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거대한 변화의 서곡일까” 삼성그룹 사과에 상반된 반응 보이는 재계
외부의 비판 껴안았으나 내부적으로 어떤 개혁에 나설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삼성그룹 사장들이 한데 모여서 다 같이 국민들 앞에 고개 숙인 건 제스처일 뿐인가, 삼성의 변화를 알리는 서곡인가? 삼성의 한 임원은 “삼성이 그동안 논리로, 법대로를 외쳐왔다면 이제 국민들의 정서와 감성에 항상 귀기울이는 기업으로 변화하겠다는 선언”이라고 말했다. 삼성 계열사의 또 다른 임원은 “세계 제일기업을 만드는 데만 매달리다 보니 양극화 문제나 국민 경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돈만 벌면 된다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각 계열사별로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을 전개하는 등 사회에 기여하는 삼성의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성은 없고 감성에만 호소”
재계 쪽은 서로 뒤엉킨 복잡한 해석들을 내놓고 있다. 크게 보면, 한쪽은 ‘쇼크’로 다른 쪽은 ‘별것 없다’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ㅎ그룹의 한 임원은 “우리나라 기업들은 대부분 놀라울 정도로 보수적인 조직인데, 이건희 회장이 8천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사재를 털어놓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삼성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가’ 놀라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에 대한 재산환수 조처를 단행했던 옛 군부정권 시절도 아니고, 삼성이 법과 논리로 얼마든지 붙을 수 있을 텐데 상당한 양보를 하면서 백기를 든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기업들은 정부 정책 때문에 기업 하기 어려운 여건이 되면 글로벌 시장을 보고 바깥으로 나가버리겠다고 말하거나 정권이 바뀔 때까지 참으면 된다는 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9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이수영 회장이 “정부가 계속 친노동 편향 정책을 펴면 기업들도 파업할 수 있다. 문 닫고 중국·인도 등으로 나가버리겠다”며 ‘자본 파업’을 앞세워 위협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번 삼성의 발표는 이런 위협이 꺾였다는 점에서 꽤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삼성의 이번 발표로, 올해 우리나라 기업의 화두는 ‘기업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연 삼성은 지난 1993년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며 ‘신경영’을 외쳤을 때처럼 또다시 그룹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변화의 시동을 건 것일까?
반면에 ‘놀랄 것 없다’는 반응을 보인 기업들은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대사회적 선언’일 뿐, 삼성 조직의 내부적으로 뭘 바꾸겠다는 건 거의 없다. 구조조정본부를 축소하고 법무실을 분리하겠다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또 다른 ㅎ그룹의 부장은 “국민들의 반삼성 정서는 이 회장 일가의 경영권 세습도 있지만, 삼성이 거대 권력화하고 삼성 문제와 관련된 검사와 관료들을 돈으로 모조리 영입해 삼성맨으로 만들어버리는 행태 때문이기도 하다”며 이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최고급 인재들을 다 끌어다가 오직 이 회장 일가의 지배권 강화를 위한 편법과 논리 개발에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ㅇ그룹의 한 부장도 “예전에 이건희 장학재단도 반삼성 분위기가 일어나자 급히 만든 것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를 푸는 방식은 똑같다. 그룹 내부의 이 회장을 정점으로 한 중앙 집중화는 건드리지 않고, 감성에 호소해 여론의 동정표를 얻으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왜 내부자들의 쓴소리는 듣지 않나
이번 발표는 ‘삼성공화국’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라는 외부적 힘에 떠밀려서 내놓은 것이다. 삼성이 직면한 지배권 위기가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급속히 이동하면서 폭발하기 전에 탈출구를 찾은 셈인데, ‘변화하는 삼성’은 바깥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기업은 규모가 팽창할수록 이해관계자도 많아지고 기업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도 바뀌게 마련이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소장은 “삼성은 시장과 주주, 이해관계자들의 감시를 받는 쪽으로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삼성의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지배권 행사와 관련된 이건희 회장 본인의 문제가 터져나왔다”고 말했다.
지난 1993년 신경영 선언 때 노동자들과 협력업체들한테 강도높은 변화와 혁신을 요구했지만, 정작 이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그룹 지배구조는 변화를 거부하는 철옹성으로 남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외부적 힘의 한 축인 정치권과 검찰이 그동안 삼성 개혁에 나서지 않고 오히려 비호해왔고, 오히려 국민들이 삼성공화국 비판을 제기해온 것”이라며 “이윤 축적 과정 자체가 사회 통합적 경영이어야 하는데, 곁가지인 사회 공헌만 앞세워 삼성이 사회 통합과 양극화 해소에 일조했다는 것만 말하는 건 면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삼성이 운영하겠다고 밝힌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은 견제장치 구실을 할 수 있을까? 김선웅 소장은 “이 모임에 참석하는 외부인들한테 삼성이 제공할 기업 정보라야 별로 없거나 가공된 정보에 그칠 것이고, 삼성에 대한 쓴소리는 이미 충분히 있어왔다. 이 모임이 별다른 구실을 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삼성에 다가서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끌어안거나 비판적인 사람들의 입을 막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삼성은 왜 노동자나 협력업체 등 ‘내부자들’의 쓴소리는 듣지 않고, ‘지켜보는 외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서 문제는 다시 이 회장에게로 돌아간다. 조돈문 교수는 “삼성이 진정으로 변화하려면 내부자들이 발언하고 문제 제기하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회장의 지배권이 걸려 있기 때문에 한사코 ‘내부’를 틀어막고 있는데,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노조 설립 탄압은 늘 되풀이돼온 것이라서 이제 언급조차 안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삼성 권력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결국 태도 변화는 여론 때문
‘X파일 사건’이 터진 뒤 이 회장이 외국으로 나가버리고, 공정거래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정면 돌파를 선택했던 삼성이 8천억원 헌납으로 돌아선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검찰 수사 진행에 따라 경영권 승계 문제가 자칫하면 다 깨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검찰이 과연 그 정도의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ㅎ그룹 임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할 정도로 정권이 강한 것도 아닌데, 결국 삼성의 태도 변화는 여론 동향에 달려 있는 것 같다”며 “삼성과 여론, 정부의 관계는 ‘열려 있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삼성 스스로 ‘소유지배구조 민주화’와 내부 개혁에 나설 생각은 전혀 없으며, 이번에 일단 8천억원을 정치적으로 던져보고 여론이 더 악화되면 또 다른 카드를 꺼내는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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