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초기 그가 넘어야 할 3개의 봉우리…BBK 특검 결과와 연결돼 있는 총선, 만만치 않은 인사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12월19일 오후 한창 투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러 방송사의 출구조사 중간 집계 정보가 속속 들어왔다. 대체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율은 50%를 약간 넘어서는 것으로 나왔다.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어봤다. “이명박 후보의 득표력이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하다. 투표 전 ‘BBK 특검법’이 통과됐지만, 이 후보가 압도적으로 이기면 국민이 벌써 특검을 정치적으로 심판했다고 봐야 한다.” 윤 전 의원은 지난 8월 한나라당 경선 이후 여러 차례 이 후보를 만나 정치적 조언을 해온 원로다.
“특검 회피하려 하면 정치적 분란”
같은 시각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도 같은 이유로 이 후보의 득표율을 유심히 지켜봤다. “50%를 넘는다면 무력화는 아니겠지만 특검이 힘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다. 2004년 4·15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했고 그로 인해 헌법재판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판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후보가 50%의 득표율을 넘긴다는 건 국민이 특검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 당선자의 최종 득표율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48.7%로 집계됐다. 이틀 뒤 윤 전 의원에게 다시 물어봤다. “과반은 넘지 못했는데, 2위와의 격차가 530만 표나 된다. 국민이 특검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투표해 이 정도 결과가 나왔으면 (특검은) 정치적으로 끝난 거 아니냐.” 윤 전 의원이나 김 교수 둘 다 ‘이명박 특검법’과 대선 득표율을 연계한 정치적 해석을 내놨다.
과연 국민은 투표를 통해 특검의 수사 대상이 된 이 후보에게 벌써부터 ‘정치적 면죄부’를 준 걸까? 선거 이전의 여론조사(12월11일 한길리서치 조사)이긴 하지만 국민의 53.5%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BBK 관련 특검 수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필요 없다”는 응답은 39%로 낮게 나왔다. 이런 결과는 특검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나온 것이다. 국민의 판단은 윤 전 의원이나 김 교수의 정치적 해석과는 다르다는 걸 읽을 수 있다.
이긴 쪽은 당선 첫날부터 특검법을 거론했다. 전날 승리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을 텐데도 정치적 논란의 불씨를 먼저 지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을 놓고 특검이라든지 다시 청문회를 하는 것 비슷하게 후벼파는 일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저급 정치라고 생각한다”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특검법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박희태 상임고문은 “특검법은 당선자를 흠집내기 위한 선거용이었는데, 이미 선거가 끝났기 때문에 이제 정치적 효용은 끝났다”고 주장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아주 짧은 논평을 내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 당선자의 발목을 잡거나 괴롭히려는 생각은 없다”며 “그러나 국민의 마음에 남은 의심을 그대로 묻어둔다고 해서 당선자께 도움이 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열쇠를 쥔 청와대는 거부권을 행사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특검법은 예정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12월26일 국무회의에서 법안이 의결돼 발효된다고 할 때, 특별검사는 늦어도 2월20일 이전에 수사 결과를 발표하도록 돼 있다.
당선되자마자 수사 대상이 된 이명박 후보에게 특검법은 만만치 않은 정치적 시험대다. 안정적 국정운영의 기틀을 다지는 데 넘어야 할 첫 번째 큰 산인 셈이다. 최진 대통령 리더십 연구소장은 “이명박 당선자가 BBK 특검 과정에서 정말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고 의혹이 해소될 경우엔 국정운영의 탄력을 받을 수 있다”며 “그러나 마치 승리자의 모습으로 회피하려 들 경우엔 설령 높은 지지를 받았을지라도 제2, 제3의 정치적 분란이 야기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당선자는 당선 첫날 특검법을 통과시킨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특검을 받아서 특검에서 무혐의로 확실히 다시 나타나면 이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결백함을 강조했다.
희비가 교차하는 2008년 4월9일
선거를 불과 사흘 앞두고 ‘내가 BBK를 세웠다’는 이명박 후보의 육성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이 후보 자신도 ‘이명박 특검법’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피했으면 한다. ‘밀월(허니문) 기간’이란 말이 있다. 경쟁자였던 상대 정치 세력이나 언론 등이 새 정권 출범 이후 몇 개월 동안 우호적인 상황을 빗댄 말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초기 밀월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특검 때문이다. 한나라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 세력들은 특검을 통해 이명박 정권을 견제하려 들 것이다.
4월9일 실시되는 총선도 중요 고비다. 이 당선자한테 총선은 의회를 자신의 국정 철학과 비전이 담긴 법안과 정책을 집행하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가름하는 의미가 있기에,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되도 지나치지 않다. 이 당선자는 그래서 정권 출범 작업도 ‘(정권)인수위팀’ ‘(각료)조각팀’과 함께 ‘4월 총선팀’을 별도로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이란 큰 산과 총선이란 또 다른 큰 산은 사실 하나로 이어져 있다. 아직 ‘알 수 없는’ 특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4월9일 총선에서 정치 세력들의 희비가 교차될 게 뻔하다.
특검 수사 결과의 후폭풍을 지금 섣불리 예상하긴 어렵다. 다만 특검을 통해 이 당선자의 ‘혐의 없음’이 다시 한 번 입증되면, 특검을 추진한 세력은 탄핵 때처럼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은 “특검 수사 결과 이 당선자가 깨끗한 것으로 나오면, 지금 ‘범여권’은 공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한나라당의 과반 의석 확보도 가능하다.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라면 재선거 요구를 비롯해 ‘정치적 혼란’이 빚어질 수 있다. 물론 실체적 진실을 매듭짓지 않은 채 ‘정치적 해석’ 공방을 낳는 어정쩡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선전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지만, 이명박 당선자한테는 아픈 일이다. 안 그래도 후보 시절 커질 대로 커진 도덕적 흠집이 더 커질 수 있다. 이는 정권 초반기부터 리더십 행사에 큰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인사청문회 만만치 않을 듯
특검과 총선 중간에도 결코 녹록지 않은 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인사다. 총리와 각료의 임명 및 인사청문회 절차를 밟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도덕적 흠결이 없고 이명박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 인물을 찾아내, 의회 내 반대세력의 동의를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 의회 다수당은 대통합민주신당이다.
정권 초반기 석 달여의 짧은 시간 내에 세 봉우리를 오르려면 튼튼한 체력이 필요하다. 이명박 당선자가 얼마나 잘 오를지 아직 알 수 없다. 위기이기도 하지만 분명 기회이기도 하다. 위기를 잘 돌파한다면 집권 초반기 안정적 정국 운영을 위한 튼튼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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