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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와 ‘민족해방’이 너무 닮았다

등록 2006-11-01 00:00 수정 2020-05-03 04:24

미제든 북한제든 핵우산으로 평화를 유지한다는 발상의 엽기성은 비슷…줄곧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던 이들이 ‘핵에 의한 평화’를 외칠 수 있나

▣ 권혁철 기자 한겨레 편집기획팀장 nura@hani.co.kr

“…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 이 땅의 양심들아 어깨 걸고 나서자/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이 목숨 다 바쳐/ 해방의 함성으로/ 가열찬 투쟁으로/ 반전반핵 양키고홈!”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와 집회 시위 현장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반전반핵가’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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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북한 핵실험 뒤 수구세력이 펼치는 ‘반핵’ 주장이 이와 비슷하다. 이 노래 가사 가운데 ‘양키고홈’과 ‘반전’만 빼면 수구세력의 주제가로 불러도 될 것 같다.

북한 극좌와 남한 극우의 적대적 공생

20년 전 이 노래를 자주 불렀던 진보진영 안의 이른바 민족해방(NL) 쪽은 요즘 ‘반전반핵’ 대신 ‘반전평화’ 구호를 외친다. 미국이 이끄는 대북제재가 한반도의 전쟁을 불러온다며, 민족 공멸의 위기를 막기 위해 ‘반전평화’를 외친다.

수구세력과 민족해방세력은 둘 다 핵으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킨다는 ‘핵우산’ 옹호 논리를 펼친다. 미제냐 북한산이냐는 핵우산 원산지 강조만 다를 뿐, 두 쪽 주장의 빼대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한 극단의 행동이 반대쪽 극단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적대적 공생’의 논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북한의 극좌세력과 남한 극우세력의 관계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의 소행으로 판명되거나 추측되는 극단적인 폭력행위들이 남한 극우들의 정치적 생명을 많이 늘렸다는 것이 잘 기억할 수 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2001년 9월19일 제377호, 박노자)

수구세력은 최근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논란이 됐던 것처럼 미제 핵우산에 매달린다. 북한 핵실험 다음날 사설 ‘대한민국 지키는 대결단을’에서는 미국 핵우산만이 살길이란 주장을 폈다. “대한민국은 오늘 이후 재래식 군사력만으로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대치하게 됐다. 대한민국은 북핵 앞에 벌거벗은 무력한 처지다. 북한의 핵 공갈로부터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동맹국 미국의 핵우산밖에 없다.”

한나라당 전 대표인 이회창씨는 한국도 핵무장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전직 장군들은 미국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외치던 정부도 핵우산 신화를 부추겼다. 국방부는 38차 한-미 SCM 공동성명에 ‘확장 억지’ 개념이 들어간 것을 두고 미국의 핵우산이 강화됐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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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의 말처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확장 억지는 국방부의 말장난이었다. ‘밥을 먹었다’와 ‘식사를 했다’가 같은 뜻인 것처럼, 확장 억지와 핵우산은 같은 뜻이다. 미국은 핵무기로 전쟁을 억지한다는 핵 억지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본토에 대한 핵 억지와 함께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확장 억지’(extended deterrence) 전략을 펴고 있다. 국방부가 핵우산의 다른 이름일 뿐인 확장 억지를 들고 나와 미국의 핵우산이 강화됐다는 조삼모사식 설명을 해야 할 정도로 남한 사회에는 미제 핵우산에 대한 맹신이 뿌리 깊다.

50년 넘게 반공과 냉전, 군사주의, 숭미주의에 안주해온 수구세력이 북한 핵실험 뒤 미제 핵우산에 매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수구세력이 터잡은 이념과 발 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의 살길은 미제 핵우산’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주장이다.

북이 군사적 억지력 갖긴 어려워

그런데 진보진영의 민족해방 쪽 일부에서는 ‘미제 핵우산’은 민족 파멸의 불쏘시개로 비판하면서 북한제 ‘민족 핵우산’은 두둔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이라크와 달리 북한을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가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있으며,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북-미 간의 대결구도가 냉전시대 미-소 간의 대결구도와 비슷하게 전개됐으며, 결국 조지 부시 행정부가 굴복할 것이란 주장을 편다. 각종 토론회, 인터넷 게시판, 인터넷 언론 등에서 나타난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 핵무장은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감소시킨다’ ‘북한 핵보유가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한다’ ‘북 핵실험은 미국에 대응한 자위적 전쟁억제력이다’ ‘북 핵실험은 미국 패권 질서를 파탄시키고 자주, 평등, 친선, 협조의 다극화 질서를 만든다’ ‘동북아 핵 도미노 우려는 허상이다’ ‘북한 핵무장은 사회주의의 부활, 평화지향적인 강대국의 등장, 작은 거인의 등장이란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이들은 진보세력이 비핵화에 매몰돼 북한을 비판할 게 아니라, 미국의 핵전쟁 위협으로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선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반전평화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 핵무기 보유가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자위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슬프고 엽기적이게도 이들이 터잡은 논리는 수구세력의 핵우산 옹호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북한 핵이 우리 민족 전체의 안전을 담보해주는 민족공동의 핵우산이란 인식을 깔고 있다. 이들은 미제 핵우산은 결코 평화를 보장하지 않고 미국에 아부·굴종해야 하지만, 북한제 핵우산은 전쟁 위험을 상당 부분 감소시킨다고 본다. 다시 말해 (미국) 핵에는 (북한) 핵으로밖에 균형을 이룰 수 없으며 북한과 미국의 핵균형은 냉전을 유발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전쟁은 억제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억제력은 ‘적으로 하여금 무력 사용이나 전쟁을 개시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뜻한다. 이는 적에게 보복공격의 두려움을 주고 공격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무력 사용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점을 주지시킴으로써 확보된다. 이런 군사적 억지력을 확보하려면 북한은 소형 핵탄두 제조기술과 상대의 핵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아 여분의 핵무기로 보복 공격할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북한을 둘러싼 여건과 여력을 감안할 때 이런 군사적 능력을 완비할 가능성은 낮다. 북한 핵은 정치적 억제력으로 작동할 수는 있어도 군사적 억지력으로 온전한 의미를 갖긴 어렵다.

반전평화든 반핵반김이든…

냉전 때 서구의 국제정치학자와 관료집단, 군산복합체는 핵무기가 전쟁 가능성을 억지하는 평화적 구실을 수행한다는 핵무기주의(nuclearism)를 주장했다. 이들은 ‘핵에 의한 평화’란 명제를 강조하며 핵에 의한 전쟁 억지가 성공했다는 논리를 편다. 20세기 냉전 때 진보주의자들은 핵무기주의를 극단적 기술결정론과 비대해진 군사주의, 빈곤한 정치적 상상력의 결합이라고 비판했다. 90년대 초반까지 남한의 진보세력은 남한 땅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를 고발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줄곧 주장해왔다. 냉전시대 패권세력의 핵무기주의와 미국 핵무기를 비판하던 세력이 ‘북핵에 의한 한반도 평화’란 역설을 편다면 진보란 간판을 내려야 한다.

7천만 명의 생명을 담보로 핵무기로 서로 위협해서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발상은 미국이 하든, 북한이 하든, 남한이 하든 욕먹어야 한다. ‘반전평화’(민족해방세력)와 ‘반핵반김’(수구세력) 같은 주장에 갇혀 민족 핵우산이냐 미제 핵우산이냐는 외눈박이 인식을 벗어날 때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핵 폐기와 함께 미국 핵우산 제거에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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