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역풍의 쓰린 기억을 되새기며 무시 전략으로 가는 한나라당…우세인 현 정국의 변화 원하지 않고 내부 분열에 대한 공포도 작용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성경의 마태복음 6장 13절에도 나오는 말씀이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월11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유혹하면서 계속 도발한다. 그래도 우린 계속 무시하고 간다”고 말하면서 기도문을 덧붙였다. ‘시험’은 뭘까? 노 대통령이 던진 개헌 카드다.
대연정 제안 거부의 성공담
노 대통령은 1월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통령 임기의 4년 연임 개헌론을 발표했다. 이틀 만인 11일 기자회견에서는 갑자기 한나라당을 맹비난했다. 표현엔 거침이 없었다. “토론 거부 결의안까지 하고 함구령까지 내려버리는 것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죠. 어떤 정당이, 이런 정당이 있습니까. 이거 민주정당 맞습니까?”
이틀 동안 한나라당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나라당은 개헌의 열쇠를 쥐고 있다. 헌법상 노 대통령이 개헌을 발의할 수 있지만 국회를 통과하려면 재적의원(296석, 1월12일 현재) 3분의 2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139석의 열린우리당만으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투표에도 부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담화 뒤 네 시간 만에 나경원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개헌 카드는 정치 노림수와 오기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정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개헌 논의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한나라당의 정리된 입장을 내놨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당황은 했지만 분열과 혼란은 없었다.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의 당 대표 면담 요청도 거부했다. 이튿날 쐐기를 박았다. 의원총회를 열어 당 소속 국회의원 일동 명의로 ‘정치 노림수’를 좀더 구체화한 “국정 실패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고 정국 주도권 장악 및 재집권을 위한 국면 전환용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는 내용 등을 담은 4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결의문의 맨 끝에서 “개헌 논의에 일절 응할 수 없다”고 다졌다. 나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개헌을 주제로 한 텔레비전 토론이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토론 금지령이다.
정두언 의원이 당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무시 전략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대통령의 후원회장이었던 이기명씨가 “개헌은 한나라당이 받은 새해 선물”이라고 말해도, 대통령이 ‘골을 질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려들지 않겠다며 무대응을 상책으로 쓰는 한나라당의 태도는 과거 정치적 교훈에서 습득했는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은 2004년 노 대통령의 재신임 카드에 말려들어 탄핵 역풍을 맞았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다. 동시에 이듬해 대연정 제안에 끝까지 거부와 무대응으로 응했던 성공담을 기억한다.
한나라당은 왜 반대할까? 한나라당은 ‘지금 이대로’가 좋다. 당 지지율은 40%대이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11개월 앞둔 상황에서 대선 예비 주자의 지지율 1, 2위는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현 정국의 변화를 원치 않는다. 개헌은 변화의 불꽃이 될 수도 있다. 청와대는 아니라고 하지만 한나라당은 그렇게 본다. 어쨌든 변수는 차단해야 한다는 게 한나라당을 지배하는 생각이다.
한나라당의 반대는 내부 분열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한나라당 염창동 당사를 떠도는 ‘유령’이 있다. 그 어떤 이유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축으로 한나라당이 둘로 갈라지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이번엔 노 대통령의 개헌 카드다. 근거는 희박하지만 두려움은 존재한다. 정두언 의원은 “분열을 노리고 (카드를) 제안한 것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받고, 박근혜 전 대표와 나머지는 안 받을 것이라는 기대”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한나라당 내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의 입장은 통일돼 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정권에서 개헌(또는 논의)하자는 것이다. 박근혜는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고, 이명박은 “경제 살리기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대안 제기하는 적극적 형태로”
여기까지 보면 한나라당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여론의 지지도 뒷받침되고 있다. 참여정부 임기 내 개헌에 찬성하는 비율보다 반대하는 비율이 두 배 이상 높다.
하지만 100% 안심할 순 없다. 개헌 이슈가 한나라당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7대 국회 들어서 개헌 문제는 2005년 초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김덕룡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이후 당 안팎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고, 4년 연임(또는 중임제) 개헌론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명박과 박근혜, 손학규를 포함해서다. 문제는 이것이 노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꺼낸 개헌안과 내용 면에서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개헌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나라당의 대답이 옹색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청와대와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입을 닫겠다는 태도에 대해선 바깥의 시선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노 대통령이 발의하겠다고 한 이상 한나라당이 개헌을 부결시킨다고 해도 개헌 정국은 최소한 두세 달 이상 이어진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입을 계속 닫고 있어야 하나? 또 그럴 수 있을까?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이 “당이 토론에 불응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는 소극적 대응”이라며 “오히려 ‘개헌이라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하는데 현재 어떤 조건이기 때문에 부적절하다’는 식으로 대안을 제기하는 적극적인 형태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 의원뿐만 아니라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원희룡·고진화 의원과 남경필 의원 등 ‘수요모임’ 소속의 소장파 의원들 생각도 비슷하다.
조기 대선도 배제할 수 없는 카드
개헌은 당으로서는 자칫 응집력이 떨어질 수 있는 틈이다. 여론의 향배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이 틈은 벌어질 수도 봉합될 수도 있지만 아직 어느 한쪽이라고 예단하긴 이르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당적 포기란 카드를 갖고 있다. 충분히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다. 노 대통령이 “임기 단축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개헌 부결 뒤 임기 단축으로 인한 조기 대선 실시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은 “분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며 “경선할 겨를도 없이 대통령을 뽑게 되면 박 전 대표와 이 전 시장이 따로 출마해 당이 깨진다는 시나리오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개헌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반한나라당 진영의 결속과 지지율도 영향을 받을 게 분명하다.
이래저래 한나라당은 개헌이 통과되지 않았을 때를 편하게 기다릴 형편이 아니다. 그때 아니면, 그전에 노 대통령이 또 어떤 시험에 들게 할지, 한나라당의 근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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