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신로마제국의 공포

등록 2006-03-17 00:00 수정 2020-05-03 04:24

왜 아시아 기자들은 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는 외부 요인으로 미국을 뽑았을까
냉전 이후 전일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역내 긴장과 불안을 조장하다

▣ 한승동 기자 한겨레 18˚팀장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행동대장처럼 안하무인에 저돌적이고 고압적인 존 볼턴 유엔주재 미국대사. 국무부 차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앉는 과정에서부터 논란을 빚었던 그가 지난 3월6일 또 언론에 등장했다.

그는 “아무리 소규모고 연구 목적이라 하더라도 이란이 현재 안고 있는 우라늄 농축의 기술적인 문제점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며 러시아 쪽이 제시한 이란 핵 문제 타협안에 ‘안 돼’ 판정을 내렸다. 러시아 타협안이란 이란이 평화 목적의 소규모 우라늄 농축 작업을 자국 내에서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 감시를 더욱 강화한다는 내용이고, 볼턴은 그건 이란에 핵무기 개발 길을 터주는 것이니 안 된다는 얘기다.

다른 제국주의를 밀어낼 때만 환영받아

얼마 전 인도 핵 문제에 대해 미국 정부가 협력하자며 내놓은 파격적인 처방과는 딴판이다. 거기엔 어떤 논리적 일관성이나 형평성도 없다. ‘국익’이라는 적나라한 내셔널리즘적 계산이 있을 뿐이다. 그에 동조한 프랑스나 러시아도 다르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또한 다를 게 없다. 그전에 이란 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 무대로 끌고 가겠다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미국의 행태부터 따져보자.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들이 제3국의 핵개발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있을까. 그들이야말로 핵 문제의 ‘원흉’이 아닌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핵확산 저지나 해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핵 독과점을 효과적으로 유지 관리하느냐다. 그들이 국제무대에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정의롭거나 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힘이 세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상대를 괴롭히고 때려눕힐 완력과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국의 영화를 활성화하고자 노력하는 나라와, 미국처럼 외국 영화는 사들이지도 않고 배급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나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보호무역주의인가. 미국 땅 전체를 통틀어도 외국 영화는 2%를 넘지 않는다.” 프랑스 중견 영화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가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오마이뉴스>가 3월8일 전했는데, 그런 미국의 ‘횡포’가 통하는 것도 오로지 힘 때문이다.

나라나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긴 했지만, 한때 미국이 아시아에서 환영받은 적이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 패전 직후 그들은 잠시나마 한국에서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다.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 때도 그들은 잠시 필리핀 독립운동 세력의 환영을 받았으며 그 뒤 동남아나 중국, 중동 일부에서 잠시 호감을 샀다. 미국이 환영받은 것은 이처럼 주로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이나 일제 등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을 밀어내고 자신이 군림한 역할 교체기였다. 기존 제국주의 수탈 체제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자기 몫을 주장하기 시작한 후발 제국 미국은 반제 저항 토착세력에겐 기존 체제를 함께 무너뜨릴 우군처럼 한때 비쳤다. 일본 우익들이 조선과 만주 침략을 위한 러시아 선제공격(러-일전쟁)과 남방 침략으로 확대된 대동아공영권 구축을 아시아 민족을 서양의 식민지배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전쟁이었다고 몰염치한 소리를 지금도 뻔뻔하게 내뱉고 있는 연유도 그런 것이다. 그들이 송병준의 일진회나 벼슬 받고 도장 찍은 ‘을사오적’ 따위를 예로 들면서 ‘한일합방’이 강제가 아니라 자발이었다고 우기는 사정을 떠올리면 그 자그마한 진실조차 얼마나 많은 허구와 억지가 함께 버무려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동아시아 나라들을 각개격파?

베트남전 수렁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아시아 개입은, 중국·북한 등 사회주의권과의 대결, 한국전쟁 등을 예외로 하면 순항기였다. 민주주의, 자유, 물질적 풍요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에 대한 저항도 크지 않았다. 거대 채권국 ‘미국의 여유’가 모순을 가렸으며 그들의 문화는 새로운 해방의 상징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부도덕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표본인 베트남전의 장기화와 반전 물결, 국론 분열, 독일·일본 등의 재건으로 미국 경제의 절대적 우위가 흔들리고 전후 고원경기가 끝나는 70년대 이후 미국의 신세계 신화는 끝이 났으나, 동서 냉전체제라는 방패가 모순 분출을 또 가로막았다.

아시아에서 ‘반미’ ‘탈미’가 거침없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들어서다. <한겨레21>이 지난 3월10일 아시아 지역 기자들을 대상으로 ‘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해치는 외부적 요인’이 뭐냐고 물어본 결과 ‘미국’을 꼽은 비율은 국적에 상관없이 63%, 거기에 서방까지 포함시키면 71%에 달했다. 그들은 왜 미국을 ‘위험분자’로 보는 것일까?

아시아의 반미 물결은 냉전이 붕괴된 지 10여 년이 지나면서 급변한 지역 정세와 유일 초대국으로 남은 미국이 독점적이고 전일적인 자국 중심 지배체제를 전 지구적 규모로 확립하기 위해 벌이는 질서 재편 움직임과 맞물려 있다. 주적이 사라진 냉전 이후 시대에 ‘21세기형 로마제국’을 꿈꾸는 네오콘의 득세와 부시 정권의 등장, 9·11 사태는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권과 90년대 빌 클린턴 민주당 정권을 거치면서 움터온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극적으로 만개시켰다. 강력하고 독보적인 미국을 지향하는 정치이념인 신보수주의와 세계화·시장화를 앞세워 국내외적 규제를 완화하고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이 마음대로 세계를 누비면서 부를 빨아올리는 데 방해가 될 만한 모든 장치들을 해체하는 신자유주의, 이를 물리력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군비강화 노선=군사주의. 1997년 타이 바트화 평가절하부터 시작해 한국 사회를 나락으로 밀어넣은 동아시아 금융위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밀어붙이기와 농산물 시장 개방,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침공, 테러와의 전쟁 선포, 미-일 동맹 강화와 일본 개헌 추진, 미군 전면 재배치와 주한미군 평택 이전, 미군 중앙아시아 배치, 이란·이라크·북한 ‘악의 축’ 규정과 이란·북한 핵 문제 등은 모두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최근 중남미의 좌선회 물결은 그러한 미국 주도하의 질서 재편으로 더욱 피폐해진 대중들의 거부감과 반발을 배경에 깔고 있다. 아시아의 ‘반미’도 같은 맥락이다.

중동과 동남아 이슬람 지역에 휘몰아치고 있는 반미 감정에는 9·11 이후 더욱 민감해진 종교세력 간 갈등이 작용하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겨냥한 미국의 대테러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오히려 반미 대응테러를 부추겼다. 미국은 동아시아 각국과 개별적으로 2국간 관계를 맺음으로써 각개격파식으로 동아시아 역내 역량을 분산시켜 자국 패권을 위협하는 경쟁세력의 등장을 용인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한-미 동맹 간 ‘전략적 유연성’과 평택기지 이전 논란의 출발점도 여기다. 북핵·대만해협 문제 등 불안 유발과 긴장 지속 요인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 일본 우익들을 부추겨 개헌과 재무장을 재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쌍둥이 적자 속에 활황 누리는 경제

무한경쟁과 토착 중소자본 몰락, 대량 실업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공세는 동아시아 전역의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화했다. 경제 격차에 따른 국가 간 서열화도 뚜렷해지고 있다. 강자독식과 우승열패의 신자유주의적 개발이란 결국 빼앗는 소수 중앙과 빼앗기는 다수 주변으로 세상을 가르면서 중앙의 외연을 조금씩 확장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앙의 확장은 주변의 확대 또는 수탈 심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미국 금융자본은 이런 이중 수탈구조 위에 서 있다. 지난해 무역적자가 7천억달러를 넘어서고 재정적자까지 합하면 연간 1조달러를 넘는 쌍둥이 적자 위에 서 있으면서도 저축률 마이너스의 과도한 소비와 투자 속에 활황을 구가하는 미국 경제의 이상구조는, 달러라는 기축통화 발행국으로서의 특권과 차상위 10개국 군사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는 막강한 군사력의 토대 위에 일본·중국·한국·대만 등 중앙 외곽에 진입한 우등생들의 미 국채 매입 등 막대한 대미 투자 덕에 유지되고 있다. 이런 기형적인 공생구조가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다.

결국 초국화한 미국의 패권은 지속되든 무너지든 소수 동맹자들을 제외한 다수에게 공포와 경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