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에 키득거리며 홈런에 울컥하며 잘 놀았다, 그리고 슬슬 걱정이다 </font>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대한민국은 동네다. 우리 동네는 어찌나 화목한지, 동네 사람 모두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중계를 보면서 즐거워한다. 물론 병역의 의무처럼 관람의 의무가 헌법에 명시돼 있지는 않다. 안 보고, 안 기뻐해도 된다. 다만 동네 주민들과 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 동네의 축제는 원래 6월로 예정돼 있었다. 초여름, 독일에서 불어올 태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느 봄날, 꽃샘추위마저 몰아내며 태평양 건너에서 열풍이 불어왔다. 봄축제의 이름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었다. 그렇게 축구가 아닌 아구로 하는 ‘두 번째 월드컵’은 갑자기 시작됐다. 2002년 월드컵이 ‘어, 우리도 되네!’라는 최초의 자부심을 주었다면, 2006년 WBC는 ‘역시, 우리는 돼!’라는 높아진 자신감으로 애국심을 ‘업그레이드’했다.
해마다 일정표 짜놓고 이벤트!
3월15일, WBC 본선 일본전이 열리던 시각, 서울역에 갔다. 만장하신 여러분이 일본전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서울역에 설치된 여러 대의 텔레비전 주위에는 각각 수십 명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IMAGE1%%]7회까지 0의 행진이 계속됐다. 노숙자 아저씨도, 여행객 청년도 나란히 텔레비전을 봤다. 대합실의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돌리자 바로 옆의 패스트푸드점 ‘롯데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롯데리아 앞에 펼침막이 서 있었다. “롯데리아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기특하게도 ‘토종기업’을 자처하는 롯데리아는 제국의 상징, 맥도널드 매장과 나란히 경쟁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내셔널리티는 자랑할 만한 무엇인가가 됐다(물론 롯데리아가 한국 브랜드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합실의 텔레비전들 사이에, ‘독도역사찾기운동본부’의 서명운동 가판대가 설치됐다. 텔레비전에 관심을 빼앗긴 서명대는 썰렁했다. 서명을 받는 운동원에게 물었다. “끝나면 서명 많이 하겠어요.” “아니요. 미국전 때도 오히려 서명자가 적었어요.” 3월 초부터 같은 자리에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WBC 경기가 있는 날은 오히려 서명자가 적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대리만족에 중독됐다. 그래도 즐거운걸, 어떡해!
다시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8회 초. ‘종배미’ 아저씨가 적시타를 쳤다. “딱!” 소리가 나자 “야!” 환호성이 터졌다. 두 팔을 뻗으며 뛰어나가는 이종범 선수를 보면서 나도 펄쩍펄쩍 뛰었다. 역시 우리는 ‘국가대표 스포츠에 중독된 자동반응 장치’였다. 펄쩍 뛰는 내 옆에는 일본 기자가 서 있었다. 9회 말 일본의 마지막 공격, 일본 타자가 외야로 날아가는 타구를 날렸다. 쭉 뻗는 타구를 보면서 일본 기자가 나지막이 “하이루”인지 “하이타”인지를 외쳤다. 물론 일본어를 모르는 조선 기자, “홈런”이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살짝 기분 나쁠 뻔했다. 다행히 홈런이 아니라 파울이었다. 투수 오승환이 일본의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역시 자동반응, 주먹 불끈불끈! 종범이 형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형, 저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기뻐요. 3월에 토리노, 또 3월에 WBC, 6월에 월드컵, 해마다 일정표 짜놓고 이벤트 벌여주는 나라가 어디 흔하겠어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날로 번창하는 한국 스포츠, 날로 높아지는 애국심, 한국만큼 국민 정체성에 스포츠가 강한 영향을 끼친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런데, 여성은 어디 있나
그림이 좋다. 제국의 땅에서 제국을 꺾었다. 일본에서 일본을 이기고, 미국에서 미국을 이겼다. 또 미국에서 일본을 이겼다. 적절한 해외 로케이션에, 완벽한 캐스팅에, 감동적인 스토리까지, 드라마의 요소는 완벽했다. 미국 땅에 태극기를 꽂고, 일본열도를 정복했다고 한다. 정희준 동아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 교수는 지적했다. “월드컵이 과거형이라면 WBC는 현재형이다. 월드컵 때는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과거의 제국들을 동방의 작은 나라가 이겼다. 야구팀이 이긴 나라들은 현재의 제국들이다. 야구의 승리는 현재형의 쾌감을 준다.” 그래서 WBC의 승리가 애국주의를 자극할 요소를 더 많다는 말씀. 더구나 WBC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만들기 운동’을 한반도 넘어 해외로 확장했다. 야구의 승리는 재미동포와 재일동포에게 자긍심을 주었다. 이처럼 ‘두 번째 월드컵’은 한국인뿐 아니라 한국인 이주민들의 자긍심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다시 서울역. 서재응이 태극기를 꽂았다. 깃대가 겨냥한 것이 제국의 심장인지, 일제의 가슴인지는 확실치 않다. 처음엔 그저 색다른 세리머니라고 생각했다가 조금씩 찜찜해졌다.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성심리학적으로 한국 남성이 가진 태도가 반영돼 있다”고 지적했다. 태극기를 꽂자 박수가 터졌다.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여성이 없었다. 서울역의 텔레비전 주위에는 모여든 사람들 중 여성은 극히 드물었다. 스포츠를 통한 국민정체성 강화는 생각보다 ‘성별적’이었다. 다음날,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한 문장에 ‘꽂혔다’. “다음의 ‘여심흡수신공’ 회원은 ‘미국이 달에 가서 성조기 꽂는 것보다 대한민국이 미국 땅에서 태극기 꽂는 게 더 멋있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대략 난감이었다.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준결승을 앞두고 거리응원을 하자는 제안이 집단 발의됐다. 거리응원 서명운동이 이어졌다. 구호로 요약하면, “가자 광화문으로, 오라 잠실로, 만나자 시청 광장에서!” 그리고 ‘블루 도깨비’라는 ‘붉은 악마’ 비슷한 야구 서포터스가 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이 멕시코와 미국에 2연승을 거두고, 일본전을 치르게 되면서 내내 궁금했다. 과연 한국인들은 한국이 일본에 이겨서 미국이 올라가기를 바랄까, 한국이 져(줘)서 일본이 올라가기를 바랄까. 한국은 준결승 상대를 대략 선택할 수도 있었다(물론 미국이 멕시코에 져서 헛고민이 됐지만). 하지만 한국은 정석대로 승리했다. 서울역에서 무식하게 물었다. “일본, 미국 어디를 이기는 게 더 좋아요?” 중년의 김동석(49·서울 신월동)씨가 답했다. “미국 경기가 박진감이 더 있었지만, 아무래도 일본을 이기면 쾌감은 더 있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택시기사 아저씨의 생각은 달랐다. “괜히 일본을 이겨서 준결승에서 미국과 붙게 됐잖아. 박찬호 아껴두었다가 일본과 준결승에서 쓰지”(그 뒤 미국은 탈락했다). 어쨌든 한국은 야구로 ‘일타 양피’했다. 일본전 승리로 미국에 보은하고, 일본에 복수했다. 자, 참전에 보은했으니 미군은 평택으로 가지 말고 ‘홈인’해도 되지 않을까.
애국으로 뭉쳐도, 우리에겐 면죄부가
그동안 즐거웠다. 이치로를 ‘입치료’라고 부르면서 키득거렸고, 이승엽의 홈런을 보면서 울컥했다. 야구팀의 승리를 단순한 스포츠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인의 승리로 느끼는 나를 포함한 한국인을 보면서, 한국인은 뭐 이리 맺힌 한이 많으냐는 생각에 눈물도 나고 짜증도 났다. 우리에겐 면죄부가 있다. 한국에서는 선수도, 국민도 애국으로 똘똘 뭉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애국주의 견제도 약하다. 여하튼 그동안 신나게 놀았다. 이제는 슬슬 숙제가 걱정이다. 월드컵의 후폭풍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듯이, WBC의 후폭풍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닥쳐올지 모른다. 솔직히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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