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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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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을 키우는 민주주의

등록 2006-08-04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미국이 중동에 ‘민주주의 확산’ 깃발 들자 이슬람주의 세력 확대… 무슬림형제단 등 ‘풀뿌리 단체’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에 다가서</font>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9·11 동시테러 뒤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과 ‘민주주의 확산’을 중동 정책의 두 축으로 삼았다.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 소탕을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벌이는 한편 정치적 자유 확대와 민주적 제도 확산을 통해 중동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중동을 둘러싼 국제정치 현실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 목표를 철저히 배반하고 있다.

친미 권위주의정권이 흔들린다

2001년 10월 ‘항구적 자유’ 작전으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낸 지 5년째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라덴의 행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괴멸했다던 탈레반이 세력을 회복한 지는 이미 오래다. 아프간에 이어 침공한 이라크에선 점령군에 대한 반감과 종족 간의 분열로 핏빛 낭자한 내전이 불을 품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지난 7월25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치안’ 유지를 위해 미군을 증강 배치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중동 전역에서 반미 정서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궈지면서, 곳곳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이 정권 획득에 다가서고 있다. 미 국무부가 테러단체로 낙인찍은 하마스가 올 초 민주적 선거를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접수’한 것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아랍 전역에서 이미 하나의 ‘경향성’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게 올바른 분석일 터이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헤즈볼라는 아랍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험주의’를 즉각 중단하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급증하던 지난 7월14일 이집트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친미 트리오’가 헤즈볼라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 세 나라는 대통령제(이집트)·입헌군주제(요르단)·절대왕정(사우디)으로 정치 체제는 제각각이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권위주의 정권’이 집권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랜 기간 부패한 정권에 시달려온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해 있는 점도 이 세 나라의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각각 무슬림형제단과 이슬람행동전선(IAF)이란 정치조직이 대안세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거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잘 알려진 대로 알카에다의 ‘발상지’다. 세 나라 모두 ‘테러와의 전쟁’에선 미국의 입장을 철저히 ‘이해·존중’하면서도, ‘민주주의 확산’에는 극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이 헤즈볼라의 ‘모험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것은 기실 빠르게 정치 세력화하고 있는 자기 내부의 이슬람주의 진영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국내용’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슬람주의 진영이 아랍권에서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배경에는 이들 단체의 ‘풀뿌리성’이 버티고 있다. 지난해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민족민주당(NDP)의 온갖 위협과 선거 부정에도, 전체 의석의 20%를 차지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풀뿌리 활동에 기반해 선거를 통해 권력에 다가서고 있는 이슬람주의 진영의 전형을 보여준다.

1928년 3월 이슬람 학자 하산 바나가 수에즈운하 노동자 6명과 함께 창설한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권 9개 나라에 지부를 두고 있는 범이슬람 조직으로, 이집트 카이로에 본부를 두고 있다. 초기엔 “신은 우리의 목표이며, 코란은 우리의 헌법”이란 구호를 내거는 등 종교적 색채가 짙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치·사회 운동단체의 성격을 강화해왔다. 이 단체는 1970년대 초반 일찌감치 무장투쟁 노선을 공식적으로 접었다.

후세인의 자리를 아야톨라들이?

1954년 일부 회원들이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가말 압델 나세르 장군 암살 사건에 연루된 이후 줄곧 ‘반합법 조직’으로 묶여 있는 형제단은 요즘도 툭하면 무바라크 정권의 ‘분풀이’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이슬람식 개혁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형제단은 명실상부한 이집트 최대 야권 세력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이슬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자선활동과 빈민구제 사업을 통해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 격인 하마스와 레바논 남부를 기반으로 한 헤즈볼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형제단은 현재 이집트 전역에서 20여 곳의 빈민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 각급 학교와 고아원, 한부모 가정 보호시설을 전국 각지에 열고 있으며, 실업자를 위한 직업훈련도 병행하는 등 소외된 가난한 이집트인들의 삶에 버팀목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정치적 지평을 넓혀온 형제단은 지난해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시킨 후보들의 선전 속에 의석 수를 기존의 15석에서 88석으로 늘였다. 특히 수백 명의 회원들이 체포되는 등 정권 차원의 선거 방해 행태가 극심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꽤 많은 중동전문가들이 형제단을 ‘포스트 무바라크’ 시대 이집트를 이끌어갈 대안세력으로 지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때문인지 무바라크 정권이 선거 이후 형제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앞서 상당수 중동전문가들은 “사담 후세인이 떠난 빈 자리를 아야톨라(이슬람 지도자)들이 메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지금 이라크에서 ‘민주적이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지면 반미 성향의 이슬람 세력이 정권을 잡을 것이란 점에 이견을 다는 이들은 없다. 이란과 이라크,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중동 전역에서 이슬람주의 진영의 집권 가능성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고민’이 있다. 미 의회조사국(CRS)은 지난 6월15일 ‘미국의 중동 민주주의 촉진정책: 이슬람주의자 딜레마’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은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이라크 점령, 대규모 미군의 페르시아만 연안국가 주둔 등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해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고 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라크에서 시아파 이슬람 정당이 부상하고 팔레스타인에서 ‘근본주의’ 세력인 하마스가 자치정부를 장악한 것은, 미국이 중동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강조하다 의도치 않게 강경 이슬람 세력을 강화한 꼴이 됐다고 말한다.”

어떤 ‘새로운 중동’인가

벌써 해결책을 찾기라도 한 걸까? 무바라크 정권의 무슬림형제단 탄압이 이어지는 가운데 하마스 정권 붕괴 시나리오가 나돌더니, 급기야 헤즈볼라를 겨냥해 이스라엘이 대규모 군사행동을 단행했다. 그러곤 미국이 중동 질서 재편을 말하기 시작한다. 레바논 사태 해결을 위해 중동으로 날아간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베이루트의 참상을 바라보며 “새로운 중동의 탄생을 위한 불가피한 산고”라고 주장했다. 하긴 미국이 중동에서 친미 권위주의 정권과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원을 지속한다면, 조만간 ‘새로운 중동’의 탄생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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