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속옷 한장 가진 적 없던 종갓집 며느리, 내 어머니의 오래된 ‘궁상’… 이제 자신만의 색깔로 홀로 서서 남은 생을 즐기는 당신을 팍팍 밀어드린다
▣ 황자혜 도쿄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나처럼 살지 말라’며 현해탄 건너로 딸의 등을 떠밀던 어머니가 어느새 칠순을 맞으셨다. 그리고 칠순의 어머니는 옛날과 달라져 있었다. 퇴직 뒤 말동무도 없이 상실한 권위에 대한 회한과 투정을 안주 삼아 나이를 자시는 아버지와도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라서 안된다니?”
요즈음 어머니는 당신의 커뮤니티 안에서 일주일 내내 분주하다. 아버지가 지팡이를 후리며 나서도, 하고 싶은 건 ‘한다주의자’가 됐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독립해야지, 원” 하거나 “나, 운전 배울까?”라는 능청스런 발언도 삼가지 않는다. 구민회관의 교양강좌란 강좌는 빠짐없이 듣고 익히느라 쉴 새 없이 잘나가는 박 여사다. 하나부터 열까지 거스를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말씀에도 역성내며 응수한다. “부통령도 서울시장 후보도 아무튼 여자라서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이제는 “여자라서 안 된다니, 그게 이유가 되냐?”고 받아칠 정도로, 당신의 정치적 소견에 일말의 굽힘도 없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깔깔한 시부모님 밑에서 4남1녀 키우느라 흔한 속옷 한 장까지 당신 것이라곤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다. 구릿빛 반지도 고모들 뒷바라지하며 팔았고, 오빠들의 ‘런닝구’와 아버지의 ‘빤스’까지도 당신 몸을 거쳐서야 비로소 집안의 걸레가 될 정도였으니, 세간 말로 ‘지지리도 궁상’이었다. 할머니가 부지깽이로 쫓아낸 ‘망태 할아버지’를 부엌 쪽문으로 오게 해 찬밥 한 술이라도 들게 했고, 시부모님께 용돈이라도 드린다며 밤이면 몰래 종이봉투를 붙이는 ‘알바’를 자처하는 종갓집 며느리였다. 대가족 속에서 생선 한 토막 건사해놓고 젓가락 놀려보신 적 없는, 이성복 시인의 시구처럼 온 가족을 위해 늘 ‘식욕이 없으신’ 어머니였다. 하지만 나에겐 이웃에 대한 배려, 없이도 베푸는 지혜로 생각되기보다는 그저 그 시절 어머니의 궁상이 마냥 뒤떨어진 것으로만 보였다.
사실, 나는 간간이, 아니 자주, 어머니께 대놓고 거의 호통에 가깝게 큰소리를 치는 딸이었다. “아들자식부터 어머니를 챙기도록 교육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어머니도 할 말은 좀 당당히 하며 살라”고 감히 훈계를 해댔다. 그리고 정말 딱 한 번, “지금이 어느 때냐”며 골고루 말썽이던 집안 남자들에게 항거해, 그 시절 어느 집이나 당연했을 가족 내의 남녀 불평등에 분개해 밥상을 뒤엎은 적도 있다. 몰래 어머니 인생에 대해 몇 번인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잘잘못을 떠나 그저 숨죽여 시어머니 잔소리를 감내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은 죄다 사치’라고 생각하는 유년 시절 대가족 안에서의 어머니는, 어느 것 하나 닮고 싶지 않은 구식 덩어리 그 자체였으니까.
민주화 투쟁으로 대학가며 거리에 시위가 한창이던 1987년. 어머니는 문화패들이 공연 때마다 입는 무명 한복을 다림질하면서,

“아무리 문화공연이라지만 데모 맨 앞줄은 위험할 텐데…” 걱정하면서도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더라”고 격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당시 돼먹지 못한 딸은 사당동 철거투쟁 현장에서 대학생 딴따라로 공연하느라 집에 없었는데, 그 죄로 식구들한테 눈총 톡톡히 받으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간만에 휴식하는 어머니를 시샘이라도 하듯, 다시 연탄가스 중독 후유증이 덮쳐왔고, 무릎은 썩은 연골을 드러내 인공연골을 받아안았고, 욕창까지 찾아왔다. 긴 병원 생활을 뒤로하고 퇴원할 때 어머니는 “어미가 되어 날개를 달아주진 못할망정”이라며, 딸자식 휴학 2년 시킨 것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바닷가에서 보낸 어머니의 문자
그러던 어머니가 바뀌기 시작한 건 언제였던가. 라는 연극보다도 더 늦게, 육순이 되어서 큰 수술 끝에 목발로 모래를 디디며 바다를 처음 만난 어머니가 휴대전화에 남긴 메시지가 떠오른다. “자~야, 엄마 지금 바다랑 있다~아.” 그게, 왠지 내겐, “이젠 나도 무언가 새롭게 시작할 거야”의 기세로 들려왔다. 외려 딸의 마음을 죄송하고 뭉클하게 하는 그 천진난만한 메시지가,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 변화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얼마 전 국제전화로 “소박한 생일잔치를 하니 늦게라도 들러라”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출장으로 허우적대느라 늦게 도착한 어머니의 칠순잔치는, 어머니에 의한, 어머니들을 위한, 어머니들만의 여성 노인 잔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연둣빛 줄무늬 웃옷, 무릎이 보일락 말락 세월에 시위하듯 너풀거리는 흰 주름치마를. 그리고 어머니의 지난 청춘, 첫사랑이라면 이러했을 연분홍빛 가방을. 아니 무엇보다도 도전적이고 발랄하고 자신감 넘치는, 내 유년시절의 어머니와는 다른 의기양양한 한 여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안심했다. 구차하다고 펄쩍 뛰는 아버지를 피해 장애인 복지단체에서 빵과 음료를 타서 이웃 독거노인께 가져다드리는 어머니식 사회운동가, 튼실한 여성 후보자라면 단연코 지지한다며 무늬만이 아닌 속살까지도 제대로 된 늦깎이 여성주의자 어머니에게. 삼종지도의 끝자락에서 이젠 편안해지셔야 할 어머니의 노후가, 양 겨드랑이에 날개 대신 목발을 딛고 서야 한다는 것은 딸로서는 미치도록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날은 또 감사했다. 단순비교로는 가늠할 수 없는 어머니만의 색깔로 홀로 서신 것에 대해. 의미 있고 화려한 칠순 나들이 때 목발이라고 감히 어머니의 스타일은 구기지 못한다는 걸 알게 해준 것에 대해서도. 날로 굽어가는 허리에 자신감을 싣고 남은 생을 누비고자 하는 어머니가, 복종과 희생이 미덕으로 여겨진 가부장적 시대를 넘어, 이제 칠순독립 만세 운동과 함께 멋진 외출까지 감행하고 있는 어머니가, 어쩌면 나보다도 마디 굵게 앞서 나아가는 여성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엄마처럼’이라면 살고 싶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며 악을 쓰던 딸은, 이제 마흔 가까이에 서 있다. 그러나 지금의 ‘엄마처럼’이라면 살고 싶어진다. 칠순에 이어 앞으로도 팍팍 밀어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해방 이후 그 누구의 독립보다도 혁신이고 거사였을, 반세기 만의 어머니의 독립선언과 자유 외출이다. “오늘도 밖으로 나돌 궁리로 하루가 모자라고 일주일이 짧기만 할 어머니, 어머니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8/53_17651431283233_20251207502130.jpg)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종묘 앞 재개발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종묘 앞 재개발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7/17650888462901_20251207501368.jpg)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종묘 앞 재개발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

뜨끈한 온천욕 뒤 막국수 한 그릇, 인생은 아름다워
![쿠팡, 갈팡질팡 [그림판] 쿠팡, 갈팡질팡 [그림판]](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7/53_17651042890397_20251207502012.jpg)
쿠팡, 갈팡질팡 [그림판]

‘윤어게인’ 숨기고 충북대 총학생회장 당선…아직 ‘반탄’이냐 물었더니

‘소년범’ 조진웅 은퇴 파문…“해결책 아냐” vs “피해자는 평생 고통”

‘갑질’ 의혹 박나래 입건…전 매니저 “상해, 대리처방 심부름”

“중국은 잠재적 파트너, 유럽은 문명 소멸”…미, 이익 중심 고립주의 공식화

“쿠팡만 쓴 카드, 14만원 결제 시도 알림 왔어요”…가짜 고객센터 피싱까지

바다를 달리다 보면…어느새 숲이 되는 길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resize/test/child/2025/1205/53_17648924633017_17648924515568_2025120450403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