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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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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

등록 2007-06-06 00:00 수정 2020-05-03 04:24

82학번 정재권 편집장부터 초등 5학년 길윤형 기자까지 “나와 87년 6월”

# 환호성, 그리고 아득함

▣ 정재권 기자 jjk@hani.co.kr

1987년은 ‘방황’으로 시작됐다. 그해 2월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고, 건강을 추스른다는 이유로 고향이나 다름없는 광주에 머물렀다. 학생운동을 마치고 그 이후의 사회운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요양은 기실 핑계였다. 좀더 솔직하자면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시는 노동운동이 시대적 당위였다. 하지만 내 삶을 다 던질 자신이 없었다. 뭔가 시대적 명분을 놓지 않으면서도 ‘합법적인’ 일은 없을까…. 머리는 늘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광주에서도 그저 쉴 수만은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 조처’와 5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 폭로, 그리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구성과 전국적 시위로 이어지는 격랑에 휩쓸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5월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연일 매캐한 최루탄 가스에 휩싸여 지냈다. 큰 이념적 지향성이나 흔히 말하는 전략적 목표는 머릿속에 없었다. 뭔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대학 시절의 부담감도 없었다. 그저 시위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다쳐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사건은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과 사무직 노동자들의 가세를 피부로 느꼈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났고, 거리의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시위대 속에서 취재하러 온 한 일간신문 기자인 대학 선배와 조우하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도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외침으로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6월29일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을 긴급 뉴스로 들었다. ‘6·29 선언’이었다. ‘그래, 이겼어’ 하는 환호성이 마음속에서 터져나왔지만, 막연한 아득함 같은 것도 함께 밀려왔다. 공백상태에 빠진 느낌이랄까? 직선제 관철 이후엔 어떻게 될까,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전망의 부재(不在)였고, 그 결과는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나타났다. 6월항쟁의 단기적 과실은 ‘6·29 선언’이라는 잘 짜인 각본을 만들어낸 5공화국 군부세력이 차지했던 것이다.

6월항쟁은 지금의 내 삶을 있게 한 주요한 계기였다. 87년 분출된 사회 진보에 대한 열망은 보수 일변도의 기존 매체를 뛰어넘는 새로운 일간신문의 창간으로 모아졌고, 이듬해 5월 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 그때 나는 전경이었다

▣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87년 6월 나는 부산시 경찰국 기동6중대 소속의 전투경찰이었다. 6월10일 아침 우리 중대는 부산대 후문에 배치됐다. 전날 서울에서 학생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후문 쪽은 아무 일 없었다. 몇몇 고참들은 동전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6시쯤 귀대했다. 뉴스에서 서울의 시위 장면이 나왔다. 학생 한 명이 시너를 차에 붓고 불을 붙이는 장면이 나왔다. 내무반장이 “니들도 저랬지. 대가리 박아” 하면서 ‘학삐리’ 쫄따구들에게 기합을 줬다.

우리 부대는 주로 광복동 태화당 앞에서 대기했는데 점심시간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음료수를 건네주곤 했다. 하지만 저녁시간이면 아까 그 사람들이 시위대에 섞여 있기도 했다. 점심·저녁은 빵과 우유로 때웠다. 도시락을 실은 차가 시내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부대에서 먹는 아침 한 끼는 정말 잘 나왔다. 닭백숙 반마리가 나오기도 했고 불고기를 식판 가득 담아 먹을 수도 있었다. 적지 않은 특식비가 나왔다고 했다. 고참들은 빵이 지겨워 남겼고 졸병들은 고참들이 남긴 빵을 진압복 안에 넣고 다녔다.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도 빵이 충격을 덜어줘 덜 아팠다.

그즈음 우리 중대는 밤이면 인적 없는 거리를 차에서 내려 버스를 ‘보호’하면서 이동했다. 어느 날 밤 11시 부산진역 앞에 있는데 다급한 무전기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시위대가 광복동 쪽에서 가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부산진역 근처 한국방송이 시위대의 목표라고 했다. 2만 명은 넘는다고 했다. 중대장이 지원 요청을 했다. 서면 쪽에 있던 2개 중대가 무장해제돼 지원이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우리 중대는 부산에서 처음으로 다연발탄(지랄탄)을 사용했던 것 같다. 밤새 대치했다. 다음날 아침 한국방송 건물에는 성한 유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출근 시간에 시민들이 물었다. 밤새 기관총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이 안 죽었냐, 몇 명이나 죽었나. 지랄탄 소리를 기관총 소리로 들은 모양이다.

다음날 동아대로 급히 가고 있었다. 기동대장이 직접 지시했다. 절대 최루탄을 사용하면 안 된다. 버스에서 내려 장비와 대열을 갖추는 중에 화염병들이 코앞에 떨어졌다. 지시고 뭐고 없었다. 최루탄과 사과탄을 쏘며 돌과 화염병을 막았다. 최루탄을 쏘지 말라는 부산시경의 지시가 음어가 아닌 욕설로 무전기를 통해 날아왔다. 바로 옆 구덕경기장에서 대통령배 국제축구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경기는 중단됐다. 나중에 중대장은 심한 문책을 당했다고 한다. 6월20일께 시위 구호에 간간이 “김영삼”이 섞여나오기 시작했다.

최루탄 사용이 줄었다. 물량이 떨어져 보급이 잘 안 된다고 했다. 6월26일 평화대행진이 있던 날 서면로터리 한 중앙에 우리 군 지휘관들과 미군이 나와 있는 걸 봤다. 지도를 펼쳐보면서 로터리로 들어오는 도로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계엄령이나 위수령이 발동된다는 게 정말인가 보다 했다. 시위는 점점 크고 치열해졌다. 27일은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라 전날의 시위가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몇만을 헤아리던 시위대는 몇백으로 줄었다. 우리는 남포동 어느 극장 아래서 비를 피하며 대기했다. 이틀 동안 귀대하지 못한 상태였다. 진압복을 입은 채 거리에서 자고,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던 중이었다. 점심 때쯤 국제시장 쪽 시위대를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100명 남짓한 시위대는 우리를 보더니 혼비백산 흩어졌다. 난 문득 화가 났다.

다시 극장 앞으로 돌아왔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며칠 만에 도착한 우리의 도시락이 불타고 있었다. 제육볶음 양념이 비에 흘러내렸다. 고참 몇 명이 화가 나서 시위대 네댓 명을 잡아왔다. 차라리 우리한테 돌을 던지지 왜 밥을 태웠냐. 길길이 날뛰었다. 우리는 타다 남은 도시락을 바라보며 꾸역꾸역 빵으로 배를 채웠다. 잡혀온 이들이 도망쳤다. 어차피 잡아봤자 어디든 연행자로 차고 넘쳐 가둬둘 곳도 없었다. 비는 주말 내내 내렸다. 월요일은 화창했다. 방독면과 진압복을 손질하는 도중 라디오에서 성명서를 읽는 노태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얼치기 1학년, 혼자서 쏘다니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그해 여름, 나는 얼치기였다. 87학번을 다들 저 뜨거웠던 ‘불의 연대’를 뚫고 지나온 학번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걸핏하면 교정에 최루탄이 터졌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간 3월 초 최루탄이 자욱한 교정 건너편으로 멀리 보이는 새 아파트를 보며 ‘빨리 졸업해 저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해야겠다’고 언덕 벤치에 앉아 다짐하곤 했다.

그런데 4월부터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구호가 캠퍼스를 뒤덮었다. 도서관 창가에서 책을 읽다가 집회 대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고, 수업이 없는 한가한 때는 대열의 꽁무니에 끼기도 했다. 당시 시위대열 앞쪽이 “전두환을”을 외치면 뒤쪽은 “처단하라”를 외치곤 했는데, 뒤쪽에 앉게 되면 슬쩍 앞으로 자리를 바꾸기도 했다. “처단하라”는 ‘끔찍한’ 말을 크게 내뱉지 못할 정도로 의식이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투사’와는 거리가 먼, 머릿수나 채우는 ‘1학년생’이었다.

그러던 5월 어느 날, 처음으로 돌멩이를 들었다. 페퍼포그차 한 대가 교문 앞에서 지랄탄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교문 앞 상가들은 이미 셔터문을 모두 내린 상태였다. 운동장 주변 여기저기에 주인 잃은 운동화가 뒹굴었다. 지랄탄이 터지면 흰 헬멧에 청바지를 입은 ‘백골단’(경찰 체포조)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약효가 떨어지기 무섭게 교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숨바꼭질 같은 공방이 계속됐다. 뒤처진 백골단 한두 명이 학생들한테 붙잡히는 것을 봤다. ‘쟤들이 곧 다시 퍼부을 것이니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옆에 있던 돌멩이를 교문 앞으로 집어던졌다. 몇 번의 공방이 계속됐을까? ‘꽃병’(화염병)들이 일제히 페퍼포그차 쪽으로 집중됐다. 누가 내 손에 화염병을 쥐어줬는지, 내가 알아서 집어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페퍼포그차를 향해 화염병을 집어던지고 뒤로 내뺐다. 정확히 보고 던진 것 같지도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중한 철갑차 밑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타이어에 불이 붙었다. 내가 던진 꽃병이 적중한 건 아닐 것이다.

그해 6월, 거리에서 나는 어떤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은 단독자였다. 종로며 을지로 거리에서 밤늦게까지 쏘다니고 터덜터덜 걸어 동대문 집에까지 가곤 했다. ‘택’(Tac·언제 어디서 시위가 열릴 예정이라는 사전계획)도 몰랐다. 종로 거리를 걷다 보면 택을 받은 일군의 학생들이 갑자기 뛰쳐나와 ‘독재 타도’를 외쳤고, 삽시간에 도로가 점령되면 나도 어느 틈에 시위대에 끼어 있었다. 아마도 군부독재의 억압보다는 도시 빈민이라는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비롯된 괴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김지하)이란 노래를 되뇌던 그 시절, 어쩌면 오랫동안 서울의 달동네 단칸방에 살면서 느껴왔던 ‘까닭 모를 박탈감과 분노’가 나를 거리로 내몰았는지도 모른다.

# 산산히 부서진 동맹휴업이여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덩치가 산만 했던 체육 선생님의 단독 드리블, 그리고 강슛! 골 네트를 흔들도록 내버려뒀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골문 앞에 있던 수비수가 그 ‘거룩하신’ 슛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 교사도 학생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페널티킥을 하면 된다. 그런데 무지막지한 ‘응징’이 가해졌다. “골키퍼도 아닌 니가 그걸 왜 막아! 엉? 감히….” 무지 더웠던 그해 6월 체육 수업 시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 반 학생 대부분은 그 뒤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수업 거부’를 하고서도 운동장 한켠에 모여앉아 있을 뿐이었다. 웃자란 아이들은 김민기와 박노해를 알았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불온서적’을 돌려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담은 성명서 하나 만들지 못했다. 그렇게 어렸다.

교사들은 긴장했다. 따지자면 일종의 ‘학내 민주화 시위’인데 학교 담장 너머의 최루탄 냄새와 섞일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공연하게 협박하는 교사도 있었다. “니들 왜 4·19, 5·18이 커졌는지 알아? X도 모르는 고삐리들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면서 그렇게 된 거야. 괜히 인생 조지지 말고 공부나 해!”

며칠 동안 이어진 수업 거부의 부담은 내게 넘어왔다. 전두환처럼 체육관 선거 비슷하게 선출된 학생회장이긴 해도 이 ‘시국’에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아이들의 불만이었다. 반장들과 만났다. 토요일로 기억한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다음주 월요일 조회가 끝나고 ‘폭력교사 징계, 재발 방지’를 내걸고 3학년 전체가 교실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의했다. 동맹휴업이었다.

월요일 아침. 최종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거사’는 무산됐다. 반장 한 명이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회장,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하지 말래.” “나도” “나도”….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면, ‘이러고 있지 말고, 학교 밖으로 나가자’는 누군가의 ‘선동’에 움직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다음날 신문에 ‘고교생도 시위 동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을 수도 있다. 출발점이 다르긴 해도 학교 안의 ‘전두환’을 거부하는 투쟁이었으니까.

20년이 흘러 이제는 아빠를 슈퍼맨과 동급으로 여기는 아이들을 키울 친구들에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때는 쭈뼛대던 애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봤지만, 사실 나도 겁났다.

# 시위대로 걸어가던 선생님의 뒷모습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평준화 지역의 중3. 한 달마다 월말고사가 끝난 뒤에 있던 단체 영화 관람도 3학년은 불가였다. 도 도 도 안녕이었다. 스쿨버스도 시간이 바뀌었다. 6시50분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모두 핑크플로이드의 같은 핏기 없는 얼굴들을 하고 있더랬는데. 1년 동안 미국을 다녀오신 영어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으로 오셨다. 87년 봄의 어느 날, 학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날리며 손을 뻗어 세운 뒤 타서는 끝까지 내리지 않다가 스쿨버스의 종점에서야 내리는 선생님을 목격했다. 단가에 타는 날짜를 곱해서 에누리도 없던 스쿨버스를 선생님은 그냥 손을 들어 타는 것으로 보아, ‘공짜 승객’임이 분명했다. 그것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나도 종점에서 내려야 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집은 우리 집을 지나쳐 있는 아파트였다. 종점에 가까워오면 사람도 드문드문해져 혹시나 시선이 마주칠까봐 목디스크가 걸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멍한 눈 연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아 무임승차 선생님과 같이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처지가 되었고, 빨리 집이 나타나 이 별로 즐겁지 않은 대화가 끝나기를 바랐다. 그럭저럭 6월, 날짜 미상. 스쿨버스는 진주역 부근에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버스 안으로 외부의 소음들이 날아들어왔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태극기가 크게 한번 날았다. 태극기는 너무 커서 군중을 다 덮을 듯했다(분명 오기억이리라). 무임승차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천천히 가던 버스는 멈추고 빨간 치마 정장을 입은 선생님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시위대 쪽으로 걸어가셨다. 오늘은 같이 걸어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안심이 되었다.

# 87년은 90년대에 시작됐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나에게 87년은 90년에 시작됐다.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방배동에서 명동성당까지의 거리는 멀었다. 방배동 고개의 학교 운동장은 최루탄의 무풍지대였지만, 시대의 공기는 그곳에도 끼쳤다. 시험지를 찍어내는 등사기로 유인물을 인쇄하던 선생님이 파면당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중딩’은 ‘고삐리’가 되었다. 90년, ‘6·10 항쟁 기념 3주년 집회’에 나갔다.

화창한 고3의 어느 날,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종로로 나갔다. 어머나 어쩌나, 종로 대로에는 전경들이 “어서 옵쇼” 기다리고 있었다. 초긴장 고삐리는 그나마 다른 고삐리 동지들을 만나자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을 것이다. 뒷골목에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저쪽에서 완전무장 전경들이 몰려왔다. 소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뛰어가자 또 다른 전경들이 이쪽에서 몰려왔다. 아뿔싸, 건물로 뛰어 들어가 엉겹결에 들어간 화장실. 떨리는 얼굴 위로 전경이 곤봉을 내려쳤다. 정해진 수순대로, 닭장차에 실려 종로경찰서에 모셔져 콩밥을 먹었다. 콩밥을 먹고 집으로 갔다. “고등학생 일어서.” 연행된 자들 가운데, 고딩들이 우르르 일어서자 대학생 언니오빠들의 ‘므흣한’ 탄성이 터져나왔던가, 아니던가. 그렇게 87년 6월과의 인연은 고약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서, 콩밥을 먹었던 고삐리는 종로서 구내식당에서 강력계 ‘형님’들과 점심을 먹는 출입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삐리는 대딩이 되었다. 하필이면 김지하 선생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고 꾸짖고, 박홍 신부가 “분신에 배후가 있다”고 늑대소년 놀이를 하던 91년이었다. 난무하던 슬로건은 잊혔어도, 아직도 생생한 선배의 한마디, “87년보다 클 것 같애”. 새내기 대딩이 보아도 참으로 어수룩한 정세 판단이었지만, 정말로 믿고 싶었나 보다. 그러니 아직도 기억에 남았지. 87년만큼만 된다면, 세상이 바뀔 것이었다. 그렇게 87년은 희망의 준거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팔칠년 칠팔구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로 시작하는 운동가로 87년을 배웠던 90년대 초·중반 학번이었던 것이다.

87에서 92까지, 5년 만에 시대의 만가를 불렀다. 하필이면 종로였다. 87년의 아이였던 정태춘은 에서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가는구나”라고 노래했다 아니 통곡했다. 시간은 빠르게 감기로 흘렀다. 97년 6월에는 마로니에공원에서 안치환이 그래도 만장하신 여러분 앞에서 김남주 시인의 를 부르는 것을 보았고, 7월에는 보라매공원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 기념집회가 참으로 썰렁한 가운데 치러진 것도 기억에 남는다. 87년의 시민과 노동자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른 세월을 살았다. 그리고 2007년, 서른다섯의 전교조 세대 아저씨는 아직도 유월이면 이따금 읊조린다.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 타도, 민주 쟁취 하나된 함성, 동포여 해방의 나라 이뤘다.” 6월항쟁 세대는 를 잊어도, 90년대 세대는 를 기억하는 아이러니, 87년의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나 87년을 자신의 역사로 기억하는 역사의 환각 효과, 87년은 여전히 중독성이 강하다.

# 아버지의 희망 YS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87년에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늘 시위 화면이 끊이지 않았고, 서울 변두리인 구로구 개봉동의 낡은 골목까지 최루가스 내음이 날아들었다. 어른들은 “박종철이 불쌍하다”고 했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한다”고도 했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퇴근이 늦곤 했는데, 그때마다 다소의 부부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YS(김영삼)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87년 6월의 기억은 뜬금없이 집으로 날아온 우편물 하나로 오히려 또렷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으로 된 민정당 당원증이었다. “그런 것 내다버리라”는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어디 쓸 데 있을지 모른다”며 맞섰다. 며칠 뒤 다시 우편물이 날아들었다. 다시 민정당 당원증이었다. 아버지는 YS 지지자였고, 어머니는 충청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JP(김종필)에 끌리고 있었다. 왜 같은 당원증이 두 번이나 집으로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게, 그해 여름의 이미지는 6월항쟁이 아닌 홍수였다. 우리 집은 상습 침수구역이었던 안양천의 지류인 개화천 근처였다. 개천 너머로는 광명시였다.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우리 집은 물에 잠겼는데, 방 안에서 둥둥 떠다니던 장롱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수재의연금이 나왔는데,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집행이 연기됐다. 친구들과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는 구호를 따라 부르며 놀았다.

개헌 투표가 있던 날 아버지는 직장 동료들과 장흥으로 야유회를 갔고, 코미디언 김형곤은 인기 코너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한데 뭉치지 못하는 YS와 DJ(김대중)를 풍자하는 콩트를 선보였다. 대선날 밤새 개표 방송이 이어졌다. 아버지의 희망 YS는 ‘보통 사람’ 노태우에 밀려 2위였다. 이듬해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우표를 모으던 나는 기념우표를 구하려고 쏜살같이 우체국 앞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괜히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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