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로 풀어본 삼성 가문 위기…근본 문제는 황태자의 어이없는 영토 세습
가신들의 밀담 담은 X파일 불거지고 금융과 산업의 울타리 정리도 난관으로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동아시아의 끝자락 ‘코리아 공동체’에는 ‘삼성 제국’이 독자적인 영지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었다. 제국은 그 이름에 걸맞게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공동체의 일부이긴 해도 경제적 실력으로 다른 영지를 압도했다. 제국의 신민들은 공동체의 운명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막강한 경제적 실력에 힘입어 제국의 황제는 공동체의 수장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다. 제국 안팎에는 황제에 대한 칭송이 넘쳐흘렀고, 공동체의 젊은이들은 그를 표상으로 삼았다. ‘고려 서당’은 그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헌사했다. ‘공동체 안의 제국’이 아닌, ‘제국 속의 공동체’였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없었으나…
공고해 보이기만 하던 제국의 황제 자리에 결정적으로 상처가 나기 시작한 건 2005년 들어서였다. 그해 황제를 보좌하는 가신들의 밀담을 기록한 ‘X파일’이 바깥으로 불거지면서 제국과 황제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가신들의 밀담은 ‘제국의 돈으로 공동체 전체를 쥐락펴락한다’는 세간의 풍설을 확인시켜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제국을 포함한 공동체의 비리를 발견하면 왈왈 짖어댐으로써 백성들에게 알리라는 ‘개’의 임무를 맡은 이는 공동체 상층부로 제국의 뇌물을 전달하는 ‘강아지’ 노릇을 했다는 의심을 살 만한 행적도 포착됐다. 제국과 황제를 선망했던 공동체의 백성들은 아연실색했다. 들끓는 민심에 시달린 공동체의 포도청은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황제는 칭병하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섯 달에 걸친 국외 체류를 끝내고 돌아온 황제는 “비대해지고 느슨해졌다”는 말로 제국의 신민들을 바짝 긴장시키며 후속 조처를 암시했다. 며칠 뒤 제국은 황태자의 재산을 포함해 8천억냥이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사회 기금을 헌납한다고 발표했다. 공동체 역사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액의 기부였다. 제국의 발표 내용에는 ‘공동체 백성들에게 걱정을 끼쳐 깊이 반성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황제의 반성은, 제국의 운영 방식과 공동체 규칙(법) 위반 시비에 ‘모르쇠’로 일관하던 데서 한발 나아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에도 근본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제국의 한 재산을 뚝 떼어 공동체에 헌납하고도 잠재우지 못한 제국의 근본적 문제는 ‘황제에서 황태자로 이어지는 제국의 영토 세습’과 얽혀 있었다.
8만~9만냥의 주식 9천냥에 사다
제국의 처지를 지금처럼 옹색하게 만든 영토 승계 작업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황제의 나이 52살 때였다. ‘지천명’을 넘긴 황제 처지에선 빠르지 않은 시점이었는지 몰라도 황태자는 26살에 지나지 않았다. 대제국을 물려받기엔 너무 어렸다. 그래도 황태자에게 영토를 이양하는 작업은 착착 진행됐다. 적어도 제국 안에선 별 말썽이 없었다. 창업 2세인 황제가 제국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겪었던 형제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은 더 이상 없었다. 황제가 건재한데다, 황태자는 외아들이었다.
제국 안에선 이렇듯 잡음 없이 이뤄진 ‘황제 → 황태자의 영토 이양’이 제국 밖에선 달리 받아들여졌다. 황태자가 영토를 넘겨받는 과정이 공동체의 법과 상식에 어긋난다는 시비에 휘말렸다. 제국이 발을 딛고 선 공동체는 이미 봉건 왕조가 아니라 공화국 체제였다. 제국의 세습 자체가 공화국의 법을 어긴 건 아니었어도 영토 세습 과정에 중대한 결함이 내포돼 있었다.
제국의 영토 이양 과정은 황태자가 황제한테서 61억냥을 물려받는 것에서 시작됐다. 황태자는 이 종자돈으로 개발 전(비상장)의 봉토(계열사 주식)를 싸게 사들였다가 개발 뒤(상장)에 되파는 방식으로 1995년 말~1997년 초 560억냥의 시세차익을 거뒀다. 이를 밑천으로 1996~99년에 또 다른 봉토(삼성SDS 사모 신주인수권부사채(BW),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등)를 사들여 에버랜드 봉토를 꼭지점으로 하는 삼성 제국을 단숨에 장악했다. 삼성 제국의 영토는 에버랜드 봉토가 삼성생명을, 삼성생명은 삼성전자를, 삼성전자가 나머지 봉토들을 소유하는 ‘고구마 줄기 구조’였다. 제국의 통치권은 여전히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영토의 소유권은 이제 황태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황태자가 이런 방식으로 삼성 제국을 장악해 조 단위의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에 낸 세금은 16억냥이었다.
황제의 사과는 포도청을 겨냥?
영토 장악 과정의 백미는 1996년 12월 에버랜드 영토를 거머쥐는 대목이었다. 황제의 가신들은 황태자와 황태자의 누이들에게 에버랜드 봉토를 싸게 살 수 있는 증명서(CB)를 끊어주는 방식을 동원했다. 나중에 드러난 바 에버랜드 봉토는 평당 8만~9만냥의 가치를 지녔음에도 황태자는 평당 9천냥에 사들일 수 있는 CB를 대거 받았다. 황태자는 이를 통해 제국의 핵인 에버랜드 봉토 32%를 확보했다. 제국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황금 열쇠를 손에 넣은 셈이었다. 이 과정에서 에버랜드 봉토의 다른 소유자들은 그만큼 몫이 줄어 재산상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봉토를 헐값에 살 수 있는 증명서를 끊어준 가신 둘은 그로부터 9년 뒤인 2005년 징역형(1심)을 선고받았다. 공동체의 법을 어겼다는 게 객관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2월7일 최측근 가신이 대신 밝힌 황제의 사과 발언은 바로 이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식들에 대한 증여 문제로 백성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다.”
에버랜드 봉토 이양을 둘러싼 삼성 제국과 공동체 포도청 사이의 법적 다툼은 2심 고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포도청의 칼은 가신 그룹을 넘어 황제 가문에게까지 겨눠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겉보기엔 가신들의 충성스런 결정에서 비롯된 듯 보이는 봉토의 편법(또는 불법) 이양이 실상은 황제 가문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문제 제기는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고, 일반의 상식으로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판관의 최종 저울질에서 황제 가문의 개입 혐의가 명백히 인정된다면, 황태자의 권력은 법적 정당성을 잃게 된다. 다행히 황제 가문은 비켜가고 가신들만 유죄를 선고받는다고 해도 황태자의 권력에 대한 도덕성 시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제국으로선 포도청과 한바탕 법리 다툼을 벌여 기필코 무죄 판결을 끌어내야 한다. 일각에선 ‘황제의 사과’를 이런 맥락으로 읽고 있기도 하다. 공동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포도청의 칼끝을 무디게 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에버랜드 봉토 이양을 둘러싼 법리 다툼과 함께 황제 가문을 옥죄는 또 하나의 난관은 공동체의 부실한 울타리(금융산업구조개선법, 금융지주회사법)를 고치고 있는 움직임이다. 울타리 수리 작업을 거칠게 요약하면 ‘금융 봉토’와 ‘산업 봉토’를 엄격하게 분리 지배하는 것이다. 이를 제국에 적용한다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봉토를 동시에 지배하기 어렵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내용은 지금 법에도 웬만큼 담겨 있음에도 금융 포도청의 흐물흐물한 대처로 유명무실했다. 금융 포도청의 직무유기성 대응을 원천봉쇄하도록 울타리를 고친다면,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제국의 황제 가문으로선 울타리 작업반을 구슬려 수리 작업의 방향을 뒤틀거나 새로 마련되는 울타리에 적응해야 한다. 황제의 사과 뒤에도 제국의 갈 길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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