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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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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을 떠도는 구조요청

등록 2006-11-23 00:00 수정 2020-05-03 04:24

경찰과 자치단체의 책임 전가로 얼룩진 미아리 화초정 화재 참사…이중철문에 갇힌 여성들이 세 차례나 신고했으나 허술한 수사로 끝나

▣ 미아리 텍사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2005년 3월27일 낮 12시36분.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88 일대 ‘미아리 텍사스’는 지옥으로 변한 뒤였다. 그때 기자는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입하던 사건 기자였다.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우다 “현장으로 튀어가라”는 회사 연락을 받고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소동은 대략 마무리돼 있었다.

검게 그을린 4층짜리 건물(연면적 191㎡) 속에서 소방관들이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고, 경찰은 테이프로 건물을 둘러싼 채 기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업소 이름은 화초정이라고 했다. 소방관들이 불 구경 나온 주민들과 현장으로 몰려든 기자들을 헤치고 주검들을 실어냈다. 주검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다음날치 사회면에 실릴 기사(‘미아리 집창촌 불, 대낮 참변… 5명 사망’)를 송고했고, 사건을 기억에서 지웠다.

문을 열 때마다 ‘삐리리’ 소리

2001·2002년 군산에 이은 성매매 집결지 화재 참사였지만, 언론 보도는 집요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경찰과 소방관과 자치단체들은 사고의 책임을 숨진 여성들에게 전가했다. 경찰은 “여성들이 일을 마치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담배 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려 불이 커졌다”고 말했고, 이는 여과 없이 다음날치 조간신문을 타고 전국에 퍼졌다. 며칠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화재 원인을 알 수 없다”고 발표했지만, 보도되지 않았다.

사고가 날 때 가게에는 9명의 여성들이 잠자고 있었다. 4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1명은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숨졌으며, 1명은 중상을 입었고, 2명은 무사히 대피했다. 평소 같이 살던 포주와 마담은 외출 중이었다. 함께 있던 ‘주방 이모’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여성들은 서희·진아·경아·연희·예슬·현정·가을·자두 따위의 가명으로 서로를 불렀다.

가게 안에서 여성들은 사실상 감금 상태에 있었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이모들의 감시로 마음 놓고 PC방도 다녀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생리 중에도 성매매를 강요당했고, 제대로 월급도 받지 못했다. 여성들은 지하 1층에서 2층 사이의 공간에서 손님을 받았고, 3~4층에서 잠을 잤다. 건물 2층과 3층 사이에는 두 개의 철문과 한 개의 유리문이 설치돼 있었다. 2층에서 3층으로 접어드는 입구에 철문이 하나 있고, 가운데 두꺼운 유리문을 지나면, 3층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에 또 철문이 있었다. 철문 옆에는 인터폰이 있었고, 문을 열 때마다 ‘삐리리’ 하는 경보음이 났다. 여성들은 그 벨을 ‘삐리리’라 불렀다. ‘삐리리’ 소리가 나면 현관 이모가 나타나 여성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3~4층의 창문은 폐쇄됐거나, 커다란 짐에 가려져 있었다. 그것은 감금이었을까? 경찰은 “감금이 아니다”고 말했다.

여성들은 경찰에게 세 차례에 걸쳐 구조 요청을 했다. 첫 신고는 3월20일 새벽 1시29분42초에 접수됐다. 한 여성이 휴대전화로 112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했다. 신고 내용은 “동생이 감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현장을 찾은 경찰은 “감금된 사람이 없다”며 사건을 오인 신고로 판단해 종결했다. 여성들은 절망했다.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신고 때엔 신고자의 실명을 적기로 했다. 닷새 뒤인 3월25일, 112에 휴대전화 문자로 “미아리 화초정 4-45번지 업주가 윤락시키니까 빨리 경찰이 와달라, 전화하지 말고 출동 요망, 신고자 송희선(가명)”이라고 적었다. 송씨는 1999년 10월16일 성동구청이 증명서를 발급한 3급 정신지체자였다. 그의 지능 지수는 68이다. 주변 사람들은 “5분만 같이 얘기해보면, 이상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락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

2004년 9월23일 발효된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을 보면 장애인에게 성매매를 강요하면 1년 이상, 무기까지의 징역형(18조2항)을 받는다. 그들은 왜 경찰에게 “전화하지 말고 출동 요망”이라고 적었을까. 경찰은 두 번째로 현장을 찾았지만, “윤락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사고가 나기 전날 밤 여성들은 다시 112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경찰은 지난해 4월 진상조사단을 꾸린 국회 여성위원회의 거듭된 요청에도 문자 내용을 원문 그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경찰이 공개한 문자 내용에 따르면, 여성들은 “무섭다”고도 했고, “이모 때문에 전화를 못 받는다”고도 했고, “주인 몰래 구해달라”고도 했다. 세 번째 출동 만에 경찰은 포주 고아무개(47), 마담 이아무개(41), 문자 신고에 이름이 나온 송희선을 종암경찰서로 데려가 조사했다. 기대했던 성과는 없었다. 수사를 맡은 종암경찰서 여성청소년계 박은분 순경은 송씨가 정신지체 장애인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포주와 마담에게서 겨우 7m 떨어진 곳에서 송씨의 진술 조서를 받았다. 송씨는 “돈을 벌려면 이곳에 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화 경찰청 생활안전국장은 국회 여성위원회 의원들 앞에서 “7m 떨어진 것도 격리”라고 말했다. 경찰은 송씨를 포주와 마담의 손에 다시 넘겨줬고, 이튿날 불이 나 다섯 명이 숨졌다. 경찰은 의원들 앞에서 여성청소년 활동비를 지금의 월 15만원에서 30만원으로 현실화해달라는 요구를 잊지 않았는데 이를 위해 “1년에 17억7660만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빼놓지 않았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파렴치한 것 같아 당혹스럽다.

성북소방서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들은 안전점검표를 형식적으로 작성했고, 추궁을 피하려고 사고 이후 현장에 소화기를 몰래 가져다놨다는 의혹을 받았다. 2004년 4월23일 그들이 작성한 안전점검표에는 “비상구가 있고, 3~4층에 창문이 있고, 계단에 문이 없다”고 적혀 있다. 건물에는 비상구가 없어 여성들이 빠져나오지 못했고, 3~4층의 창문은 베니어합판이나 커다란 짐에 가려져 있었으며 2층과 3층 사이에는 3중문이 설치돼 있었다. 그나마 안전점검표에는 4층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4층은 불법 건축물이다). 사고로 딸 가을(가명·사망 당시 24)씨를 잃은 어머니(55)는 “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는데, 사고가 터진 뒤 현장을 찾아보니 소화기는 빤짝빤짝 윤이 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정아무개(22)씨는 양현아 서울 법대 교수팀과의 인터뷰에서 “소화기는 없었다”며 “건물 안에 소화기가 있었더라면 내가 죽더라도 불을 끄고 언니들을 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재 경보기가 있긴 했다. 그것은 포주 고광례가 평소 잠자던 1층에만 설치돼 있었다. 이한철 성북소방서장은 국회 여성위 증언에서 “가게에는 5개의 소화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1년 반이 지난 지금에 와서 누구 말이 맞는 지를 확인하기는 힘들다.

서울시는 분향소 설치까지 막아

서울시와 성북구청은 유가족들을 밀어냈다. 그들은 군산 사고 때 군산시가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여성들을 위한 분향소를 설치하지 않았고, 시장 면담을 위해 찾아온 유가족들과 여성단체 대표들을 시청 정문에서 막아섰다. 유가족들은 2005년 3월30일 낮 12시30분부터 3시간30분 동안 정문 앞에서 떨며 서 있어야 했다. 그들은 황인자 서울시 여성가족정책관의 “오후에 분향소로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듣고 물러났다. 여성부는 국회 여성위원회 ‘하월곡동 성매매 집결지 화재참사 진상조사단’에 제출한 ‘하월곡동 화재 참사 현황 및 대책’에서 “참사에 대한 국민적 정서와 달리 성북구청이나 서울시는 인도주의적 차원의 대응이 미흡했다”고 적었다. “서울시와 성북구청은 위법행위 중 사망·부상한 자에 대한 지원이 유사 사례를 양산할 것이라는 점과 인도주의적 대응이 ‘보상’ 책임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여성들이 5명이나 목숨을 잃었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포주 고씨는 2005년 8월22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는 보석금 500만원을 내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성매매 관련 전과만 19범이었다가 이번 사건으로 20범으로 늘었다. 그는 현재 이혼한 남편의 이름으로 미아리에서 ‘해신’이라는 성매매 업소를 운영 중이다. 해신에서 일하던 여성은 기자와 만나 “얼마 전 경찰 단속 때 실제 업주가 고광례라고 말을 했는데도 조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건물주 성씨는 불구속 기소돼 벌금 100만원을 냈다. 그는 그 건물에서 애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국과수는 불이 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화재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담뱃불이 화재 원인은 아니다”고 말했다. 처벌받은 경찰 공무원은 없다. 여성들이 술을 마셨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씻기 힘든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 박아무개(34)씨는 그때 사고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한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고, 오랜 시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정씨는 “언니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도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신지체자 송씨는 자신이 성매매를 했다는 인식도 없었고, 자신이 번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나간 뒤 가족과 떨어졌다가, 사건이 터진 뒤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는 양현아 교수 연구팀과의 면담에서 “PC방 외출을 딱 한 번 했다”고 말했다.



죽음의 방조를 책임져라

국가·포주·건물주 상대로 소송 제기한 유족들의 외침

사람이 죽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미아리 화재사건으로 딸 가을씨를 잃은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포주는 집행유예로, 건물주는 벌금 100만원을 내고 풀려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봐야 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는 서서히 투사로 변해갔다. “이제는 여기서 애들 돌보는 게 일이지 뭐.” 그는 미아리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돕는 자립지지공동체(대표 김미령)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 중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 그래야 다시는 이런 일이 안 터지지.” 호소할 방법이라곤 소송을 내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의논 끝에 2005년 7월 사고로 딸을 잃은 유족들을 모아 국가·포주·건물주 등을 상대로 서울지방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그들이 보기에 사고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공무원들, 즉 국가였다.
유족들은 소장에서 “경찰이 3번의 구조 신고를 묵살해 포주의 성매매 강요를 묵인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터지던 때 포주 고광례는 경찰관 김아무개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그 사건이 고씨 업소의 단속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포주와 경찰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을 것이란 의혹을 부정하긴 힘들다.
소방당국은 불이 난 건물이 법으로 정해진 소방시설을 제대로 갖췄는지 철저히 관리·감독하지 않았다. 건물 내부는 쉽게 불이 붙는 합판과 유독가스를 내뿜는 플라스틱 등으로 도배돼 있어 피해를 키웠다. 성북구청은 불법 증개축된 건물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았고, 건물이 정해진 용도가 아닌 유흥업소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단속하지 않았다. 소송을 맡은 원민경 변호사는 “여성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러 불법 사안에 대한 국가의 묵인과 방조가 있었다”며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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