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진월중앙초등학교에서 벌어진 국기에 대한 경례 집단 거부 사건의 피해자들…교회 주일학교 교사는 ‘사상범’으로 잡혀가고 ‘문제아’로 낙인 찍힌 학생은 자퇴
▣ 광양·부산=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유신의 초입, 1971~73년에는 ‘국기 애국주의’가 한반도를 휘몰아쳤다. 국기에 대한 주목이 경례로 바뀌고 충성 맹세문이 작성돼 각급 학교에서 시행되자 많은 희생자들이 나타났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고 경찰에 끌려갔으며, 심지어 징역을 살기도 했다. 전남 광양에서, 충북 제천에서, 부산에서 어린 영혼들은 국가주의의 유령에 하나씩 스러졌다.
이 가운데 1972년 광양 진월중앙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초등학생 50여 명의 국기에 대한 경례 집단 거부 사건은 군사정권의 파렴치함의 극치였다.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탈선 청소년으로 왜곡했던 진실을, 당시 사건에 연루됐던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다.
“얼른 사형됐으면 싶었어”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조계산 줄기가 완연히 내려와 섬진강이 휘도는 굽이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의 유일한 교회인 오사재건교회는 아이들의 배움터였다. 이웃 마을까지 합쳐 100명이 넘은 아이들은 교회에 모여 주일학교 교사인 양영례(60·당시 27살)씨와 감자를 캐러 다니고 노래를 부르고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텔레비전은커녕 변변한 장난감조차 없던 시절, 교회는 방과 뒤 훌륭한 놀이터였고 양씨는 아이들의 인기 만점 누나였다.
그러던 오사리에 1972년 6월 평화가 깨졌다. 진월중앙초등학교 50여 명이 집단적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것이다. 당시 중앙초등학교에 다녔던 김현호(45)씨의 회상이다.
“마을이 작은지라 학생들 상당수가 오사교회에 다녔어요. 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참배와 마찬가지로 국기에 대한 경례도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고.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하지 않고, 선생님들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요.”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일보> 7월21일치에 따르면, “6월 중순 4학년 1반 자치회에서 담임 서병수(당시 26살) 교사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구령했을 때 교실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돌아다보니 51명 어린이 가운데 21명이 일동 경례를 하지 않고 웃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조사를 해보니 경례를 하지 않은 아이들은 모두 오사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수에 놀란 학교 쪽은 오사교회에 진상 확인을 요청했고, 오사교회는 “아무리 어린이라고 해도 학생들 개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 경례를 하라고 시킬 순 없다”고 답하며 옥신각신했다.
그러던 중 오사교회의 양영기 장로는 기독교인의 국기 경례 여부에 대해서 전남도 교육위원회에 문의했다. 문제가 커질 줄 몰랐고 순수하게 의견을 구하는 차원이었다. 그런데 도교위가 되레 놀랐다. 도교육청은 학교에 국민의례 지도를 제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5학년이었던 김현호씨는 담임 교사에게 수차례 불려갔다. 교사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퇴학당한다”고 겁을 줬다. 매일매일 반성문을 썼고 맞기도 엄청 맞았다. 그런데도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아이들은 줄지 않았다. 경례 거부 사건은 일파만파 커졌다. 도교위는 경례 거부 행위를 ‘중대한 반국가적 행동’으로 단정해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고, 7월 어느 날 경찰 3명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10살 남짓 꼬마들은 차례차례 심문당했다. 누가 경례 거부를 시켰느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경찰은 조직을 엮고 주모자를 만들고 싶어했다. 아이들은 종아리에 피멍이 든 채 주일학교 교사인 양영례씨 집에 찾아와 울었다. 양씨에게도 이미 경찰이 들이닥쳐 두 번이나 조사한 터였다.
“날 잡아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더라고. 사형당해도 얼른 사형됐으면 싶었어. 구속되기 사흘 전에 엄마한테 밥 해주면서 그랬지. 만약 내가 죽어도 천당 갈 테니까 걱정 말라고.”
과연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양씨를 차에 태웠다. 하룻밤을 지서에서 새고 이튿날 순천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됐다. “아이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 적밖에 없다”는 양씨에게 담당 검사가 그랬다. “다른 교회에 물어보니까, 그 사람들은 다 국기 경례를 한다고 그러는데, 너만 왜 그러냐. 미안하지만 하는 수 없다.”
7월22일 양씨는 구속됐다. 국기·국장을 비방한 혐의, 형법 106조 위반이었다. 사상범 취급을 받은지라 면회도 안 됐고 독방을 썼다. 그해 재판부는 양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양씨는 1개월여를 순천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8월 말이었다. 교도소를 나가는데 떡대 좋은 교도관이 가로막았다. “자, 이 새로 나온 맹세문 봐라. 이거 외우기 전에 절대 못 나간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충남에서 시행되던 국기에 대한 맹세를 문교부는 그해 8월9일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다시 돌아온 오사리 마을은 뒤집어져 있었다. 하룻밤에 ‘반국가 사범’으로 몰린 아들딸을 둔 주민들은 교회와 주모자 격인 양씨를 멀리했다. 주일학교에 찾아오던 아이들의 발길도 끊기기 시작했다.
소문 안 난 곳으로 조용히 시집가다
양씨의 어머니는 “큰애기가 사상범이 돼서 잡혀갔다”는 사람들의 쑥덕거림이 듣기 싫어 하루 내내 섬진강가나 뒷산에 올라가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양씨는 그해 12월에 경상도 땅 고령으로 서둘러 시집을 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감옥에 갔다온 처녀를 누가 데리고 갈 것이냐? 소문 안 난 곳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시집가야지 않것냐”고 위로했다.
김현호씨는 2년 뒤 근처 진월중학교로 진학했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퇴했다. 과거 ‘전적’이 있던지라 교사들은 “나라가 있어야 교회가 있는 법이다. 교회와 학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고, 공부하는 시간보다 벌 서는 시간이 많았던 김씨는 스스로 자퇴를 선택하고 부산으로 떠났다. 매일 양심의 시험대에 서느니,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양씨는 전남 순천으로 돌아와 난 재배업에 종사하고 있고, 김씨는 부산에서 기독교 서점을 운영하며 교회개혁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김씨는 “그 일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내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며 허허 웃었다. 그들은 지금도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 유신의 ‘국가 종교’가 신앙과 양심, 그리고 인생을 참혹히 짓밟았던,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지 못했고, 아직껏 국기에 대한 경례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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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순(49)씨는 기자를 만나길 한사코 거부했다. “그때 기자들처럼 왜 이렇게 괴롭혀요? 난 그때 생각만 해도 아프다고요. 내 인생에서 그 부분을 떼어내고 싶어요!”
어렵사리 본 박씨의 얼굴이 붉어지고 손이 떨렸다. 박씨가 1973년 9월 김해여고 1학년을 다니던 때였다. 그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적됐다. 12월22일 찾아간 경남 김해여고는 제적된 박씨의 생활기록부를 이미 폐기한 상태였다.
1973년 김해여고 국기 경례 거부 사건은, 문교부의 국기에 대한 맹세 암송 교육 지침 직후에 터졌다. 사건은 9월18일 교실에서 경례를 시키던 한 교사와 이를 거부하던 학생과의 언쟁에서 시작한다. 이 일로 국기 경례가 학교 안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연이은 교련검열대회를 준비하는 제식훈련 도중 35명의 국기 경례 거부자가 적발됐다. 학교는 이들의 이름을 게시판에 붙여놓고,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모욕을 당하도록 했다. 학교는 경례를 한다고 다짐할 때에야 이름을 지워줬다. 끝까지 남은 사람은 박씨 등 6명이었다. 윤아무개 교장은 이들을 기어이 제적 처분했다. 박씨 등은 기독교계 학교인 브니엘고로 옮겼으나, 윤 교장이 “제적된 학생은 타 학교에서 수학할 수 없다”며 교육청에 이의를 제기해 반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퇴교당해야만 했다. 당시 일부 신문은 김해여고 학생들을 ‘탈선 청소년’으로 묘사했다. 학생들은 법원에 제소했으나, 3년여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학교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3학년을 다니다 제적된 류영화(51)씨는 “잔인한 시대”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규 수업 일수에서 열흘만 더 채우면 됐는데, 끝내 졸업장을 받지 못했고, 여태껏 그것이 인생의 걸림돌이 돼왔다”며 “지금이라도 나머지 수업 일수를 채워 졸업장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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