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정상회담의 핵심은 종전선언을 위한 3자 또는 4자 회담 규정…새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세 번째 기회</font>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고장난 시계’였다. 한반도 정세를 가리키는 시계는 반세기 이상 고장난 채였다. 이념과 체제로 동과 서로 갈려 싸우던 지구촌이 어리석은 전쟁을 멈춘 뒤에도, 한반도를 휘감은 냉전의 망령은 떠날 줄을 몰랐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일에 멈춰 선 시계는 그렇게 오랜 세월 요지부동이었다.
2000년 6월 남과 북의 정상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격정의 포옹을 하면서, 그 시계의 태엽이 감기기 시작했다. 초침과 분침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이윽고 시침이 원을 그렸다.
북쪽은 상당한 군사적 손실 감수
그로부터 7년여가 흐른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얼마나 따라잡았을까? 지난 10월2~4일 북녘 땅 평양에서 열린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은 그 시금석이었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나가기로 했다.”
10월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해 발표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하 2007 남북 정상선언) 제3항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조문을 꼼꼼히 분석해보자.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인식의 공유는 사실 새로울 게 없다. 이미 1991년 12월13일 체결된 남북 기본합의서 제5조에서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정전 협정을 준수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지난 1999~2000년 당시 김대중 정부와 미국 빌 클린턴 정부가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을 내세워 만들어낸 ‘한반도 냉전 종식을 위한 포괄적 포용정책’(페리 프로세스)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차이점은 새롭게 조성된 정세에서 찾을 수 있다. 한반도 주변의 긴장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북핵 위기가 6자회담의 진전과 함께 ‘불능화 단계’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기본합의서와 페리 프로세스 단계에 이어 평화체제로 가는 세 번째 기회를 만나게 된 게다. 북한의 대응도 적극적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여준 ‘결단’의 수준에 주목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한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와 한 대담에서 10월3일 오전 열린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한 말을 이렇게 옮겼다.
“…(경제)특구 해서 우리 득 본 것 하나도 없다. 개성공단 봐라. 4년 전에 삽 들고 시작했는데, 지금 시범단지밖에 없다. 우리 큰 득 본 것 없다. 남에서는 마치 개성이 개방·개혁의 성공 사례로 말하는데, 우리는 수용 못한다. 특구 하는 데 개방·개혁 정치 선전하려면 우리는 못한다….”
실제로 지난 7년여 진행된 경협사업을 위해 북쪽은 상당한 수준의 군사적 손실을 감수했다. 금강산관광을 위해 동해 전략항구인 장전항을 내줬고, 개성공업지구 사업을 위해 서부전선 전력을 대거 후방에 배치시켰다. 남쪽으로선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가시적 성과를 봤지만, 북쪽으로선 지지부진한 경협사업의 진척 속도와 파급효과에 일정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거론된 ‘해주공단’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이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북-미에 남북 추가한 것”
하지만 회담 결과는 이런 예상을 쉽게 무너뜨렸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합의함으로써 북한은 또 한 차례 군사적 손실을 받아안았다. 해주항은 북한 서해 해군 전력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정상선언 5항이 나열하고 있는 철도·도로 복원을 포함한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대규모 경협 프로젝트가 다시 한 번 ‘설득력’을 발휘했을 터다.
“북한이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원이 없고 장비가 부족하니, 병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노후 장비 현대화와 전력 증강을 거의 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 집약적인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 역시 경제적이다. 수많은 성인 남성을 고용할 수 있는 일자리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들을 군대에 묶어놓고 있다는 얘기다.” 함택영 북한대학원대학교 부총장은 “이들을 생산현장에 투입하고 일정 수준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게만 된다면, 북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며 “북한 인프라 재건·복구 사업에는 대규모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북한 인프라 구축 사업은 장기적으로 볼 때 병력 감축 등 군비 감축과도 연계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북한이 평화체제를 만들어가는 당사자로서 남한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의 이런 지적대로, 이번 정상선언은 북-미 관계가 주도해가던 평화체제 논의에 남북관계라는 병렬적인 트랙을 하나 더 마련해낸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종전선언은 말 그대로 전쟁이 끝났음을 밝히는 것이고, 평화협정은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정상선언에서 ‘한반도에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남북이 ‘호스트’로서 주도적으로 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북한이 정상회담을 통해 남한을 한반도 평화체제의 핵심 당사자로 공식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서슴없이 정상선언 ‘4항’을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으로 꼽는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볼 때,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규정한 제4항”라고 강조했다. 조 실장은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을 하던 도중 김계관 외무성 부상(6자회담 북쪽 수석대표)을 불러들여 회담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함께 받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평화체제 논의가 북핵 폐기 과정에 긴밀히 연결돼 있는 탓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 대 행동’의 단계로
지난 9월30일 중국 베이징에서 막을 내린 6자회담에서 참가국들은 연내에 북핵 불능화 조치를 완료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발맞춰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고, 적성국교역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까지 일본이 최종 서명을 하지 않아, 합의문 공식 발표가 미뤄지고 있었다.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긴밀히 연계돼 있다. 일본이 끝내 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자칫 핵시설 폐쇄 등 초기 단계 이행을 가로막았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처럼 불능화 단계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10월3일 오전 일본 정부가 ‘9·30 합의’에 최종 서명을 했다는 점이, 오후 정상회담에 탄력을 더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조 실장의 분석이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정상선언이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이란 잠정 단계를 거쳐 평화체제로 가는 ‘2단계 평화 프로세스’를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이는 최종 핵 포기로 가는 과정에서 중간 경유지를 두고 비핵화 진척 속도에 맞춰 적절한 ‘보상’을 함으로써, 그 과정에 속도와 신뢰도를 더하기 위한 조치다. 미국이 북한과 마찬가지로 ‘깡패국가’로 취급했던 리비아의 비핵화를 이끌어낸 과정에서 채택한 방식이 이와 유사하다. 조 실장은 “리비아 정부는 비핵화를 선언한 지 6개월 만인 지난 2004년 6월 미국과 수교에 합의했고, 이어 양국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했다”며 “비핵화가 완전히 이뤄져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그로부터 2년여 뒤인 지난해 5월 말”이라고 지적했다. 비핵화 과정도 그렇지만 관계 정상화가 수교로 완성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다.
비핵화 과정은 ‘행동’인 반면, 관계 정상화나 수교는 ‘말’에 불과하다. 북핵 문제는 2·13 베이징 합의에 따라 ‘행동 대 행동’의 단계로 들어섰으므로, 수교 과정 역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조 실장은 “북한이 비핵화 과정을 통해 핵무기 폐기까지 나아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며 “그 사이에 잠정 조치로 불능화 단계가 끝날 무렵 연락사무소나 상주 대표부 개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연합의 기본 꼴은 갖췄다
현 시점에서 한반도 평화 문제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평화체제와 비핵화, 그리고 군사적 신뢰 구축 문제다.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 속에서 2007 남북 정상회담은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냈다. 북-미 관계가 주도하고 남북관계는 이를 뒤쫓기만 하던 기존 판도에 변화의 가능성을 불어넣었다. 정상선언은 지나치게 6자회담에 편중돼 있는 평화 프로세스를 남북이 주도해 이끌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에 남북관계가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틀거리에도 합의했다. 김창수 민주평통 전문위원의 말이다.
“남북 두 정상은 앞으로 ‘수시’로 만나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는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뜻한다. 정상선언 2항은 국회 회담을 언급하고 있다. 또 남북회담의 신경망이던 장관급 회담은 총리급 회담으로 격상됐고, 차관급이 위원장이던 경제협력추진위는 부총리급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협력공동위원회 체제로 바뀌었다. 정상회의·국가평의회·각료회담이란 국가연합의 기본 꼴은 갖춰놓은 셈이다. 아주 실용적으로 남북관계의 성격을 한 단게 높이고, 이를 제도화·정례화해낸 게다.”
서보혁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은 이를 두고,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을 인정한 6·15 공동선언 제2항의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번 정상선언으로 연방·연합제의 ‘낮은 단계’가 꼴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관건은 후속 조처다. 합의한 내용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냉전의 반세기를 딛고 평화의 새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세 번째 기회마저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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