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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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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의 역설

등록 2008-03-07 00:00 수정 2020-05-03 04:25

인사 파동을 지켜본 MB 공신의 고백 “상위 1%를 위한 정부, 오늘 시작했는데 느낌은 꼭 임기말”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아니 제정신이냐!”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나라당 소속의 한 영남 의원은 지난 2월24일 아침 6시30분, 예의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지역구를 돌기 시작했다. 다음 행선지인 동네 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조기축구 회원들한테서 기어코 타박을 받았다. “도대체 장관 인사를 어떻게 한 거냐. 나름대로 다 이명박을 지지한 이유가 있는데, 국민의 뜻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니냐?”

검증 시스템이 아니라 철학의 부재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공신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그는 다음날 오전 10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대통령 취임식장에 한자리를 차지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이에 이춘호 여성부 장관 내정자가 물러났다. 취임식이 끝난 뒤 국회의원실에서 만난 그의 얼굴에선 대통령을 만들어낸 자긍심이나 기쁨, 열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이건 흔히 말하는 검증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의 부재에서 나오는 현상”이라고 짚었다. 그의 목소리엔 기대가 산산히 깨진 뒤 찾아온 실망과 약간의 배신감마저 묻어 있었다. “그런 면면의 사람을 갖고 앞으로 5년 동안 뭘 하려고 했던 건지, 도무지 ‘컬러’(색깔)나 철학을 읽을 수 없었다. 심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대통령 본인의 철학이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은 지경이다. 대통령이 얘기했던 실용이란 게 본질과 정체성 없는 이런 실용이었나 싶다.” 우수를 지나 경칩을 코앞에 둔 이날, 의원실 창밖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상위 1%의 성공한 사람들, 이게 의미하는 게 뭐냐? 서민의 아픔은 모르고 경쟁 위주의 적자생존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거 아니냐!”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관의 부재를 지적하던 그는 어느새 이명박식 철학과 가치관이 우리 사회의 상위 1%의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 수 있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시작했는데, 느낌은 꼭 임기 말”이라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춘호 장관 내정자가 사퇴한 지 이틀 만에 남주홍, 박은경 후보자도 뒤를 따랐다. 흔히 하는 말로 ‘사상초유’의 일이다. 다시 이틀이 지나서야 이명박 대통령은 첫 청와대 확대 비서관 회의에서 “다소 출발이 매끄럽지 못한 점이 있었다. 우리 자체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전매특허인 ‘일’을 거듭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실적과 성과에 과도하게 집착한 그의 대통령직 인수위는 성공하지 못한 인수위로 기록됐다. 실용과 능력에 지나치게 집착한 초대 국무위원 인사는 역대 최악의 인사로 기록되게 생겼다. 실적과 성과, 실용과 능력의 지독한 역설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추락했다. 미디어리서치가 한국방송 의뢰로 2월23일 전국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체의 75.1%만이 “당선인이 대통령 업무를 잘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절대 수치는 높은 편이지만, 상대 수치는 낮다. 한 달 전 같은 조사에 비해 10%포인트가 떨어졌다. 또 5년 전 노무현이 92.2%, 10년 전 김대중이 90%에서 출발했던 것과 비교해서는 더욱 그렇다.

국무위원 15명을 국민 앞에 내놓은 건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는 2월18일 국무위원을 직접 소개하면서 “내각은 국민이 기대하는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고 선진, 일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경륜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경륜은 곧 능력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이명박식 인사 스타일은 한마디로 능력 중시로 표현된다. 나쁘게 얘기하면 ‘능력 지상주의’다. 선거 기간 내내 이명박을 도왔던 참모나 의원들은 능력과 성과를 중시하는 이명박식 사람 쓰는 스타일을 겪었다. 정종복 한나라당 의원은 대선 뒤 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MB에겐 실용주의 생각이 온몸에 배어 있다. 기업에서는 이문을 많이 남기면 된다. 공허한 구호나 이념, 이런 거 안 따지고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는 능력 있는 사람을 쓴다.” 이제 능력은 단순히 이명박식 인사 스타일을 넘어서, 경쟁·성공이란 단어와 화학적으로 결합해 이명박 정부의 국정 철학의 토대로 굳어졌다. ‘국민 성공시대’는 이 정부의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대선 전과 후를 구분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후보자들 중에서도 몇몇은 사퇴한 후보자들에 뒤지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각 인사의 문제점을 시스템의 부실로 설명하기 어렵다. 인사 실패는 이명박식 리더십이나 철학, 가치관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의 분석은 날카롭다. “성과를 중시하는 이명박 스타일을 목표 지향적 리더십이라고 부를 수 있다. 경력이 성공을 보여주는 결과라면, 그 경력을 쌓는 과정이나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할 수 있다.”

목표 지향적 리더십과 그로 인한 인사의 실패를 이 대통령의 경력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3선 의원은 “대통령이 이번에 최고경영자(CEO)형 성과 제일주의 인사를 한 것”이라며 “기업에서 국민들 눈치를 볼 게 뭐 있냐? 일만 잘하고, 돈만 벌어오면 되는 거지”라고 말했다.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기업과 국가는 다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일찍이 책 에서 “정치권에 경영 마인드를 불어넣어 정치 선진화를 이루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자신도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인사파동도 그의 경영 마인드에서 빚어진 면도 있을 터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기업에선 이미지를 좌우하는 건 대표이사 외엔 없지만, 정치 영역에선 수석이나 장관 하나하나가 권력을 상징하는 얼굴”이라고 말했다. 정치적인 면을 무시하고 인사의 기능적인 면을 강조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국무위원 인사의 문제점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혼돈으로 봤다. “사적 영역에서 성공이 공익의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 공적 시민의식 없이 자기 재산을 늘리고 승진하고 이름을 날리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공적 헌신을 할 수 있겠냐?”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도 블로그에 올린 ‘이명박 대통령 취임을 바라보며’란 글에서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던 사람들이 권력에 줄대 자리를 차지하는 결코 그런 모습을 국민들은 보고 싶지 않다”며 인사의 문제점을 부드럽게 짚었다.

이번 인사에서 분명 도덕성이란 잣대는 후순위였다.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은 “능력과 경륜을 중시한 거 같은데 아마 도덕성 검증에서 조금 안이하게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왜 스스로 관대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을까? 앞서 밝힌 여러 면이 있겠지만, 대선 전과 대선 후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빚어지는 일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민은 대선에선 도덕성보다 이 후보의 능력을 높이 샀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이 후보를 도왔던 한나라당 원로 인사는 “대선 기간 중 국민이 대통령에게 요구했던 도덕적 기준과 당선 뒤 도덕적 기준은 전혀 다르다”며 “이를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면서,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도덕적 기준과 국민이 갖는 도덕적 기준에 큰 괴리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또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의 더욱 엄격해진 잣대가 작용한 측면도 있다. 참여연대가 2월26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국민 중 “능력이 뛰어나다면 도덕적 기준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9.5%에 불과했다. 역으로 국민이 도덕성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민심은 바로 등을 돌려버린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을 섬기겠다며 취임식 연단을 1m 낮췄다.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에 인사를 맞추지 못했다. 한귀영 실장은 “인사에서 이명박 정부의 비서민적인 계급적 특징이 드러나면서 국민의 정서를 크게 건드렸다”고 말했다. 인사의 결과가 외형적으로만 봐도 ‘1억달러 내각’ ‘1% 내각’ ‘강부자 내각’이란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말썽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면 임명했겠냐?”(한나라당 원로 인사)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과 청와대의 핵심 인사들은 ‘1% 인사’가 별반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은 당선자 대변인 시절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 부의 축적 과정에 위법이나 탈법, 편법을 동원한 게 드러났다. 또 국민이 평균 재산이 40억원에 이르는 특정 계급, 계층으로만 짜인 국무위원들을 보면서, 위화감을 넘어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은 “인사가 사회 통합이란 MB의 또 하나의 큰 화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권의 자만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530만 표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돼, ‘내가 옳다!’는 과도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거다. 그래서 “일만 잘하면 되지, 부자인 게 뭐가 문제야”란 자기 맹신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능력은 어떨까? 유우익 대통령 비서실장은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겉으로 드러난 자료만 보지 말고 세심히 능력과 자질을 봐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된 인사들을 포함해 국무위원들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인정하기란 어렵다. 물론 반대로 전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다. 능력이란 게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되레 “(문제가 된 인물들이) 능력은 있냐?”고 반문했다. 능력이란 단어는 자칫 실용이란 단어처럼 위험하게 쓰일 수 있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성과로 보여주겠다면서 능력을 앞세우는 건 중요한 다른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능력이 공직 후보자가 갖춰야 할 다른 덕목과 배타적·대립적인 항목으로 보는 청와대의 인식에도 문제가 있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씨는 칼럼에서 “도덕성도 능력에 포함된다”고 썼다. 박명림 교수는 “능력이야말로 도덕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발휘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를 불신한다. 그는 란 책에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우리 사회에서 유독 변화가 더딘 것이 정치 세계”라고 말했다. 그도 인정하지만, 선거 때 그를 도왔던 참모들도 “MB가 정치를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게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선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정치가 요구하는 수준도 따라가지 못한 대목이 있다. 고위 공직자에 대한 높은 도덕성 요구 등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시민사회나 정치권에서 쌓아온 ‘진전’에 맞추지 못한 것이다. 한나라당에선 청와대의 정무적·정치적 판단의 문제를 지적하며, 당을 통한 민심과 현장의 목소리를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당·정·청 협의 통로를 만들자고 주문했다.

한나라당은 이명박 정부의 너무 이른 실정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목숨이 걸린 공천 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의원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그사이 청와대의 오판을 제어할 브레이크가 약해지고 늦게 작동했다. 민심의 정권 견제론도 커졌다. 이명박 당선 효과를 100% 기대했던 수도권 의원들은 점점 약발이 떨어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린 정두언 의원이 2월26일 홈페이지에 글을 하나 올렸다. “우리 모두가 알 듯이 민심은 격변하는 것이며, 국민은 권력이 오만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등을 돌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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