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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은 왜 돈을 돌려줬나

등록 2007-07-13 00:00 수정 2020-05-03 04:25

‘BBK 사건’ 관련 여러 의혹 가운데 대선 전에 밝혀져야 할 것들

▣ 특별취재팀

은 ‘BBK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런 가정을 해봤다.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 가운데 한 명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이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회삿돈을 빼돌리는 횡령과 주식시장에 거짓 정보를 흘려 주가를 조작하는 범죄는 종종 일어난다. ‘금융 검찰’인 금융감독원과 검찰은 법에 따라 관련자들의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BBK 사건은 소액 투자 피해자들이 많고 액수가 크긴 하지만, 사건 자체로는 지금처럼 세간의 관심을 끌 만한 사건은 아니다. 2001년께 발생한 사건이 2007년까지, 그것도 바다를 건너 미국 법정에서 여러 건의 소송으로 번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전 시장이 관련되지 않았다면 초기 단계부터 범죄를 저지를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경력을 쌓은 젊은 금융전문가 김경준(41)씨가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로 자신의 경력만을 내세워서는 국내에서 투자자를 끌어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이 전 시장과 김씨에게 돈을 불려달라고 맡긴 거액 투자자들, 다스·심텍·오리엔스 등은 친인척이거나 대학 동문으로 이 전 시장과 연결돼 있다. 이 전 시장을 보고 투자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 전 시장이 투자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검찰과 금감원이 BBK 사건을 나름대로 조사했다지만 이 사건의 실체는 겨우 빙산의 일각만큼만 드러나 있다. 김씨가 주가조작으로 번 옵셔널벤처스 돈 384억원을 횡령했다는 정도만 알려졌지, 누가 얼마큼 누구 때문에 투자했고 몇 명이 어느 정도 피해를 봤는지는 아직 가려져 있다. 특히 돈과 관련된 사건은 돈이 어디에서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어디에 가서 꽂혔는지가 핵심인데 그 흐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전 시장이 언제 어떻게 김씨와 인연을 맺었는지, ‘사이버 종합금융회사’를 꿈꾸던 동업자들이 서로를 사기꾼으로 고소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도 중요한 대목인데, 지금은 미국의 재판 기록을 통해 어렴풋이 파악하는 수준이다. 미국에 수감 중인 김씨가 국내로 송환돼 검찰의 수사가 진행돼봐야 전모를 알 수 있다. 김씨의 송환 여부와 시기는 미국 법원과 정부가 결정할 사안이어서 올 연말 대통령 선거 전이 될지, 다음 대통령의 임기 중일지 아무도 모른다. 유력한 대선 후보와 관련된 사안이어서 그런지 사건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검찰과 금감원은 정치적 논란을 우려해 있는 자료도 공개를 꺼리고 있다. 국민들은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일부 참여하기도 하고,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된다면 본선에서 이 전 시장에게 표를 줄지 여부를 고민하게 된다. 알아야 잘 찍을 수 있는데 의혹투성이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 전 시장 처지에서도 의혹들이 말끔하게 해소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여러 의혹 가운데 대선 전에 밝혀져야 할 것들을 추려보았다.

1. 이명박 전 시장은 피해자인가

이명박 전 시장의 “나도 피해자”라는 해명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가 입은 피해가 어떤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이 전 시장과 김씨는 1990년대 말에 만나고 2000년 2월 사이버 종합금융회사를 꿈꾸면서 LKe뱅크를 설립한다. 두 사람이 30억원씩 내고 하나은행이 5억원을 냈다.

이 전 시장 쪽이 주장하는 물적 피해는 35억원이다. 이 전 시장의 선거대책위원회는 7월6일 의 질의에 대해 “LKe뱅크에 출자한 30억원에다 김경준의 횡령 때문에 하나은행에 되돌려준 출자금 5억원을 더해 원금 기준으로 모두 35억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주장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주장을 뒷받침할 사실이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LKe뱅크는 법인 등기부상 아직 살아 있는 회사다. 그래서 이 전 시장이 신고한 재산등록사항에는 ‘LKe뱅크 출자지분 30억원’이 포함돼있다. 이 회사 설립 당시에는 이 전 시장이 대표이사였고 현재는 그의 대학 동기인 안아무개씨가 대표이사다. 일반적인 경우 공동 지분을 가진 동업자의 잘못으로 회사가 망하면 공동 책임을 지는 ‘손실’이 되지 그 동업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피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 전 시장은 김씨의 사기로 피해를 봤다며 미국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법원은 김씨가 이 전 시장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또 한국 검찰이 미국 정부에 범죄인 인도청구(2004년 1월)를 하면서 기재한 범죄 사실에는 LKe뱅크의 주식 납입금은 등장하지 않는다. 김씨가 그 돈에 손을 댔다고 볼 명백한 증거가 없는 만큼, 이 전 시장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하나은행에 되돌려준 5억원이 전부다. 그 5억원도 LKe뱅크가 하나은행과의 계약을 위반하면서 벌어진 일이니 이 전 시장의 책임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김경준씨는 이 전 시장과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김씨는 이 전 시장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소장을 통해 주장했다. 김씨가 주장하는 이 전 시장의 약속은 △정치인으로 재기하지 않고 사업가로 남겠다 △의사결정권자이지만 배후 동업자(Silent Partner) 역할을 하겠다 △투자자는 모두 이 전 시장의 친인척과 친구들이기 때문에 투자자와의 사이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자신이 해결하고 김경준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김씨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도 없는 상태다.

2. 이명박 전 시장은 왜 ‘가해자’의 의견을 구했을까

피해자라도 다 같은 피해자는 아니다. 2000년 10월 BBK에 50억원을 투자했던 심텍은 투자금을 다 돌려받지 못하자 이듬해 10월에 이 전 시장의 재산에 가압류 신청을 한다. 11월에는 이 전 시장과 김씨 등을 사기죄로 고소했다가 투자금을 회수한 뒤에 소를 취하한다. 피해를 본 투자자(심텍)가 투자한 돈을 돌려받기 위해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 전 시장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전 시장의 재산에 대한 가압류 결정을 내린 법원의 판단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동업자였던 이 전 시장과 김경준씨의 관계는 2001년 4월 ‘서류상’ 결별한다. 이 전 시장은 4월18일 LKe뱅크 대표이사직을 사임한다. 금감원이 BBK의 문제점을 검사하고 투자자문업을 취소시키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김씨와의 관계까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심텍이 이 전 시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이 전 시장은 11월2일 김씨에게 “심텍 쪽이 공식적으로 소송대리인을 선임하여 법적 절차를 밟고 있음을 감안하여 본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서면이나 전화로 김경준 사장의 의견을 조속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서류( 6월11일치 보도)를 보낸다. BBK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해온 이 전 시장이, BBK 투자금 회수를 위해 심텍이 자신을 압박하자 ‘가해자’ 김씨에게 이 문제를 협의한다. 2001년 11월이면 사이버 종합금융회사의 꿈은 이미 물건너갔고 투자자들의 원성이 빗발쳐 김씨의 혐의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던 시점이었다. 김경준씨는 12월20일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3. 김경준씨는 미국 도피 전에 왜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줬을까

김씨를 사기꾼으로, 횡령과 주가조작을 김씨의 단독 범행으로 단정할 경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김씨가 BBK에 투자했다가 투자자문업 취소로 손해를 본 투자자들에게 2001년 7월부터 도피 전인 12월11일까지 22차례에 걸쳐 384억원을 송금한 일이다. 금융전문가인 김씨가 ‘먹고 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384억원을 미국으로 빼돌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심텍(41억원)을 비롯해 이 전 시장의 형 이재정씨와 처남 김재정 명의의 회사인 다스(당시 대부기공, 39억원), 오리엔스(104억원) 등에 모두 384억4776만953원을 송금한다. 한국 검찰이 미국 정부에 보낸 범죄인 인도 요청서에 첨부된 서류에 나타난 기록이니 검찰의 계좌추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송금에 쓰인 돈은 김씨가 주가조작에 동원한 옵셔널벤처스의 공금 횡령 액수와 일치한다. 옵셔널벤처스는 주가조작 당시 BBK와 LKe뱅크의 계좌를 이용하는 등 각종 기록이나 증언으로 미뤄볼 때 LKe뱅크의 자회사로 볼 수 있다.

김씨의 송금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김씨가 송금해준 돈을 받은 쪽에는 BBK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회사들이 포함돼 있고, 이 회사들의 대표이사는 이 전 시장의 친인척이거나 대학 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전 시장은 2001년 LKe뱅크 대표를 사임하면서 김씨와의 관계를 정리하는데, 김씨는 그 이후에 주가조작과 횡령이라는 범죄를 저질러 마련한 384억원 중 184억원가량을 심텍 등 드러난 BBK 투자 피해자들에게 돌려주고 미국으로 도피한다. 참 ‘친절한’ 경준씨다.

게다가 나머지 200억원가량도 어디론가 송금이 돼 있다. 다만 검찰 서류에 등장하는 김씨 돈의 종착점은 취재만으로는 밝히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34억원가량은 수신처가 ‘불상’(알 수 없음)으로 기록돼 있다. 돈을 건넨 장소와 방법이 명확하지 않은 ‘불상’은 있을 수 있지만, 계좌를 통해 입금된 것까지 ‘불상’으로 표기된 대목은 의아스럽다. 혹시 이름이 드러났을 때 불편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검찰의 판단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이아무개(20억8천만원), 박아무개(8억4005만원), 또 다른 이아무개(5억원)에게 34억원가량이 갔다. 라라자(Laraza), 프라임(Prime) 등 외국계 회사로 추정되는 곳에도 수십억원이 흘러간다. LKe뱅크의 자회사였던 BBK에 누가 얼마큼 투자했는지 드러난 자료가 없으니 BBK와의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 회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송금액의 성격은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미국 소송 기록에는 BBK 투자자 수가 17명이라고 적혀있다.

김경준씨 쪽 심원섭 변호사는 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검찰이 미국 검찰에 보낸 회계장부와 계좌추적 자료를 보면 자금흐름 조사가 어느 정도 끝난 것 같다”며 “공정하게 조사한다면 이명박씨를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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