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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날벼락? 근본적인 부실?

등록 2006-12-28 00:00 수정 2020-05-03 04:24

외부적 충격과 내부 펀더멘털, 두 개로 갈린 외환위기 원인 규명…이후 재벌개혁이냐 외국자본 통제냐 따지는 논쟁으로 이어져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외환위기의 원인 규명을 둘러싼 논쟁은 정책대응 실패 또는 외부적 충격(동남아시아 금융위기의 전염)을 중시한 ‘날벼락’ 견해와, 한국 경제 내부의 구조적 문제(거시경제적 기초경제 여건 취약)에서 야기된 ‘펀더멘털의 위기’ 등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됐다.

투자자들의 패닉 vs 취약한 발전모델

날벼락 이론을 대표하는 쪽은 제프리 삭스 미국 하버드대 교수다. 그는 위기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즉 거시경제적 불균형이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투자자들의 패닉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쳤다고 보았다.

도덕적 해이에 따른 금융·기업 부실에다 외채 구조의 단기화, 정책대응 실패, 동남아 위기 등 외부적 충격으로 인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갑자기 자금을 회수해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반면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과도한 경상수지 적자·기업의 과잉투자·금융기관 부실 악화 같은 동아시아 경제의 구조적 결함을 들면서, “한국의 경제 기적은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이 없는 상태에서 자본·노동의 양적 생산요소 투입에 의한 성장이라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펀더멘털이 취약한 발전모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제위기를 맞게 됐다는 얘기다.

물론 국제통화기금(IMF)는 위기의 원인이 펀더멘털에 있다고 진단하고, 즉 근본적인 해체와 수리가 필요한 부실 건물로 취급하고 혹독한 고금리 긴축정책을 폈다. IMF의 구조개혁 프로그램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다는 명목 아래 한국 경제를 영미식 시스템으로 재주조하는 것이 목표였다. 거시경제 긴축, 시장 개방, 금융·기업·노동·공공 등 4대 부문의 시스템 개혁이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위기 이후 최소 3∼4년간은 성장이 정체할 것이라는 초기 예상을 뒤엎고 한국 경제는 V자형의 급속한 회복을 보였다. 국내총생산은 1999년 10.9%, 2000년 9.3%라는 높은 성장률을 다시 한 번 기록했다. 과연 한국 정부가 IMF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따른 덕분일까?

사실 IMF의 무리한 긴축 고금리 처방은 유동성 위기로 수많은 기업들을 부도로 내몰았고 경기침체를 가중시켰다. 제프리 삭스 교수는 이를 두고 “IMF의 강도 높은 긴축정책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잘못된 구조개혁 프로그램이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여러 은행을 폐쇄했지만 곧바로 투자자의 ‘신뢰’가 회복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장에서 패닉 현상만 심화시켰고 자본 유출은 진정되지 않았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외국인 투자자금이 다시 유입되어 한국 경제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경제가 회복되니까 자금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라며 “급속한 회복은 IMF 개혁의 결과가 아니라 공적자금으로 신속하게 금융부문의 자본구조를 재조정하고 금리를 실질적으로 낮춘 팽창정책의 결과”라고 말했다.

IMF가 기조 바꾸며 경제 급선회

이와 관련해 IMF는 1998년 말부터 긴축·고금리 처방을 180도 전환해 공적자금 투입 등 확장적 재정정책을 용인하고, 초고금리에서 저금리 기조로 바꿨다. 경제회복은 IMF가 정책 방향을 바꾸고 나서야 시작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98년 12월 콜금리는 6.6%, 3년 만기 회사채 금리는 8.3%로 한국의 산업화 역사에서 최초로 한 자리 숫자로 떨어졌고, 시장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수준까지 공적자금이 공급(2006년 10월까지 총 168조원)됐다.

급속한 경제 회복에 따라, 구조적 결함론은 점차 소수의견이 되고 정책 대응 실패가 외화유동성 부족 사태를 초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됐다. 그 뒤 외환위기에 대한 원인 진단은 재벌개혁 논란으로 이어졌다. 재벌 체제를 구조적 취약성의 핵심으로 보는 참여연대 등은 투자자의 견제와 통제를 통한 ‘재벌개혁’을, 재벌 체제가 갖는 강점(‘국가-은행-재벌’의 연계에 의한 전통적인 한국 경제 발전모델)을 강조하는 대안연대회의 쪽은 국내 재벌기업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노리는 ‘외국 자본 통제’를 요구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구도가 전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외환위기의 원인과 처방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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