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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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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생태] 이 역동적인 온대림을 보았는가

등록 2007-09-21 00:00 수정 2020-05-03 04:25

비무장지대 248Km, 역사가 빚어놓은 자연생태계…서에서 동으로, 습지에서 숲으로

▣ 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녹색사회국장

비무장지대 여행의 출발은 물에서 시작된다. 바다처럼 드넓은 임진강 하류에서 비무장지대의 철책은 빈틈없이 견고한 모습으로 동쪽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파주 장단반도에서 철책선 너머 비무장지대 전면에는 사천강의 습지가 드넓고 아득하다. 경의선과 도라산 전망대까지, 야트막한 언덕을 휘돌아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예외 없이 너른 습지를 거느리고 있다.

국내 제일의 종다양성

통일대교를 지나 민간인통제선(민통선) 북방 지역의 평평한 땅은 이미 농지로 개간된 지 오래다. 이런 흐름은 파주 장단에서, 군내면·진서면·진동면을 거쳐 연천 장남면·백학면까지 이어진다. 주로 논이 많고, 콩밭과 인삼밭도 있다. 야트막한 야산으로 내리 달리던 비무장지대는 사천강에서 드넓은 평원과 습지를 펼쳐낸다. 사천강을 중심으로 동쪽 언덕 주변의 철책에서 바라보면 옛 연백평야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전쟁 전 이 평야에 기대 파주, 연천, 개성 사람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천강 본류에서 보면, 강물의 너른 품이 얼마나 비옥하고 넉넉할지 알 수 있다.

사천강을 지나면서, 철조망 앞에는 제법 틀을 갖춘 산지 지형이 나타난다. 그 시작점은 고왕산(355m)이다. 지형은 산지이지만, 숲은 빈약하다. 나무보다 흔한 것은 칡넝쿨 군락이다. 그나마 있는 숲은 참나뭇과의 신갈보다는 굴참, 상수리, 떡갈이 흔하고 일부 아까시도 있다. 숲이 초라한 것은 해마다 봄이 되면 발생하는 산불 때문이다. 매년 불나고, 회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숲은 초지부터 키 큰 나무까지 다양하게 어우러진 모습을 띠게 되었다.

서쪽의 사천강부터 파주, 연천, 철원 김화를 거쳐 원동면의 북한강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게 울창한 숲이 지역 전체를 뒤덮고 있는 곳은 없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비무장지대 생태계에 대해 “별게 없다“라거나 “허구의 신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해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여러 관점에서 나눠봐야 한다. 숲은 산불 피해를 치유하며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다. 겉보기에는 빈약하지만, 어느 생태계보다 역동적이다. 생물 다양성이 어느 지역보다 높다. 자연생태계의 정점인 포유동물과 조류만 봐도 국내 제일의 종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산불의 흔적이 이어진 구릉의 흐름 속에서 큰 물줄기를 만나게 되니, 분단의 한과 정서가 집약된 임진강이다. 비무장지대, 민통선과 관련된 역사와 문화도 북한강 쪽보다 훨씬 풍부하다. 북한강이 원형의 하천이라면 임진강은 주민들과 함께 흘러온 희로애락의 하천이다.

임진강을 건너서면 산세가 좀더 뚜렷해진다. 천덕산 일대까지 제법 옴팡진 산세를 빚어놓았다. 산의 구석마다 너른 골이 형성되고, 마을과 농토의 흔적에는 세월의 나이테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곳은 육군 5사단 열쇠전망대에서 조망할 수 있는 복개평야다. 역곡천의 지류 또는 상류에 해당하는 곳으로 연천 신서면 일대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비무장지대 서쪽 끝 사천강에서 철원 남대천을 아우르는 지역은 그저 평범한 농지였고, 마을이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논과 밭과 마을은 버려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숲과 초지와 습지로 변해갔다. 특히 논농사를 지었던 곳은 습지로 남은 곳이 많다. 경관적으로 매우 이채로운 곳이다. 지구상에서 농지의 흔적이 이렇게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곳은 비무장지대뿐이다. 버려진 논두렁·밭두렁마다 작은 생명들이 들끓고 있고, 국제 사회가 주목하는 동북아 특산종인 고라니를 비롯해 겨울이면 각종 철새가 몰려든다. 텃새와 양서·파충류와 곤충도 많다.

근대 문화와 역사의 흔적

역곡천을 기준으로 경기도가 끝나고, 강원도가 시작된다. 철원평야가 시작되는 철원군 대마리다. 철원은 가히 비무장지대 도시다. 버려진 도시의 심장부는 민통선 이북인 철원평야 농경지에 드넓게 자리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대마리부터 김화읍 유곡리까지, 비무장지대는 대부분 평원과 평야로 형성돼 있다. 이곳은 민통선 최대의 곡창지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새 도래지다(지도 참조).

철원을 가르는 철책선 앞으로는 평강고원이 펼쳐진다. 철원 판교리·내포리 일대에서 비무장지대 이북의 서방산(717m) 자락인 제2땅굴 일대까지, 아스라이 펼쳐진 지평선의 끝이 평강고원이다. 고원을 만든 것은 추가령 구조곡을 가득 메운 용암이다. 용암이 식어 형성된 대지가 일차로 평강고원을, 그 아래쪽으로 철원평야를 만들었다. 용암 지역이지만 논농사가 가능한 것은 두꺼운 퇴적층과 풍화층이 2~4m나 쌓여 있기 때문이다. 천년 도읍을 꿈꿨던 궁예의 도성터는 철의 삼각지 전망대 저편 비무장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철원에는 전쟁과 함께 사라진 도시가 있다. 김화군이다. 지금은 철원군 김화읍인데 한탄강부터 김화 남대천까지 비무장지대 임진강 수계의 동쪽 끝을 형성하고 있다. 과거 철원에서 금강산을 잇는 협궤열차가 다녔던 철길의 노반, 교각, 전선주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에서 시간은 문득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지구상 온대림 지역 가운데 인간의 생활이 배제된 채 248km가 벨트를 이룬 곳은 비무장지대뿐이다. 거기에 근대 문화와 역사의 흔적이 폐허로 남아 있다. 김화의 철책선에서 그런 경관이 한탄강에서 성재산을 지나 오성산 자락~계웅산~남대천~천불산~삼천봉까지 펼쳐진다. 특히 계웅산(604m)이 인상적이다. 발 아래 김화 남대천을 비롯해 용양보 습지까지 펼쳐지며 동쪽으로 켜켜이 산줄기가 에워싸듯 비무장지대를 기다리고 있다.

김화 남대천 일대의 너른 평원을 지나면 임진강 유역권도 끝난다. 그 장벽이자 분수령이 한북정맥이다. 적근산에서 삼천봉으로 연결되어 북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은 금강산 이북의 백두대간에서 갈래쳐 나온 산줄기와 비무장지대 언저리에서 만난다. 두 산맥이 조우하는 곳이 철책선에 걸쳐 있는 삼천봉과 적근산이다.

한북정맥은 임진강 유역과 북한강 유역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이는 지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임진강 수계의 크고 작은 물길들은 여러 습지를 형성하며 서진해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북한강 쪽에서는 산이 많고 골이 깊어 습지가 적어지거나 미약하다. 다만 골이 깊기 때문에 산지에 걸맞은 생명의 질서들이 펼쳐진다.

한북정맥 산줄기에서 으뜸인 곳은 적근산이다. 과거 대성산이 민통선 지역으로 묶여 있을 때만 해도, 비무장지대의 생태조사를 나오면 적근산보다 대성산 쪽에 주목했다. 아직도 적근산에 대한 조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군 전술도로 주변에서는 희귀종인 솔나리와 왜솜다리를 비롯한 한국 특산종과 희귀식물 군락이 넓게 펼쳐져 있다. 반달가슴곰과 사향노루 등의 서식도 확인된다(지도 참조).

동부 산림, 맵고 짠 산악 지형

적근산 동쪽으로는 주파령을 넘어 흰바우산(백암산·1197m)이 우뚝하다. 주파령 북쪽의 철원군 원남면을 거쳐 비무장지대는 비로소 동부 산림지역으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는 ‘맵고 짠’ 산악 지형이 그대로 나타난다. 골은 깊고 산비탈은 가팔라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지만 숲의 친구들에게는 편안한 쉼터다. 산불이 발생해도 깊은 골이 가로막고, 활엽수림이 버티고 있어 크게 번지지 않는다. 숲은 울창하고 거칠다. 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내들은 북한강 지류인 금성천으로 흘러든다.

육군 칠성부대의 관할 지역인 이곳은 군인들에게도 험난한 지형으로 유명하다. 병사들은 철책 근무 중 수시로 산양·사향노루·삵·담비 등과 마주친다. 1990년대 중반에는 백암산 남쪽 자락에서 호랑이 출몰이 언급돼 방송사들이 들락거리기도 했다. 당시 환경부의 비공개 최종보고서를 보면 그 소동을 “표범으로 추정되는 중대형 고양잇과 동물로 추정한다”고 정리하고 있다, 백암산 동쪽으로 북한강이 흘러내린다.

북한강은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물길 가운데 가장 큰 하천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물길을 따라 내금강으로 이어진 신작로가 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반도 아래쪽에 갇힌 사람들에게 북한강의 시작점은 파로호였다.

북한강 동쪽 건너편의 산림은 군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동부’라는 표현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곳이다. 이 지역의 산림을 표현하는 적합한 말은 ‘울창하다’는 것뿐이다. 고성의 ‘큰 까지봉’ 동북쪽까지 숲은 동일한 모습을 이루며 펼쳐진다. 숲은 온갖 야생동물들의 천국이다. 일부 산불 피해가 있기도 했지만, 숲은 40년 이상 된 온대림의 전형을 보여준다.

북한강을 건너면서 비무장지대는 해발 1천m를 넘는 고산 지형을 펼치기 시작한다. 양구 건솔리~수입천~사태천~가칠봉~을지전망대까지 그득한 숲의 모습이다. 이 일대에서는 활엽수림뿐만 아니라 금강소나무와 어우러진 혼효림도 곳곳에 등장한다. 철책선을 따라 곳곳에 희귀식물 군락도 이어진다(지도 참조).

양구를 정점으로 인제의 백두대간까지 펼쳐진 비무장지대는 산림생태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을지전망대를 지나면 백두대간을 가까이 바라보며 해발 500m 가까이 내려간다. 거기에 습지가 에워싸고 있는 인북천이 북에서 흘러내린다. 내금강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다. 인제 서화면의 인북천은 비무장지대 안에서 하천 습지가 폭넓게 형성된 곳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인내천을 따라 오르는 옛길도 조용히 쉬고 있다. 인제에서 내금강으로 연결된 길이다.

인북천을 지나면서 비무장지대는 드디어 백두대간과 만난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장승리와 고성군 수동면 신탄리의 경계 지역이다. 정확히 좌표를 잡아보면 백두대간의 주능선과 비무장지대의 군사분계선이 교차하는 삼재령 일대다. 인제 인북천과 고성 남강의 경계가 되는 고개로 전쟁 이전에는 영서 내륙 산골짜기였던 인제와 영동 해안 지역인 고성을 오가던 길목이었다. 옛 사람들은 이 지역을 ‘송이달’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두대간은 진부령부터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민통선에 포함된 백두대간의 상징인 향로봉에서 고성재 동북쪽으로 남강 수계에 해당하는 골짜기 전체가 향로봉~고진공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남강은 비무장지대의 동쪽 끝을 상징하는 물줄기다. 남강은 연어, 은어 등 온갖 물고기와 수달을 비롯한 동물들의 고향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사람들의 손발로 인한 때를 묻히지 않고 청정함 그대로의 물줄기를 유지하고 있다. 남강은 10km 이상 동북쪽으로 비무장지대와 어깨를 마주하며 흐른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과 북의 긴장 한가운데를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는 남강이 유일하다. 남강 상류인 사천천과 고진동 계곡은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 일대의 능선과 물줄기와 철책선은 깊은 협곡을 형성하면서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이 일대가 비무장지대의 가장 대표적인 산양의 활동 무대다.

155마일, 248km 비무장지대는 역사가 빚어놓은 자연생태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이 접근하지 못해 온갖 생명이 역동하고 습지와 숲이 어우러진 자연이 펼쳐진다. 철책선 따라 이어진 비무장지대는 냉전이 빚은 역사의 유산이자, 지구상에 유례없는 생태계의 특이함을 간직한 곳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전쟁의 상처와 이를 보듬는 자연의 무심함이 살아 있는 이곳을 원형 그대로 살려 후세에 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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