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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사춘기, 이유없는 반항

등록 2006-08-24 00:00 수정 2020-05-03 04:24

대표적인 비혼집단, 동성애자 네 명이 말하는 결혼과 관계의 고민들… 뭔가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혼자 늙어가는 것에 대한 공포 느껴

▣ 정리 이혜민 인턴기자 taormina@hanmail.net

은 30대 중반의 동성애자 네 명의 수다회를 열었다. 동성애자는 대표적인 비혼집단이다. 그들에게 서른다섯 무렵의 동성애자가 겪는 결혼과 관계를 둘러싼 고민을 들어보았다.

8월15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수다회에는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인 한채윤(35)씨와 이미선(36)씨, 남성 동성애자(게이)인 최준원(33)씨와 이민철(35)씨가 참석했다. 한채윤씨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를 맡고 있다. 최준원, 이민철, 이미선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성소수자인권운동에도 함께하고 있다. 때때로 이민철씨가 사회 구실을 했지만, 대화는 수다처럼 자연스레 이어졌다.

가족모임은 ‘성토대회’

민철=미선님은 직장생활 몇 년 했나요.

미선=꾸준히 한 게 5년이에요. 26살부터 28살까지는 사서를 했고요.

준원=첫 직장에서 2년, 프리랜서로 2년 반, 지금 이 직장에서 1년 반이니 저도 5년이네요.

채윤=활동한 지 10년이 됐으니까 마흔이 넘은 줄 알아요. (웃음)

민철=30대 초반까지는 ‘흘리는’(동성애자라는 낌새) 표시가 나지 않으면 이성애자 틈에서 살 수 있었는데, 30대 중반에는 비혼이 줄어들어서 곤란한 점이 생기지 않나요.

미선=예전에 누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결혼을 안 했냐고 했을 때 기분이 무척 나빴던 거 빼고는 불편한 게 없었어요. 근데 최근에 애인 어머니가 알아챈 거예요. 애인 어머니 친구분이 “너희 그렇게 (동성연애하면서) 살아”라고 해서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준원=저는 교사인데, 애들이 “선생님 혹시 게이 아니에요?”라고 물어보면 예쁜 고모나 이모를 소개해달라고 하며 웃지만 놀라죠. 노친네들은 게이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데 애들은 인식하나 봐요.

채윤=34살이 되니 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하지 않아요. 잘못 보내면 구박받을 수 있잖아요.

민철=남자는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인지 끈질기게 물어요. 친척 결혼식에 가면 “네가 결혼하는 줄 알았다”며 다그치죠. 친척들 만나는 것만큼 불편한 게 없어요.

준원=전 지금이 한창 피크예요. 피치 못할 자리에 가면 저의 ‘성토대회’가 돼버려요. 부모님 환갑 때가 절정이었어요. 아버지 환갑날에 아버지는 우시고. (웃음)

민철=이태원 바에 가는 사람들은 결혼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아는 분이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고 있어요. 주변에도 결혼한 사람이 좀 있죠?

채윤=레즈비언은 모임에서 탈퇴하고 간간이 소식 전하다가 6개월 정도 지나면 결혼하는 게 순서처럼 돼버렸거든요. 그래서 게이와 달리 레즈비언은 결혼 이후 얘기를 들어볼 기회가 없어요.

미선=저는 바이섹슈얼인 것 같은데 아이에 대한 욕구가 많아서 그런지 아이와 엄마가 닮은 모습을 보면 조금 고민돼요.

채윤=레즈비언은 정말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결혼을 고민하기도 해요. 마흔 넘어서 여자 둘이 인생을 책임지는 게 어려우니까.

준원=예전에는 오래 만나는 게 한심해 보였는데 이제는 좋게 보여요. 실제로 35살 넘어가면 한 애인이랑 오래 만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죠.

채윤=이른바 레즈계에서 날렸던 친구도 서른다섯쯤 되면 인생의 연륜 때문인지 기가 죽어서인지 한 사람과 오래 만나고 싶어해요. 30대 중반은 20대 열정으로 살기에는 차갑지만 정으로 대충 맞추며 살기에는 뜨거운 나이예요.

나이 들수록 친구와 대화하기도 어려워

미선=심리학책을 보니까 30대 중반은 뭔가를 생산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대요. 이성애자 친구들은 아이를 낳았고, 잘나가는 친구들은 뭔가를 이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죠.

민철=저도 직장생활을 10년 했으니까 멀쩡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쉬고 싶은데 그렇지도 못하고. 가족이나 주변의 눈치를 보는 거죠, 뭐.

준원=무슨 영화를 보기 위해 여기 있겠어요. 저는 길어야 학교에서 10년 버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미선=여자는 마흔이면 다 나와야 하는데 그 나이가 되면 사업을 시작하기 어려우니까 힘이 남았을 때 나오는 친구들이 많아요. 저도 내 사업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준원=20대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게이 친구들만 만나요. 대화가 되니까.

미선=저도 도서관에서 동성애 관련 책을 보신 선생님이 이런 책이 왜 여기 있냐고 했을 때 이질감을 느꼈어요.

준원=예전 직장에서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학교라 이성애자인 척해야 한다는 데 억압을 느껴요. “너 왜 결혼 안 해?”라고 물으면 “게이거든요”라고 확 말해버리고 싶지만 말하면 바로 죽음이죠.

채윤=가족을 만나기 이틀 전부터 말할 내용을 싹 검열해요. 검열 속도가 점점 빨라졌죠.

민철=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혼자 늙어가는 것에 공포를 느껴요. 흔히 동남아를 서양 게이들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내 무덤은 어디일까 고민도 돼죠.

준원=‘꺾어진 칠십’이죠, 뭐. 얼마 전에 서른 후반 된 아빠와 아이가 커플티를 입고 수영장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어요. 예전 같으면 그냥 웃고 넘겼을 텐데.

채윤=조카를 키워서 그런 환상은 없는데 (웃음) 다만 치매에 대한 공포는 있죠.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걱정돼요. 이성애자 솔로들도 그럴 거예요. 이런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차원으로 논의해야 해요. 미혼 여자가 35살 미만이면 대출도 안 해줘요.

민철=공동체 같은 자구책을 마련하나요?

채윤=20대 때는 우리끼리 같이 사는 걸 꿈꿨어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같이 지내다 바람나면 문제가 더 복잡해져요. 실제로 35살 넘은 커플들은 떨어져나가 살려고 해요.

준원=‘친구사이’는 사실상 우정의 공동체인데요. 길게는 10년씩 친구로 지내고,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공동체 성격이 강하죠.

채윤=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와 대화하는 것도 어려워요. 어느 정도까지 얘기를 잘했던 친구인데 내 마음을 잘 몰라주고 뒤통수치는 일도 많으니까요.

준원=너무 익숙해서 친구가 어떤 대답을 할지 뻔하니까 말을 안 하는 거죠.

채윤=친해지기도 힘들고 “(결혼) 왜 안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할 말도 없죠. 결혼을 얘기하지 않으면 얘기가 안 되는 뭔가가 있어요.

내가 바랬던 30대인가

준원=한국 사회에서는 사적인 것을 공유해야 친해진다고 느끼니까요.

민철=나에 대해서 뭔가를 설명하려면 게이나 레즈비언이라는 게 많이 중요한데, 그걸 빼놓고 얘기해야 하니까 소통이 어렵죠.

준원=이성애자로 연기하는 게 점점 싫어요. 30대 넘어도 아웃팅 안 하고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민철=30대 중반의 동성애자들은 ‘인생은 즐기는 것이다’는 사실을 포기하기 더욱 어렵죠. 자식도 없고 하니까. 그래서 한편으론 젊게 살기도 하지만 버겁기도 하죠. 힘이 달리죠.

준원=20대 때는 개인을 인정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라는 노래가 너무나 좋았던 건 서른이 넘으면 커밍아웃하고 안정을 누리고 살 줄 알았는데 아직도 못했죠. 20대에 ‘객기’로라도 말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게이 그런 걸 떠나서 20대 때 바랐던 30대가 아닌 건 확실해요.

채윤=제2의 사춘기란 말이 맞아요. 인생 적당히 살자는 생각도 들고. 살아온 게 철부지 같기도 하고. 고민의 속도를 늦추면 속물 되기 쉬울 것 같아요. 오늘의 10만원을 마흔 이후에 쓰려는 마음도 들고요. 25살에는 왜 돈맛을 몰랐을까. 35살부터 냉정하게 나를 챙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죠.

미선=심리 공부를 하는 건 나의 심리가 궁금해서예요. 저도 뭔가를 생산해야겠어요. 아이가 아니라 개인적인 꿈을요. 내 꿈이 뭔지 자꾸 잊는 것 같다는 일기를 어제 썼는데 지금까지는 못 살았지만 이 과도기를 잘 넘기려고요.

민철=옛날보다 오히려 이유 없는 반항이 심해졌어요. 내가 사는 모양새, 내가 버는 월급, 나를 스치는 사람까지 짜증스럽고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게이나 레즈비언에게는 인생의 진도표가 없으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

준원=자신에 대해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요. 20대 때, 30대 때 해결된다고 믿었지만 30대인 지금에서 보면 그렇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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