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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아 보다 더한 세피아

등록 2006-10-13 00:00 수정 2020-05-03 04:24

내부 사소한 정보까지 비공개로 일관하는 국세청의 폐쇄적 문화… 파벌 싸움 심하지만 조직 결속력과 위계질서도 군대만큼이나 강해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공직사회의 뇌물수수 관행을 엿보기 위해 정부 각 부처에 설치돼 있는 뇌물 자진신고 통로인 클린신고센터를 취재할 때의 일이다. 몇 개 부처를 거쳐 전화로 국세청과 접촉하기에 이른 게 9월20일 오후였다.

클린신고센터가 설치돼 있는 감사관실에 전화를 걸어 센터의 개요와 신고 건수를 문의했더니 “그건 ‘청렴계’ 소관”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청렴계의 담당자에게 문의하자 “클린신고센터가 뭐냐?”며 의아스럽다는 반문이었다.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공무원행동강령’에 따른 뇌물 자진신고 기구라는 설명과 함께 “신고 건수를 비롯한 간단한 사실만 확인해달라”며 다시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번엔 “언론과 접촉할 때는 반드시 ‘공보계’를 거치도록 돼 있다”며 입을 닫았다. 공보계에 전화를 걸었더니 “정식으로 ‘취재요청서’를 보내면 담당자에게 보내 답변할지 말지,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다”고 했다. ‘간단한 한두 가지 사항 확인을 위해 정식 취재요청서까지 보내라고 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자, “그게 국정홍보처 방침이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말만 거듭했다. 그러면서 유니텔(unitel)에 개설돼 있는 이메일 주소를 불러줬다.

인사철만 되면 난무하는 ‘투서 문화’

‘정책홍보담당관’을 수신인으로 한 취재요청서를 이메일로 보낸 뒤 국정홍보처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방선규 국정홍보처 홍보협력단장은 “언론과 접촉할 때는 원칙적으로 홍보관리실을 경유하라는 것이고, 취재요청서를 받는다든가 하는 형식의 문제는 각 부처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르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방 단장은 “단순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는 상호 편의를 위해 실무 부서에서 바로 해줘도 된다”고 덧붙였다. 국세청 클린센터에 들어온 뇌물 자진신고 건수는 실무부서에서 확인할 만한 ‘단순 사실’의 범위를 넘는 것일까? 그렇다면, 취재요청서 없이 클린센터 관련 사항을 확인해준 다른 부처들은 국정홍보 지침을 어긴 것일까?

클린센터에 관한 간단한 사실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으려는 것에서 ‘경직적이고 폐쇄적인’ 국세청의 조직 문화를 떠올린다면 너무 지나친 일반화일까? 이메일로 보낸 취재요청서에 대해 국세청은 지금껏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정보 노출에 대한 국세청의 조심스런 태도는 업무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가피하다는 옹호론이 있다. 국세청을 오래 출입했던 한 일간지 기자는 “검찰에선 가끔 수사 정보를 흘려 여론을 떠보는 일이 있지만, 국세청에선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해당 기업이 바로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정보 노출을) 조심하는 태도가 몸에 밴 것 같다”고 했다. 국세청 손에 쥐어진 세무 정보의 휘발성을 감안할 때 일리 있는 설명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국세청 본연의 업무와 무관한 분야에서까지 불투명한 비공개 원칙을 지키는 자세까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크게는 납세나 탈세 정보에서 작게는 지원부서의 사소한 정보까지 비공개로 일관하는 국세청의 자폐적 태도는 ‘바깥 세상’과의 소통 미숙을 넘어 조직의 내부 소통에서도 잦은 고장을 일으킨다. 이는 인사철만 되면, 난무하는 ‘투서’로 불거진다. 경찰만큼이나 투서가 많은 조직이 국세청이라는 게 기자 사회에선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주성 전 국세청장이 임기(2년)를 다 채우지 못하고 1년3개월 만인 올 6월 갑자기 사퇴한 것도 투서 문제와 얽혀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게 돌았다. 정기 인사철을 맞은 국세청 내부의 파벌싸움 과정에서 청와대와 재정경제부 등에 비리 관련 투서가 접수되면서 청장의 ‘중도하차’ 사태를 몰고 왔다는 얘기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폐쇄적이고 내부 암투가 심하다고 알려진 국세청 조직의 내부 결속력 또한 대단히 강하다는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점이다. 내부 파벌싸움이 심하다는 것과 조직 결속력이 강하다는 점은 언뜻 모순되는 것 같지만, 국세청의 조직 문화를 나란히 상징하는 말로 굳어져 있다.

옷 벗으면 확실하게 챙겨준다

업무 관계로 재경부와 국세청을 두루 접촉하는 국회 재정경제위 소속의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내부적인 단결이나 조직 충성도에서 국세청이 ‘모피아’(재경부+마피아)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쉽게 느낄 수 있다”며 “군대만큼 강하다”고 평가했다. “내부적인 파벌싸움을 벌이다가도 일단 조직의 ‘짱’(청장)이 정해지고 나면, ‘짱’이 최대한 좋은 평가를 받고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일치단결해 많은 ‘작업’을 한다. 같은 기수가 청장이 되면 동기들이 죄다 ‘옷 벗고’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재경부 세제실장을 지낸 이종규 코스콤 대표는 “내부 결속이 강한 걸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국세청은 정책을 입안하고 새 아이디어를 짜내는 재경부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정책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집행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정해진 법규와 매뉴얼(업무처리 지침)대로 집행하는 기관에선 토론보다는 위계질서가 중요하다”며 “이는 국세청만의 특성이라기보다 시·군·구청처럼 집행 기관 일반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다만, 국세청의 경우 부하 직원이 많은 조직인데다 전국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좀더 두드러져 보일 뿐이라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국회 쪽에서 보는 시각과 차이를 띠긴 해도 위계질서가 강한 군대 같은 조직이란 지점에선 대체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투서 문화로 상징되는 파벌싸움의 횡행과 내부 결속은 어떻게 양립 가능한 것일까?

국세청을 출입하고 있는 한 일간지 기자는 “(국세청에서) 옷 벗고 나간 다음에 세무사를 하더라도 자기 사람들, 선후배들을 끝까지 챙겨주는 관행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리 사고를 낸 당사자의 옷은 벗기더라도 국세청을 떠난 뒤 세무사 개업을 하면 확실하게 챙겨준다. 그런 사례들을 보고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직을 보호하고 조직에 충성하려는 문화가 싹트게 되는 것 같다.” 조직 보호에 따른 국세청 전반의 이익(또는 이권)이 인사철 때 생긴 내부 알력의 틈을 자연스럽게 봉합하게 된다는 얘기다.

국세청의 강한 내부 결속을 ‘2등론’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행정고시 출신이 주류를 이루는 재경부와 달리 하위직급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세청 조직은 중앙부처보다 한 덩어리로 뭉칠 필요성을 훨씬 더 절감한다는 것이다. ‘경기고’보다 ‘경북고’ 출신이, ‘서울대’보다 ‘고려대’ 출신이 더 잘 뭉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국세청의 내부 결속을 업무 특성으로만 볼 수 없을 듯하다.

업무와 권한은 점점 막강해질 듯

정치권뿐 아니라 기업, 개인에게도 국세청은 어느 기관보다 ‘힘세고 무서운 조직’으로 여겨진다. 국가정보원, 검찰보다 더 정보가 많다는 점에서다. 4대 보험의 통합 징수 방침 등으로 국세청의 업무와 힘은 앞으로 점점 커질 분위기다. 탈규제로 정부와 정치권의 힘이 약해지는 추세와는 반대로 점점 더 권력기관화할 개연성이 높다. 국세청이 점점 세지는 힘에 걸맞은 소통의 조직 문화를 갖추지 못하면 ‘모피아’보다 더한 ‘세피아’(국세청+마피아)라는 소리를 들을 지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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