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국 대학교수가 ‘한국전쟁’ 문서를 편집하며 미국 중심주의와 벌인 게릴라 전투
위키백과 편집자들 사이에는 ‘편집 취소’ 작업을 통한 ‘편집 다툼’이 수시로 벌어진다. 주로 위키백과의 ‘중립적 시각’과 관련한 부분이다. 다수의 힘으로 편집 다툼이 미국 중심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험한 데니스 하트 교수의 기고를 싣는다. 기고문은 하트 교수가 우리말로 보내왔다. 편집자
▣ 데니스 하트 미국 켄트주립대 부교수·정치학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민주주의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의 반사적으로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있기에 만인이 근본적으로 평등하며, 그렇기에 누구의 의견이나 똑같이 가치롭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말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거의 동네 바보, 세계의 바보 되다
첫째, 어떤 나름의 입장과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름대로 입장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남들처럼 얼굴에 코가 하나 붙어 있다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견과 코를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의견이나 코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게 생겼으며 일부는 아주 추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둘째, 어떤 의견을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한다고 해서 그 의견의 질이 높아진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 비슷하게 무식한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고 스스로의 지식 수준에 만족해한다.
대중 민주주의가 지식 형성의 좋은 기반이라는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나름대로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을 주기에 평범한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다.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이런 믿음은 더욱 멋져 보인다. 개인 홈피, 블로그, 싸이월드(미국에서는 페이스북(Facebook)) 등의 공간이 넘쳐나면서 이제는 누구나 아무 때나 모든 사안에 대해 어떤 의견이라도 개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군과 민주주의양의 결혼생활을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장소 중 하나는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백과(www.wikipedia.org)이다. 위키백과는 그 존재를 정당화하고 위키 ‘편집자’들의 담론 모양새를 결정하는 두 가지 기본 전제를 갖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들어줄 가치가 있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은 객관적일 수 있고 또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저기 어드메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노력으로 ‘찾아가는’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할수록 더 좋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위키백과의 세계에서 지식은 시공을 초월하며, 계급도 민족도 성별도 없다. 위키백과의 문서들은 전문지식이 있는지나 교육 수준, 지능지수의 고저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편집에 참여할 수 있으니 그보다 더 민주주의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위키백과는 스스로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지식의 가치를 알리는 모범이며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공짜 백과사전”이라고 자화자찬하기를 즐겨한다.
의도야 좋았지만 불행히도 위키백과는 지식의 민주주의가 반드시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됐으며, 발전한 기술을 매개로 과거의 동네 바보들을 세계 바보들로 바꾸고 있다. 지식을 늘리고 편협한 신념을 깨뜨리는 대신 오히려 편견과 오해를 더욱 고착시키고 서구중심적이고 수구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집단의 자기중심주의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기말 논문의 참고문헌으로 위키백과를 쓴다고 하기에 위키백과의 여러 문서를 찾아보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민주주의적’이긴 하되 ‘지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허접스러운 엔트리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문서를 보니 아주 놀라운 ‘사실’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첫째 미국 의회는 한국전쟁 당시 선전포고를 한 일이 없으므로 한국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치안행위’였을 뿐이라는 것, 둘째 미군들이 ‘용감하게’ 무차별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한국인들을 ‘해방’시켰다는 것, 셋째 공산주의자들은 사악하며, 넷째 한국전쟁, 아니 한국 치안행위는 거의 완전히 미군에 의해 수행됐다는 것, 다섯째 한국 사람들은 한국전쟁이라는 대역사극에서 전혀 중요한 배역을 맡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저 미군들이 점령한 무대의 주변을 맴도는 하찮은 조역에 불과했다. 한국 군인과 인민군, 김일성, 이승만, 그리고 몇백만에 이르는 ‘민간인 사망자’라는 통계숫자가 간혹 등장할 뿐이었다. 사진자료도 거의 미군 사진들뿐, 보통 한국 사람들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은 듯했다.
다시 ‘훌륭한 미국, 미국이 구원한 한국’으로
한국전쟁에 관한 문서는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미군의 우수성과 미국의 대외정책을 논하는 또 하나의 공간이나 핑계일 뿐이었다. 이런 미국 중심주의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젠 위키백과 덕분에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누구나 소비할 수 있는 지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도 위키 편집자가 되어 만연한 편견과 왜곡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나는 한국전쟁 문서에서만도 100군데가 넘는 수정을 가했다. 일본의 잔혹한 수탈, 미군의 무차별한 양민 폭격과 대량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은 애초에 ‘내전’(civil war)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써넣었다. 몇 주간이나 거의 날마다 더하고 고치고 빼는 작업을 하고 나서 이만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한두 주 쉬었다. 그 뒤에 다시 가보니 쉬고 있던 사이 이전의 편집자들이 개떼같이 몰려와 “훌륭한 미국, 악랄한 북한, 미국이 구원해준 한국”이란 구도로 다시 원상복귀를 해놓은 것이 아닌가!
몇 주간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나는 ‘개인적인 주관이 강한’ 편집자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았다. 위키 용어로 POV(Point-Of-View)라고 하는 ‘개인적 시각’은 용서 못할 죄로 치부됐다. 위키피디아는 논리도 엉성한 ‘객관주의’를 숭배하는데 그들은 NPOV(Non-Point-Of-View)가 객관적 진리를 보장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살리고 고치고 빼는 작업을 계속하며 한편으로는 다른 편집자들과 ‘대화’(talk)방에서 논쟁을 계속했다. 어차피 위키피디아에서는 모든 것이 임시적이다. 내가 고쳐놓은 것 중에 일부 살아남은 것도 있어 전반적으로 한국전쟁 문서는 조금 나아졌다. 내전(Korean Civil War)이라는 표현은 수정된 채 상당히 오래 버티었고 1945~50년의 전쟁 전 상황을 다룬 부분도 일부 편집자들의 공감을 얻어 남아 있다(흥미롭게도 나와 공감하는 편집자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 관점의 배제(NPOV)는 위키피디아의 최대의 구호이며 개인적 관점(POV)은 최악의 죄로 여긴다. 위키 신봉자들은 NPOV가 ‘객관적’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믿으며, 한 가지 측면만을 부각시키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전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NPOV란 다수 지배집단이 원래부터 공유하고 있는 편견을 객관적인 사실로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모든’ 시각과 측면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설혹 가능하다 해도 특정 논의에 모든 입장과 시각이 완전히 고려됐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위키백과 영어판 편집자은 대부분 18살에서 30살 사이의 백인 남자들인데 이들이 다수결로 생산해내는 지식이 어떻게 ‘모든 의견과 시각’을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인가?
18~30살 백인 남성의 다수결일 뿐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 사회, 역사 및 정치에 관한 많은 부분이 심히 미흡하며, 미국 중심적이고 친일본적인 편견과 왜곡이 난무한다.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친일파 미국 지식인들과 일본학 전공자들이 교육·연구 현장에서 한국사를 왜곡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데 위키백과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키백과의 허접스러움은 단순히 공부를 덜한 대중이 다수결로 만든 지식이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질 높은 지식은 지식의 주체와 객체 간의 권력관계에 대한 성찰이 있는 지식이며, 끊임없는 비판적 사고와 해체적 시각에 열려 있는 지식인데 위키백과의 운영철학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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