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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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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색 축구 광장의 탄생

등록 2006-06-27 00:00 수정 2020-05-03 04:24

날마다 주인이 바뀌고 만국의 축구팬들이 집결하는 독일의 응원광장들… 약팀에겐 즉석 다국적 응원부대 결성, 프랑스팬들은 참하고 조신하더라

▣ 독일 프랑크푸르트·라이프치히·하노버·베를린=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만국의 축구팬이여 단결하라!”

그렇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기도 어려운데, 만국의 축구팬들이 단결하기란 불가능하다. 국가 대항전으로 치러지는 월드컵에서 국적을 넘어선 축구팬들의 국제 연대란 난망한 일이다. 솔직히 싸우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죽하면 2006 독일월드컵 슬로건이 ‘친구를 만드는 시간’(A time to make friends)이겠는가? ‘친구를 만드는 시간’을 이루어야 할 이상으로 정할 만큼, 팬들끼리 친구가 되기가 어렵다는 역설을 담은 슬로건 아니겠는가?

세르비아 응원단, 네골째부턴 환호성

만국의 축구팬들이 단결하지는 못해도, 만국의 축구팬들이 모이는 장소가 독일에는 있다. 만국의 팬들은 월드컵이 열리는 독일 도시마다 마련된 응원 광장에 모여 응원을 펼친다.

이름하여 ‘피파 팬 페스트’(FIFA Fan Fest). 그러니까 팬들이 모여 벌이는 축제(Festival)이다. 말하자면 서울시청 앞 응원 광장을 월드컵 개최 도시마다 만들어놓은 것이다. 한국의 서울광장은 한국을 응원하는 붉은 악마들이 주인이었다면, 독일의 응원 광장은 날마다 주인이 바뀐다. 중계 시간대가 겹치는 경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경기를 중계하는 응원 광장에는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만국의 팬들이 모여든다. 월드컵 입장권은 없지만 응원의 열정은 넘치는 자, 광장으로 집결한다. 만국의 축구팬들이여, 하나로 단결하지는 못해도 모여서 응원하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마인 아레나’(Mein Arena)는 아름다웠다. 마인 아레나는 프랑크푸르트를 관통하는 마인 가운데 대형 브라운관을 설치해두고 양쪽 강변에서 경기를 볼 수 있도록 만든 야외 응원 광장이다. 아예 응원 광장에 경기장을 뜻하는 ‘아레나’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강폭이 넓지 않은 마인강의 지형을 활용한 자연친화적인 마인 아레나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경기장의 흥분 못지않다. 오히려 경기장보다 좋은 점도 많다. 우선 경기장에서는 하루 한 경기밖에 못 보지만, 응원 광장에서는 하루 세 경기를 볼 수 있다. 그것도 공짜로. 더구나 자리를 잘 잡으면, 강변의 나무 그늘 아래 드러누워 경기를 보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 같은 조 네 팀의 두 경기가 동시에 벌어진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 전까지, 경기는 독일 시각으로 오후 3시, 6시, 9시에 시작됐다. 경기 사이 1시간씩 비는 시간이 있어서, 배가 고프면 비는 시간에 밥을 먹고 와도 된다. 자국 경기가 끝나면 다음 경기를 치르는 다른 나라 응원단에 자리를 비켜주는 미덕을 발휘해도 좋다. 취재진은 쾰른, 프랑크푸르트, 라이프치히, 하노버, 베를린의 응원 광장을 돌며 풍경을 취재했다.

6월16일 프랑크푸르트 마인 아레나, ‘죽음의 조’로 불리는 C조의 두 번째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먼저 오후 3시, 아르헨티나와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경기가 열렸다. 아무래도 유럽 국가인 세르비아 응원단이 많았다. 유럽 국가들은 이렇게 독일월드컵에서 ‘홈 어드밴티지’를 누리고 있다. 홈 어드밴티지가 있음에도, 경기는 아르헨티나가 압도했다. 전반에만 3 대 0으로 아르헨티나가 앞서자 기세등등하던 세르비아 응원단이 잠잠해졌다. 혹시나 덩치가 산만 한 세르비아 청년들이 훌리건으로 변하지 않을까 무서워 동양의 아저씨는 세르비아에 골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후반에도 세르비아는 잇따라 골을 허용했다. 하지만 4 대 0이 되자 세르비아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5 대 0, 6 대 0 아르헨티나가 골을 넣을 때마다 마치 세르비아가 골을 넣은 듯 환호했다. 자포자기한 세르비아 응원단의 ‘퍼포먼스’였다. 소심한 아저씨는 깨달았다. 아, 여기는 응원 열기가 너무 뜨겁지 않아서 좋구나. 승부에 목숨 걸지 않는 응원의 적정 온도가 마음에 들었다. 지나친 흥분은 건강에 해로운 법이다. 이처럼 응원 광장에는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지만, 없어야 할 것은 없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처럼.

마인강에선 일상도 계속된다

다음은 코트디부아르와 네덜란드의 경기. 세르비아 응원단이 빠지고 코트디부아르 응원단이 들어왔다. 마인 아레나를 나가는 세르비아 아저씨들이 들어오는 코트디부아르 응원단을 응원한다. 아르헨티나, 네덜란드에 맞서야 하는 약자들 사이의 연대다. 이날 코트디부아르와 네덜란드의 경기가 치러진 슈투트가르트의 경기장은 온통 오렌지 응원단의 함성으로 가득했지만, 마인 아레나는 달랐다. 네덜란드 응원단을 제외한 다국적 관중이 한마음으로 코트디부아르를 응원했다.

1 대 2로 뒤지던 코트디부아르가 동점 기회를 놓칠 때마다 강변에 아쉬운 탄성이 퍼졌다. 아르헨티나 응원단도 발을 구르는 아르헨티나식 응원으로 코트디부아르를 응원했다.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은 동양인 청년들도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홍콩에서 온 청년들은 리오넬 메시를 좋아해서 아르헨티나를 응원한다고 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경기가 끝나자 코트디부아르 응원단으로 돌변했다. 청년들은 중국어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외치면서 코트디부아르 응원단이 무색하게 코트디부아르를 응원했다. 이렇게 응원 광장에는 다국적 응원단이 약한 나라를 응원하는 ‘국제 연대’가 이뤄지기도 한다. 약자를 응원하는 인지상정 혹은 축구팬들의 인터내셔널.

마인 아레나에서는 일상의 풍경도 보인다. 마인강 한가운데 설치된 대형 브라운관 앞으로 화물선이 지나가고, 조정 연습도 그치지 않는다. 독일인의 일상이 월드컵에 맞추어 조직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마인 아레나가 내려다보이는 마인강 다리 위로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지나갔다. 그들을 보면서 ‘남들이 하는 경기를 보기보다 자신이 하는 달리기를 즐기는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축구에 열광해도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응원 광장 주변에는 정치적 풍경도 보였다. 이란 국기를 들고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행진을 벌이는 청년들도 보였다. 또 ‘축구팬들의 인터내셔널’(Football supporters International)이 붙여놓은 스티커도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티켓은 후원 기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팬들을 위한 것’(Tikets are for fans not sponsors)이라고 주장했다. 경기장 입장권이 후원 기업에 배정되는 관행을 비판하는 일종의 축구 시민운동인 셈이다.

응원으로 만난 한국-프랑스 부부

라이프치히의 야외 응원은 아우구스투스 광장에서 벌어진다. 한국 경기가 열린 18일 오전, 아우구스투스 광장 주변은 붉은색이 우세했다. 부지런한 한국인들은 일찍부터 거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오후의 거리는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경기 시간이 다가올수록 ‘뢰종 레블뢰’라고 불리는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프랑스 응원단이 많아졌다.

그래도 붉은 악마는 기죽지 않았다. 파란 옷이 “알레~ 레블뢰”(Allez Les bleus)를 외치면, 붉은 옷은 “대~한민국”으로 응답했다. 두 나라의 응원전이 치열한 가운데, 태극기를 몸에 두른 여성과 레블뢰 유니폼을 입은 남성이 손을 꼭 잡고 거리를 누볐다. 서른 살 동갑내기인 허정윤씨와 안토니 오방은 지난해 결혼한 한국, 프랑스 커플이다. 부부는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를 보러 파리에서 날아왔다. 오방은 2002 월드컵을 보러 한국에 오면서 한국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고, 2003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허씨를 만나 결혼했다. 부인인 허씨는 “시댁은 한국을 응원하고, 친정은 프랑스를 응원해요. 누가 이겨도 우리는 이기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팬들이 친구가 되기는 어렵지만, 팬들이 가끔씩 사랑에 빠지기는 한다. 이날 한국 경기에 앞서 브라질과 오스트레일리아 경기가 열렸다. 아우구스투스 광장 주변에는 노란색 브라질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월드컵 기간 동안 독일 어디에나 브라질은 있었다. 브라질 사람이 아니라도 브라질 유니폼을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날 라이프치히에도 히잡을 쓴 여성까지 브라질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축구의 제국 브라질 응원단은 다국적 응원단으로 구성된다. 지금 지구촌에는 전 지구인의 브라질 응원단화가 진행되고 있다.

혹시나 사고가 터지면 어쩌나, 소심증이 도졌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기를 앞두고, 소심한 아저씨는 ‘쪽수’에서 밀리는 한국 응원단이 경기가 끝나고 프랑스 응원단에 ‘한 대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역시나 기우였다. 프랑스 응원단은 어찌나 매너가 좋은지, 프랑스 처지에서는 아쉬운 무승부였는데도 경기가 끝나자 “대~한민국”을 배워서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을 원망하기보다는 프랑스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독일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잉글랜드 응원단이 언제나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맥주병을 들고 다녀서 ‘무섭게’ 보였다면, 프랑스 응원단은 참으로 참하고 조신해 보였다.

20일에는 베를린으로 향했다. 마침 독일과 에콰도르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데부르크문부터 역사적 승전을 기념하는 6월17일 거리를 따라 늘어선 인파는 끝이 없었다. 가끔은 “도이칠란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 역사의 기억과 겹치면서 무섭게 들리기도 했다.

경기는 독일의 승리로 끝났고, 독일은 전승으로 16강에 진출했다. 군중은 “피날레 베를린!”(Finale Berlin)을 외치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결승전으로 가자는 “피날레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슬로건이었다. 이날 독일 군중 사이에서 ‘개기는’ 폴란드 청년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동상에 올라가 “폴스카!”를 외쳤다. 독일과 폴란드의 경기가 열린 14일 응원단이 충돌했다는 뉴스가 들은 터라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 충돌은 없었다. 17일 폴란드 경기가 열린 하노버를 비롯해 독일 곳곳에서 “폴스카!”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들의 행동에서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오랫동안 독일의 침략에 시달려온 폴란드의 원한이 보였다. 폴란드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정말로 맺힌 것이 많나 보다, 눈으로 확인했다.

코카콜라, 마스터카드, 현대차…

이렇게 흥겹게, 가끔은 아슬아슬하게 독일의 거리 응원은 계속된다. 참, 2006년 독일의 응원 광장은 2002년 한국의 거리 응원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거리 응원은 한국이 세계에 선물한 문화일까. 그리고 ‘피파 팬 페스트’ 입구마다 독일월드컵의 공식 후원업체인 코카콜라, 마스터카드, 도시바 그리고 현대자동자가 팬 페스트의 톱 파트너(top partner)라고 큼지막하게 표시돼 있다. 한국 자본이 미국, 일본, 유럽의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시장에 이름 하나를 등재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렇게 다국적 자본이 열어놓은 축제의 마당에서 세계인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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