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군사정권에 의해 ‘관제’로 출발한 농협…민주화 열기에 힘입어 ‘직선제 조합장’ 시대 열었으나…</font>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농협중앙회가 펴내고 있는 공식 책자에서 우리나라 농업협동조합의 역사는 ‘1961년 8월 종합농협 발족’으로 시작된다. 농협중앙회의 창립기념일이나, 농협 10년사·20년사 따위도 이를 기점으로 삼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농협의 출발점인 종합농협이 농업은행(농은)과 옛 농협의 통합으로 이뤄졌다고 명시돼 있는 대목이다. 농협중앙회가 농협의 뿌리로 삼고 있는 종합농협 이전에 뒤로 더 거슬러 올라가는 ‘농협’이 이미 있었다는 얘기다.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통합이냐 분리냐
권갑하 전 농협중앙회노조 정책홍보실장이 농협운동사를 담아 펴낸 책자 (1999)에는 “협동조합 운동은 해방 직후부터 이미 활기를 띠고 있었다”고 나와 있다. “‘영세한 농민을 협동조합으로 조직화하고, 이를 통해 농민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꾀하는 동시에 침체된 농촌 경제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공통된 여론이었다.”
김병태 건국대 명예교수(농정신문 고문)는 2000년에 쓴 를 통해 “미 군정하에서도 ‘금융조합’을 비롯한 일제하 반(反)농민적 기구는 이렇다 할 변화 없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일제는 농촌 수탈의 사령부로 금융조합을 창설했다. 조선총독부의 농촌·농민 지배의 경제적 거점 노릇을 해온 금융조합과 그 연합회가 8·15 후 미 군정하에서는 농민의 공출 양곡의 수집 보관과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양곡의 배급, 일제하의 정부 대행 역할을 하며 농민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해방 직후 농협법 제정안을 마련하게 되지만, 제헌의회에선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정치적 격변기였던데다 금융조합을 비롯한 기존 농업 단체의 처리 등 쟁점을 둘러싸고 숱한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의 뿌리인 종합농협 이전 옛 농협은 정부 수립 10년째인 1957년에야 탄생한다. 그해 2월 우리나라 최초의 농협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일반 및 특수 조합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듬해엔 옛 농협중앙회가 출범했다.
옛 농협은 지금의 농협과 많이 달랐다. 신용업무를 아우르지 않고 경제사업만 맡게 돼 있었다. 많은 논란 끝에 농촌협동조직 관련 입법화는 신용업무를 전담하는 ‘농업은행’과 경제사업을 담당하는 ‘농업협동조합’의 양대 축으로 가닥이 잡혔고, 농업은행법과 농협법이 별도 제정된 데 따른 것이었다.
권갑하 전 실장은 농협운동사 책자에서 “농업은행은 농업금융을 전담하는 정책금융기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농민 출자로 설립된 조합금융기관의 성격을 아울러 띠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게 된 반면, 농협은 (신용사업 관련 조항 전면 삭제로) 농업은행에 의해 거세를 당한 반신불수의 빈털터리로 태어났다”고 평가한다. 이는 일제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금융조합연합과 재무부 당국자들의 치밀한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고 권 전 실장은 분석했다.
4·19 직후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농협과 농은의 통합 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반신불수로 출발한 농협이 제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여론의 반영이었다. 현재 농협의 주요 개혁 과제로 꼽히는 ‘신(신용사업)·경(경제사업) 분리’ 주장과는 정반대 상황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신·경 분리 자체가 농협 개혁을 담보해주는 게 아니라 ‘분리의 내용’이 관건임을 보여준다.
주인이어야 할 농민들에겐 투표권뿐
농림부는 1960년 11월 농협에 신용업무(은행업)를 취급하도록 법령을 개정한다는 사실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또 민주당 정책위원회에서 농협·농업은행을 합병하기로 합의했다는 보도( 1961.1.8)가 나왔다. 농업은행을 개편해 ‘농협중앙금고’를 설치하고 중소기업 은행과 서민은행을 각각 설립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재무부와 농업은행 쪽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농협과 농은의 통합은 결국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이뤄지는데, 그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 현역 군인 출신인 임지순씨가 초대 농협중앙회장을 맡았던 사실이다. 농협과 농은의 통합은 당시 농협운동론자들의 바람이긴 했지만, 통합의 내용 탓에 “한국의 농협은 여기서부터 왜곡의 길로 들어섰다”고 권갑하 전 실장은 밝힌다. 통합 원칙 중의 ‘잠정적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참여와 상위기관으로서 능동적인 지도를 한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권 전 실장은 “이 조항은 농협을 ‘관제 농협’ ‘정부의 시녀’로 만든 직접적인 무기였고, 농민들로부터 농협이 더욱 멀어지게 되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인다. 농협을 정부의 하부 기관으로 전락시킨 문제의 조항은 ‘6월항쟁’ 2년 뒤인 1989년 12월 새 농협법 탄생 때까지 약30년 동안 정부가 농협을 지배·통제·간섭한 질긴 고리였다.
6월항쟁의 민주화 열기는 농협에도 불어닥쳐 ‘농협 임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대신 새 농협법에 따라 단위조합장을 농민조합원의 손으로 직접 뽑고, 중앙회장은 농민 대표인 조합장들의 총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이른바 ‘직선제 조합장’ 시대를 연 것이다. 또 중앙회 사업계획 및 예산의 정부 ‘승인제’는 ‘보고제’로 바뀌었다. 사업계획서 중 정책사업에 대해선 농림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한 단서가 붙긴 했어도 농협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민주화 뒤의 농협은 많은 변화를 겪었음에도 진정한 주인인 농민 쪽에서 볼 때 큰 의미를 띠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와 농협의 권력관계의 변화로 농협의 자율성이 크게 높아졌을 뿐 ‘농민을 위한’ ‘농민의’ 농협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주화 뒤의 개정법에서는 농협 임원의 선거직 공무원 겸직을 허용하고 임원 해임 청구권의 발의 정족수를 종전 ‘조합원 5분의 1 이상’에서 ‘3분의 1 이상’으로 강화했다. 당시 민주화의 열기를 농협 임직원이 가로챘다는 비판을 낳는 대목이다. 회원 조합에 대한 지방 행정기관의 감독권을 폐지하고 조합에 대한 주무부(농림부) 장관의 감독권을 중앙회장에게 위임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 흐름의 일환이었다. 농협의 주인이어야 할 농민들은 조합장 선거 때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고 나면 그뿐 실질적인 조합 운영에서는 외면당한다. ‘형식적·절차적인 민주주의’에 머물고 있는 한국 정치판의 유권자 처지와 같다.
중앙회는 농민 편인가, 임직원 편인가
민주화 뒤 정부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확보한 농협중앙회가 농민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은 민선 회장들이 줄줄이 엮인 비리사건이다. 초대 민선 회장인 한호선(1988년3월~1994년3월 재임)씨는 1994년 3월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검찰에 구속돼 사법처리됐다. 그 뒤를 이은 원철희(1994년3월~1999년3월) 회장 역시 재임 기간에 6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3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됐으며, 정대근 현 회장은 뇌물 수수 협의로 현재 구속 수감돼 있는 신세다. 민선 회장 3명이 모두 구속되는 불명예를 개인 차원의 비리로만 볼 수 있을까? 현재의 중앙회가 농민 조합원 쪽에서 활동하기보다는 중앙회 임직원의 처지에서 정부 및 정치권과 결탁하고 있다는 의심은 그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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