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표 직후 1박2일 서울 시내를 돌며 ‘이명박 대통령’ 향한 희망과 불안을 듣다
▣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2월19일 오후 6시, 서울 청계천 광장은 한껏 들떠 있었다. 사옥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 출구조사 결과가 뜨자 사람들은 “이명박, 이명박”을 일제히 연호했다. 한나라당 서울시 청년위원회 명찰을 단 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풍선을 날랐다.
‘이명박 경제대통령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라는 구호가 적힌 깃발이 휘날렸다. 선거 로고송과 MB체조가 곁들여지고, 뽀빠이 이상용씨가 진행하고 현미·백일섭 등 연예인들이 출연한 축하 무대가 이어졌다. 마침 ‘청계천 빛의 축제 루체비스타’ 기간이라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밝힐 건 밝혀서 신뢰 얻었으면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 지지 모임인 JOY(재오사랑)의 회원 김경남(65·경기 용인시)씨는 개표방송이 나오는 대형 텔레비전 앞에서 연방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제 대한민국이 업그레이드된다”고 소리쳤다. 축하 공연을 한 아마추어 밴드 그루브타임의 이성준(28·직장인)씨는 “벌써부터 경제발전 기미가 보인다”며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이명박 장갑이요, 이명박 장갑.” ‘이명박 특수’를 노린 상인의 호객이 들렸다. 세 쌍의 친구 부부와 함께 청계천을 찾았다는 김맹호(52·서울 종암동)씨가 한 켤레에 5천원인 장갑을 얼른 하나 사서 꼈다. 그는 사출금형 중소기업의 사장이다. “올해가 최악이었습니다. 원유 가격 올라가지, 싼 중국 물건 들어오지, 우리 같은 중소기업이 살아날 방법이 없어요. 이명박씨는 사업을 해본 사람이니 사업하는 사람 마음을 제일 잘 알지 않겠어요.”
한쪽에서 ‘기아대책 모금운동’ 자원봉사를 하던 주영옥(37)씨도 “이명박을 찍었다”고 했다. 샐러리맨인 그는 휴일마다 자원봉사를 한다. “물가는 뛰는데 임금은 그대로여서 저 같은 월급쟁이는 살기가 너무 팍팍해요. 이명박씨는 지킬 말만 하고 실용적이라면서요. 한번 콱 믿고 찍었습니다.”
당선자에 대한 기대의 대부분은 ‘경제성장’이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의 혜택이 자신의 월급 통장과 가계 수입에도 보태질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그러나 모두가 기대에만 차 있는 건 아니었다.
청계천 광장에서 같은 날 열린 기아대책 공연을 기다리던 강아무개(24·서울 명일동)씨는 “믿을 수 없는 대통령이 집권하게 돼서 걱정된다”고 말했다. 교사 박아무개(32·경기 평택시)씨는 “BBK 동영상도 나오고 해서 득표율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더 올라가 솔직히 황당하다”며 “어쨌든 당선이 됐으니 잘해줬으면 좋겠고, 특검 수사에도 제대로 응해 밝힐 것은 밝히고 털 건 털어 국민의 ‘신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 당선자는 투표자의 절반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를 받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지 않은 나머지 절반과, 투표하지 않은 40% 가까운 국민의 마음속에도 ‘의혹’은 남아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만남의 광장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도 개표방송이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누가 됐어?’보다 ‘몇 프로야?’를 궁금해하며 지나갔다. 자영업자 채아무개(37)씨는 “처음부터 깔끔하게 시작해야지, 뭐 이래저래 구린 사람이 대통령을 하냐. 아 정말 기분 더럽다”고 말했다.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박아무개(42·서울 쌍문동)씨는 “당선이 곧 면죄부라고 손쉽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면서 “이회창씨는 지난번에 아들 군 문제 하나로도 낙마했는데 비리 종합선물세트인 사람이 멀쩡히 뽑힌 걸 보면, 내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밀어붙이기 선수인데…
이 당선자의 지나친 ‘추진력’을 걱정하는 이들도 많았다. 행사나 집회를 쫓아다니며 어묵·닭꼬치·번데기 등을 파는 노점상 이옥주(58·서울 아현동)씨는 이날은 청계천으로 나왔다. 그는 “대책은 없이 단속만 강화할까봐 걱정”이라며 “특히 이명박씨는 밀어붙이기 선수인데, 노점상도 싹 쓸어버리면 어떡하나”라고 말했다. ‘청년 백수’라는 이민우(26)씨는 “이명박씨가 취임하면 틀림없이 뭔가 큰 게 하나는 벌어질 것 같고, 그게 나라를 망칠 것 같기도 하다”며 “경제를 살리는 것도 좋지만 막 건설하면 돌이키기 힘드니 신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 허경영 후보를 찍었다는 그는 “결혼하면 1억원 주고, 노인들에게 매달 70만원 준다는 공약이 허황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는 더 허황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날 밤 서울역 대합실. 40여 명의 사람들이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분위기이다. 대구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김아무개(51·서울 도곡동)씨는 “원하던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현 정부가 집값 잡는다고 떠들었지만, 가령 은마아파트 재건축 규제하면 은마아파트만 잠잠하고 주변 아파트는 다 오르지 않았나. 그러다 나중에는 은마아파트까지 올랐다. 이명박씨는 집값 잡는다 어쩐다 설레발로 갈팡질팡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한 정책을 추진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친구를 기다리던 양경진(20·서울 목동)씨는 “지난 5년간 너무 혼란스러워서 강력한 리더십을 기대했다”면서 “도덕성 문제 때문에 투표 전에 갈등이 있었지만, 그나마 차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미술 전시회를 보고 귀가하는 길이라던 박아무개(36·경기 고양시)씨는 “최악의 선택을 한 건 아닌지, 바로 후회할 일을 한 건 아닌지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우리 집 7살짜리 꼬마가 ‘엄마, 이명박은 거짓말 많이 해서 한 표도 못 받으면 어떡해?’ 하고 말하던데 아이에게 부끄럽다. 거짓말쟁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기억을 갖고 살아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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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 있던 신아무개(79)씨는 “이명박은 바닥부터 해낸 사람”이라고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김밥 장사, 풀빵 장사 해서 야간고등학교에 들어갔지. 대학 때도 청소부를 하면서 학비 벌어 졸업했지, 평사원으로 현대건설에 입사해서 회장까지 올라갔으니 대단한 사람이지. 내가 회계사라서 많이 봤는데, 기업에서 성공한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아. 다만 바라는 건, 제발 보복정치 하지 말라는 거. 네 편 내 편 갈라서 싸움하는 거 보려고 뽑은 건 아니니까.”
이날 저녁 8시께 ‘축하행사’가 한창인 청계천 광장과 달리 인근 시장에서는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동대문 패션타운 유어스 상가 2층의 한 청바지 가게. 물건을 정리하던 한 여성에게 “누구를 뽑으셨어요?” 물으니 “누가 됐어요?”라고 되물었다. 개표 진행 상황을 알려주자 “마침 궁금해하던 참이었다”며 종업원 박아무개(24)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매일 저녁 8시부터 새벽 6시까지 일한다. 이날도 아침 퇴근 길에 투표를 하고 집에 가서 잤다. 낮에는 음악 공부를 하고 밤에는 옷을 판다는 박씨의 월급은 100만원 선. 그는 “저는 원래 성공, 경쟁, 자기개발 이런 단어를 좋아해요. ‘청년 백수’라고들 하는데 그건 자기가 놀아서 그렇지, 할 일은 차고 넘치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옆에서 함께 일하는 김아무개(29)씨는 “잘 시간도 모자라는데 투표는 무슨 투표야”라고 말했다.
밤 11시 동대문 지하상가. ‘거울’ 등 생활 소품을 파는 한 가게가 불을 밝히고 있다. 최아무개(58)씨는 “앞으로 너도나도 돈돈돈 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회창씨가 제일 준비된 사람 같았고, 이명박씨가 너무 독주하면 오만해질 것 같아서 이회창씨 찍었다. 솔직히 어부지리 아닌가. 현 정권에 대한 실망감으로 그냥 먹고 들어간 거다. 8살 된 외손녀가 송파 쪽에 사는데 아이 친가에서 그렇게 이명박을 좋아하는지, 애가 이명박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어이쿠 싶더라. 뉴타운, 재개발지 이런 데서는 이명박 지지율이 거의 압도적으로 나오지 않았나.”
다음날 오전 서울 동대문 풍물시장. 청계천 사업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서 장사하는 곳이다. 돈이 잘 돌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바람’은 이곳도 비켜가지 않았다. 중고 운동화를 파는 곽희삼(51)씨는 “하루에 2만~2만5천원 하는 운동화를 한 켤레도 못 파는 날이 부쩍 늘었다”면서 “이제 돈이나 골고루 팍팍 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포츠 용품점 사장인 김정훈(50)씨는 “우리 종업원들은 권영길씨를 찍은 모양이던데, 직원 월급도 줘야 하고 처자식도 있는 나로서는 도덕성보다 돈 잘 돌아가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당선자의 ‘자수성가 스토리’가 자신과 꼭 닮았다면서 “우리 어머니도 뻥튀기 장사를 했고 나도 어린 나이에 많이 고생했다”고 말했다.
너도나도 돈돈돈 할까봐 걱정
최인기 전국노점상연합회 사무국장은 “보수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데 정작 10년을 잃어버린 건 우리 서민들”이라며 “지난 10년에 대한 심판 측면에서 전노련 사람들 중에도 홧김에 이명박씨를 찍거나, 막연한 기대감으로 찍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풍물시장에서 국수를 말아 파는 신아무개(60)씨는 “이제는 노점상 중에도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 많다. 전에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잘살게 해준다면 믿었지만, 청계천 철거를 겪고 이렇게 밀려나면서 이젠 그런 말을 안 믿는다. 대통령이 우리를 어떻게 잘살게 해줘. 그저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지”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당선자 쪽이나 낙선자 쪽이나 ‘무서운 민심’이라고들 표현한다. 드라마틱한 현대사에서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을 많이 겪어온 우리 국민들은 ‘대단히 정치적’이며 정치판 돌아가는 걸 누구라도 ‘훤히 꿰고’ 있다.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1987년 이후로는 자신의 한 표로 ‘전략적인 선택’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 당선자를 만든 표는 어떤 성격의 표일까?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에게 표를 준 이들은 먹고사는 문제 이상의 ‘가치’에 따라 움직인 면이 컸다. 그러나 이번에 이명박 당선자를 찍었다고 밝힌 사람들은 이념이나 세대를 초월해 ‘경제’로 뭉뚱그려진, 집, 월급, 장사, 직장 등 구체적이고 실물적인 이유를 댔다.
아니다 싶으면 기다리지 않을 것
전날 개표방송이 한창일 때 을지로 입구에서 손녀딸(7)과 불빛 구경을 하던 70대의 안효복씨는 “이명박을 찍었지만 특검도 꼭 해야 한다고 본다”면서 “그거라도 있어야 세상 무서운 줄 알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BBK로 켕기는 게 있으니까 바짝 엎드렸지 안 그랬으면 얼마나 기세등등했겠냐”라며 “허물을 알고도 찍어줬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개인사업을 하는 임아무개(50·서울 삼성동)씨는 “기대심리가 경기회복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면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서울시장이나 건설부 장관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때론 이기적인, 실용적인 시민”이라고 밝힌 금융업 종사자 박아무개(46·서울 잠실동)씨는 “이명박 당선자의 능력보다는, 현 정권에 대한 실망과 규제 완화 등 경기 활성화 욕구가 더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본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다’ 싶으면 과거 노무현씨나 김대중씨를 참고 기다렸던 것과는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잘하겠지, 잘하겠지 하면서 참고 기다려줄 이유도 여유도 없다.” ‘실용 시민’ 박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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