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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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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미래] 시린 역사마저 보존하라

등록 2007-09-21 00:00 수정 2020-05-03 04:25

비무장지대는 무장 해제 될 것인가

DMZ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조사와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경의선 열차가 개성 시내를 지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font color="darkblue"> DMZ와 민통선 관련 조사도 지지부신한 상태…공유화와 지속적 관리를 위한 제도 마련을</font>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오염 없는 피부, 이슬 같아요.”

지난 1991년 10월1일 방송을 타기 시작해 인기를 모은 화장품 업체 아모레의 ‘미로(美露) 화장품’의 광고문구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게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오현경씨의 청초한 모습에,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촬영’했다는 자막과 함께 등장한 것은 이슬을 머금은 채 화사하게 반짝이는 보랏빛 금강초롱이었다. “오염 없는 순수세계에서만 피어난다”는 내레이션은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천혜의 원시림’, 비무장지대에 대한 세간의 통념과 환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비무장지대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 손이 안 탄곳? 원시림?

“비무장지대를 흔히 사람들의 손이 안 탄 곳, 천혜의 원시림으로 보전된 곳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인간의 손길을 많이 탄 곳이 바로 비무장지대다.”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산림환경부장의 말이다. “밤이면 남과 북의 군인들이 매복·수색 작전을 벌인다. 풀이나 나무가 자라 상대편 초소가 보이지 않으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시계청소’란 이름으로 산불을 놓는다. 군인들이 먹고 남은 ‘짬밥’을 먹은 야생 멧돼지는 비만에 걸릴 정도다. 원시림 얘기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산림은 20년생 미만의 어린 소나무와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숲에 있는 나무의 양을 나타내는 임목축적만 봐도 비무장지대는 1ha당 약 27㎥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평균은 1ha당 70~80㎥에 이른다. 산림환경만 놓고 보면 보존이 아니라 오히려 복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그럼 ‘비무장지대의 생태적 가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생태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이는 ‘산불’과 ‘지뢰’라는 두 요인이 비무장지대의 역설적 현실을 가장 극명히 설명해준다. 신 부장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산불을 자주 내다 보니 산림 대신 초지가 많이 발달했다. 멀리서 보면 융단처럼 펼쳐져 있지만, 가까이 가보면 사람 키보다 높은 풀이 숲을 이루고 있다. 서식지의 이질성이 클수록 생물 다양성에 좋은 법이다. 이런 식생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비무장지대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가치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게다.”

생태적으로 비무장지대는 남방계 생물과 북방계 생물이 교류하는 자리에 있다. 지상은 물론 물속까지 철조망을 촘촘하게 쳐놓고 내리 반세기 이상을 살아왔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가로질러 철조망을 쳐놓고, 동과 서를 이어가며 군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섰다. 게다가 주기적인 군사활동은 생태에 적절한 수준의 교란을 일으켜 비무장지대 전역에 자연상태에선 볼 수 없는 ‘방해식생’을 만들어냈다. 지구상에서 가장 요새화한 한반도의 중허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생태 실험을 반세기 이상 지속해온 셈이다. 비무장지대 보전 대책은 이런 특징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일부 생태전문가들이 “통일이 된 뒤 비무장지대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철조망을 둘러친 상태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자칫 비무장지대 특유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람의 손길이 완전 차단될 경우, 비무장지대의 생태계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자연천이를 이뤄갈 것이란 얘기다. 비무장지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생물 다양성과 특이성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비무장지대를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떻게 가꿔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생태계 전반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바뀌어갈 것인지까지를 염두에 두고 고민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인 게다.

비무장지대 도처에 깔려 있어 그 수를 헤아릴 길조차 없는 ‘지뢰’는 또 다른 역설의 주인공이다. 지뢰의 치명적인 살상력은 오히려 생태계를 지켜온 원동력이 됐다. 휴전선에 평화가 찾아온 뒤에도, 지뢰는 계속해서 인간의 발길을 막아가며 비무장지대의 생태계를 지켜줄 것이다. 섣불리 지뢰 제거 작업을 벌일 경우, 자칫 막대한 생태적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한 생태전문가는 “비무장지대에 매설된 지뢰까지도 비무장지대의 역사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뢰를 없애면 어떻게 될까

비무장지대가 ‘뼈대’라면 북방한계선 이남과 북한 땅 남방한계 쪽 이북 지역에 자리한 민통선 지역은 ‘살점’에 해당한다. 뼈와 살이 모여 몸을 이루듯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은 한 몸일 수밖에 없는 게다. 김귀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교수(환경생태계획)가 “비무장지대만 놓고 보전대책을 생각하는 것은 생태계를 종합적으로 보지 못한 때문”이라며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비무장지대 남북 4km만 잘라낼 게 아니라,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을 포함해 야생 동식물 서식지를 하나의 생태 단위로 묶어 보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철원군으로, 연천군으로 갈라 구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야생 동식물의 삶에 인간이 만들어낸 행정구역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어리석다. 생태계의 연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준환 부장은 “우리나라는 생물 지역이 거의 대대로 이어져온 인문학적인 구역과 비슷하다”며 “영남과 호남이 백두대간으로 구분되듯이,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옛 구획을 회복한다면 인간의 삶과 자연을 동시에 보전해나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비무장지대 생태보전 과정은 한반도 역사의 기억을 더듬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반도 전역을 휘감은 변화의 역동은 비무장지대(DMZ)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반세기 이어져온 정전체제는 북핵 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아가면서 평화체제를 향해 성큼성큼 발길을 옮기고 있다. 물론 정전체제의 종식이 곧 평화체제의 도래를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전체제에 균열이 가해질수록 비무장지대를 규율해온 군사정전위원회 질서도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다. 평화는 예비하지 않은 때 ‘도적같이’ 찾아온다는 교훈은 이미 독일의 경험이 보여준 바 있다. 우리 정부는 얼마나 준비가 돼 있을까?

환경부는 지난 2005년 8월 비무장지대(907㎢)는 물론 민통선 이북지역(1370㎢)과 접경지역(6216㎢)을 포괄하는 ‘비무장지대 일원 생태계 보전대책’을 내놨다. 뼈대는 이렇다. 우선 통일 이전엔 비무장지대 남쪽 지역 생태계에 대한 주기적 조사를 하고, 표본을 모아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진행한다. 이어 통일이 될 경우 자연환경보전법 제2조에 근거해 비무장지대 일대를 2년간 ‘자연유보 지역’으로 지정하고, 이후 전 지역을 생태·경관보전 지역으로 지정하겠다는 게다. 하지만 계획은 초기 단계부터 어그러졌다. 김태식 환경부 자원정책과 사무관의 말이다.

토지소유권 문제 불거지면 흔들려

“비무장지대 내부 조사는 2006년부터 지속적으로 국방부와 유엔사가 협의를 거쳐 조사계획도 세우고 조사팀까지 구성했다. 하지만 유엔사 쪽에서 안전을 이유로 승인을 내주지 않아 지금껏 기다리고만 있다.” 김 사무관은 “장기적으로 비무장지대를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등재시키는 게 정부의 목표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도 비무장지대 생태 조사가 필수적”이라며 “우리 쪽 노력만으로는 비무장지대 내부 조사가 어렵다고 판단해 다가오는 남북 정상회담 의제로 제안 신청을 해놓은 상태”라고 덧붙였다.

민통선 지역은 어떨까? 김 사무관은 “지난해 파주·연천 지역을 시작으로 비무장지대와 맞닿아 있는 민통선 지역에 대한 생태 조사를 5년 계획으로 벌이고 있다”며 “지난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강하구 습지보호지구도 지정했으며, 올해 들어선 강화·김포 지역에서도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엔 환경·시민단체와 학계, 국회와 국방부·행자부·문화재청 등 관련 부처, 그리고 경기도·강원도 등 지자체가 모여 비무장지대 일원의 생태 보전을 위한 민관공동협의회를 구성했다. 평화·생태공원과 관광사업 추진 등 지자체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민통선과 접경지역 보전·개발 계획이 ‘보전’보다는 ‘개발’에 가깝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비무장지대 보전을 위한 정부 차원의 ‘시스템’이 없다 보니, 지자체의 ‘의욕’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무장지대는 그렇다 쳐도 정부의 통제권이 미치는 지역인 민통선 지역도 토지소유권과 이용 현황조차 완벽히 파악이 안 된 상황이다. 보전대책은 비무장지대 내부 토지 현황 파악과 남방한계선 경계 측정 등 토지정보와 지적복구를 행자부 주관업무로 구분해뒀다. 하지만 대책이 나온 지 2년여가 지났음에도 별다른 진척은 없는 상태다. “지적측량은 예산도 없고, 남방한계선의 정확한 위치 정보조차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게 행자부 쪽의 설명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현재로선 비무장지대 내부의 토지 현황 파악은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민통선 지역은 아예 보전대책상 토지 현황 파악 계획조차 없는 상태다.

비무장지대 일원의 토지소유권 문제가 불거질 경우, 그 보전대책은 뿌리부터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토지소유권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국민신탁 모델이 유력하게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재경 자연환경국민신탁 대표이사는 “비무장지대 일대는 소유권이 50년 이상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가 많다”며 “국유지로 등재된 지역은 그대로 남기고 사유지는 국민신탁을 통해 공영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국민신탁은 그야말로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 자산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전 대표이사는 국민신탁화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린벨트라든가 국립공원 같은 경우를 보자. 국공유지 안에 사유지가 군데군데 놓여 있는데, 재산권을 침해당한 사유지 소유주의 민원으로 개발 압력이 극심한 상황”이라며 “민통선 지역까지 포함해 비무장지대 일원을 국유지와 국민신탁지로 나눠 공유화하는 작업은 생태계 보전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평화와 소통의 역설

장기적인 목표만 느슨하게 세워둔 상태다. 그마저 진척이 더디다. 주무부처인 환경부에 비무장지대만을 전담하는 공무원이 1명도 없는 게 현실이다. 김귀곤 교수는 “지금까지는 시민·환경단체나 학자·전문가 집단의 주장으로 습지 등 일부 지역이 보전지역으로 지정됐지만, 비무장지대를 특정한 입법은 전무한 실정”이라며 “비무장지대의 지속 가능한 관리를 위한 법·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적 과오는 시간과 자연이 치유해줬다. 전쟁의 아픔이 만들어낸 비무장지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생태의 보고로 다가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그곳의 역사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반세기 반목과 갈등의 파괴적 역사도 거부해선 안 된다. 서로의 체제를 비웃던 격렬한 구호는 모두 사라졌지만, 어쩌면 그 섣부른 외침조차 오롯이 보존해야 할 유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철조망과 군인에 둘러싸여 반백년 거대한 생태 실험장 구실을 했던 비무장지대에선 어차피 모든 게 역설로 통하기 때문이다. 분열과 반목의 역설이 평화와 소통의 역설로 거듭나기 위해선 지금 준비가 필요하다.

<font color="#00847C">〈DMZ 248km 보고서〉제3부-미래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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