고령층들이 주로 모여 산다. 60대 중반의 한 독신여성은 아침·저녁 이용하는 노천탕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취미활동인 꽃꽂이와 음악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하루가 홀딱 간다”고 즐거워했다. 현재 이곳엔 독신자 26명과 6쌍의 부부가 사는데 거주자의 평균 연령은 67살이다.

일본 도심에는 젊은 독신층이 선호하는 ‘셰어 하우스’(Share House)가 있다. 셰어 하우스는 학교 기숙사나 하숙집처럼 부엌과 욕실, 화장실 등의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주거형태다. 필자의 2005년 조사(50주택 783명 대상)에서 입주자들은 전세자금이 필요 없는 점, 교통이 편리한 도심에 위치하는 점, 홈페이지로 입주자를 모집해 부동산 업체에 가는 시간이 절약되는 점 등을 장점으로 꼽았다. 공동생활의 알콩달콩함과 안전도 인기 요인이다. 필자가 콜렉티브 하우스와 셰어 하우스를 접목해서 기획한 ‘CH 주택’은 도쿄대에서 5분 거리에 있다. 30~50대의 독신남녀 4명이 각자 저렴한 집세를 내고 공동의 넓은 거실과 테라스가 있는 집에 살고 있다. 이들은 테라스에서 다과회와 파티를 열면서 동네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일본의 빈곤한 독신층은 ‘Net 카페’를 이용한다. 집이 없어 인터넷 카페나 만화찻집 등을 전전하면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Net 카페 난민’은 전국에 5400명을 넘는다(일본 후생노동성, 2007). 이들 중 절반 이상은 단기고용직 비정규 노동자로 20대가 26.5%, 50대가 23.1%였다. 일용직 일이 있긴 하지만 고용보험이나 사회보험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잠자리가 인터넷 카페인 이들의 별칭은 ‘숨겨진 홈리스’다.

다양한 가족형태 확산되는 추세

최근 일본에는 ‘다양한 가족’들이 늘고 있다. 그중에는 사실혼 커플이 가장 많다. 사실혼을 선택하는 여성 대부분은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성을 유지한다. ‘성’과 소득세 및 주민세의 배우자 공제를 바꿔버린 셈이다. 사실혼 외에도 결혼했지만 각자의 집에서 사는 별거혼, 평일은 혼자만의 생활을 즐기고 주말에만 부부생활을 하는 주말혼 등도 생겨나고 있다. 캉캉모리처럼 독신자, 커플 등 다양한 가족이 모여사는 ‘네오결혼’ 형태도 가까운 미래에 보편화될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처럼 사회의 틈새에서 전통적인 가족 형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런 다양한 가족 형태, 독신자의 생활방식에 맞춰 사회와 국가도 미래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