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에 땅 빼앗기고 10년 뒤에야 ‘껌값’ 받은 동두천 원소유주들… 정부가 지차체 매입권 인정하는 조항 만들면서 되돌려 받을 길 사라져
▣ 동두천=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어성운(59·경기 동두천시 탑동동)씨는 ‘장군의 후손’이다. 그의 17대조 할아버지는 1456년 무과에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뒤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예성군에 봉해진 어유소(1434~89) 장군이다.

장군은 1488년 조선 성종과 함께 동두천 어등산(지금의 칠성산)에서 사냥하다 화살로 솔개를 맞혀 떨어뜨린 공으로 동두천 일대 땅을 하사받았고, 그때 일을 기리는 경계석과 장군 사당은 지금까지 남아 향토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평당 아이스크림 두개 값
가문의 평온이 깨진 것은 미군의 동두천 주둔이 시작되면서부터다. 1951년 7월, 미 보병 24사단이 동두천에 사병 휴양소를 만들면서 앞으로 반세기 넘게 이어질 ‘동두천의 비극’이 시작됐다. 동두천시가 지난 1998년 펴낸 를 보면, “1951년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자 국제연합(UN) 경찰이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고 그 터에 미군 부대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불행은 물리적인 구체성으로 어씨 가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57년 숨을 거둔 그의 선친은 총칼을 앞세운 한국군에 쫓겨 대대손손 이어온 양주군 동두천읍 광암리 땅 2만1840평을 징발당했다. ‘동두천읍 광암리’라 불리던 곳은 하루아침에 미군기지 ‘캠프 호비’가 됐다. 그는 “선친이 일찍 작고해 징발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전쟁 같은 1950~60년대를 아슬아슬하게 돌파해온 한국 정부가 미군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자국민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국방부가 땅을 징발해간 날짜는 1954년 1월14일이고 ‘징발 증명서’가 발급된 날짜는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68년 2월19일이다. 그는 꼬깃해진 그 시절 징발 증명서를 38년째 보관하고 있다. 징발된 땅에는 선조 어유소 장군 묘소가 포함돼 이전까지는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지만, 9·11 테러 이후 미군 보안규정이 강화돼 어씨는 기지 주변을 안타깝게 맴돌 뿐이다.
땅을 빼앗아간 국방부가 어씨에게 “보상금을 주겠다”고 연락해온 것은 증명서가 발급된 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1976년 9월30일, 국방부 장관이 보내온 공문을 보면 “귀하의 재산에 대하여는 군사 목적에 사용 여부를 조사 중에 있으므로, ‘조사 결과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면 법령에 따라 동 토지는 매수될 것”이라고 적혀 있다. 자신이 징발한 땅이 어딘지도 모르던 국방부는 그해 10월12일 두 번째 공문에서 “조속한 기일 내에 땅을 매수하겠다”며 잘못을 시인했다. 보상이 이뤄진 날짜는 다시 1년3개월이 지난 1978년 1월20일이다. 국방부가 책정한 보상금은 665만2천원이었는데, 그나마 현금이 아닌 1년 거치 10년 분할 상환되는 채권이었다. 한 평당 312원이면 당시 150원 하던 브라보콘 2개를 살 수 있는 돈인데, 말 그대로 ‘껌값’이라 부를 만하다. 어씨는 “하도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고 말했다.

보상은 이뤄졌지만, 어씨가 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방부 담당자가 징발이 해지되면 법정 금리를 계산해 원소유주에게 되팔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어씨는 미군기지 반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실제, ‘징발재산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20조에서 “땅이 군사상 필요 없게 되면 국가는 땅의 원래 주인에게 되팔아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보상 전 외지인들에게 넘어가
그렇지만 어씨는 이제 그만 꿈을 접어야 할 것 같다. 정부가 2006년 3월3일 동두천 등 미군기지를 돌려받는 지방자치단체를 지원할 목적으로 ‘주한미군 공여구역 주변지역 등 지원특별법’을 만들면서 “지자체가 공공사업 목적으로 개발계획을 세운 경우 우선 매입권을 갖는다”는 취지의 조항을 삽입했기 때문이다. 동두천시는 2011년 이후에 반환될 예정인 캠프 호비 터에 골프장 등을 지을 계획을 잡아두고 있다. 골프장을 만드는 게 공공 목적으로 땅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막강한 지자체의 권한 앞에서 어씨의 하소연은 무기력해 보였다.
지자체가 땅을 우선 매입하지 않더라도 원소유자가 땅을 되찾는 길은 ‘산 넘고 물 건너기’보다 어렵다. 안병철(75·경기 동두천시 지행동)씨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안씨는 2000년 10월 국방부로부터 동두천시 지행동 239 일대 430여 평을 “되사가라”는 공문을 받았다. 국방부의 제시 가격은 3900만원이었지만, 그는 땅을 포기해야 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씨는 “빼앗아갈 때는 맘대로 헐값에 가져가더니, 지금 와 땅 임자를 상대로 제값 받고 팔려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진짜 얘기는 이제부터다. 안씨가 포기한 땅을 매입(2005년 12월27일 등기)한 사람은 전문 부동산 투기업체 ㅇ사의 손아무개(39)씨였다. 안씨는 모르고 있었지만 국방부가 징발해간 땅은 그 옆의 안씨 소유의 1600여 평짜리 밭과 필지 분할이 안 된 채 공유자 지분으로 등기돼 있었다. 안씨는 노후를 위해 땅을 팔려고 했지만, 분할 등기된 땅을 팔아치우려면 공동 명의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알박기’ 모드로 돌변한 손씨가 안씨의 요구를 거부했다. 안씨는 변호사 비용으로 400여만원을 날린 채 사업가 권아무개(61)씨에게 평당 30만원에 땅을 팔았고, 손씨도 같은 사람에게 같은 땅을 평당 40만원에 팔았다. 손씨는 1년 남짓한 시간에 재산을 4배로 불리는 도박에 성공한 셈이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국방부의 보상이 이뤄지기 직전인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상당수 미군 공여지의 소유권이 동두천 토박이들로부터 외지인들에게 넘어갔다는 점이다. 이 1965년부터 77년 3월까지 동두천시 토지 매매 기록을 보여주는 ‘옛 토지대장’을 분석한 결과, ‘캠프 캐슬’의 일부인 동두천동 35×-1번지는 이곳 토박이 ㄱ씨의 땅이었다가 66년 12월 인천 부평동에 사는 ㄱ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293번지는 창리에 살던 장아무개의 땅이었다가 63년 이후 5번이나 명의가 변경된 뒤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사는 박아무개씨의 소유가 됐다가 국방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 경우 땅을 되살 권리를 갖는 원소유자는 토박이 장씨가 아닌 서울 사람 박씨가 된다. 국방부는 70년 7월20일 땅임자들에게 보낸 ‘징발재산 정리에 관한 안내’라는 문서에서 “피징발자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중간에 개입해야 연내에 토지대금을 받을 수 있다는 허언을 유포하는 자가 많다”며 “징발 재산을 제3자에게 팔면 불이익을 자초하는 꼴이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시민연대, 원소유주 찾기 운동 나서
강홍구 동두천시민연대 대표는 “되돌려받는 미군기지에는 애초 원통하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한이 서려 있다“며 “이들을 배제한 채 공여지 문제를 다뤄선 안 된다”고 말했다. 동두천시민연대는 2004년 9월부터 미군 공여지 원소유주 찾기 운동에 나서고 있지만 실적은 미미한 편이다. 개발 광풍에 눈먼 정부와 지자체에 그때 그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려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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