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이 모여 바닷물 막고 척박한 농지 일군 평택 지역의 애절한 역사
피땀어린 농지가 만들어지면 가진 자들과 권력이 먼저 들어와 주인행세
▣ 김해규/ 평택 한광중학교 교사·향토사학자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12월의 밤은 유난히 춥다. 저녁 7시가 가까워오자 평택역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먼저 온 사람들은 종이 등을 손에 들고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조금 뒤에 문정현 신부, 김용한, 윤현수 미군기지확장반대 평택대책위 공동대표가 차례로 단상에 올랐다. 잠시 뒤 미군기지 확장반대의 구호가 하늘에 메아리친다. 지나가는 시민들 몇몇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할 뿐 대부분의 행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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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유배된 사람들이 모여들다
미군기지확장반대 평택대책위가 이끄는 평택역 앞 촛불집회는 오늘로 84일째다. 그보다 앞서 팽성읍 본정리 아리랑고개에서는 팽성대책위가 이끄는 촛불집회가 484일 동안 진행되고 있다. 본정리 농협 앞 노천에서 시작된 촛불집회는 추위가 찾아들면서 비닐하우스로 옮겼다. 집회 초기 평생 땅의 정직함만을 믿고 농투성이로 살아온 늙은 농민들은 미국과 정부라는 거대 공룡 앞에 작은 토끼처럼 여렸다. 두려움에 떠는 주먹을 머리 위로 치켜들지도 그렇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집회가 100일, 200일, 300일을 넘기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전사가 되어갔다. 흡사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처럼 그들은 투쟁을 통해 강하게 단련된 것이다.
평택지방은 민중의 땅이다. 이것은 단순 구호가 아니다. 지금은 수천만 평의 너른 평택평야를 기반으로 도농복합도시로 발전했지만, 본디 이 땅은 기름진 옥토가 아니었다.
동고서저형의 한반도 지형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평택은 예부터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유입되고, 광활한 간석지가 펼쳐진 땅이었다. 그래서 농경지가 부족하고 물을 얻기가 어려웠으며, 농사를 지어도 3년에 한 번 수확하면 다행일 정도였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모내기철을 놓쳐 호미모를 심거나 메밀을 심어 연명하는 경우가 흔했고, 10리·20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다 조선시대에는 우박과 해일의 피해가 심했으며, 도로·수로 교통이 발달해 지배층의 탐학과 전쟁의 피해도 자주 발생했다. 고려 후기 몽골과 왜구의 침입은 평택현과 안중 지역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의 소사벌 전투와 청일전쟁의 중심도 이곳이었으며 후방이었으면서도 한국전쟁의 피해를 많이 입은 곳도 평택이었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평택지방은 경제기반이 취약하고 생산력이 낮았으며 권력층의 탐학과 수탈이 심한 지역이었다. 이같은 지역에서는 양반 사족문화가 발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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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그들에게 토지가 척박하고 생산력이 낮으며 지배층의 간섭이 심한 평택 땅이 매력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층이 버린 땅, 국가와 권력층의 억압과 수탈이 심한 땅에 모여든 사람들은 기층 민중들이었다. 이들은 생산기반이 없어 고향에서조차 유배된 사람들이었다. 때론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바닷가까지 왔다가 정착했고, 전쟁 때 피난 온 사람, 땅값이 헐하여 찾아든 사람, 빚 받으러 왔다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은 사람도 있었다. 사연도 가지가지였던 이들은 버려진 갯벌에 원둑을 쌓아 개간을 시작했다. 도구래야 가래와 삽, 들것과 지게뿐이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이들에겐 간척이 내 땅을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부푼 꿈도 잠시, 농민들이 피땀 흘려 일군 농토를 국가와 권력층이 빼앗아갔다. 그들은 ‘무허가’ 또는 ‘국유지’라는 이유를 들어 농민들이 일군 땅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였다.
맨손으로 산을 허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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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두리벌은 350만여 평의 농경지를 보유하고 있다. 농경지가 형성되기 전 이 들판은 갯벌과 갯고랑이었고, 대추리 곤지머리와 노양리에는 나루와 포구가 발달했다. 곤지머리나루(곤지진)는 삼국시대 이후 평택현에서 건너편 계두진으로 넘어가는 수로교통과 아산만 어업의 중심이었으며, 노양리 경양포는 고려시대 이후 전국에서 가장 큰 조창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근대 들어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침식작용으로 갯벌이 메워지고 토사가 쌓이면서 나루와 포구는 기능을 상실했다.
갯벌과 나루의 기능을 상실한 이 땅이 광활한 들판으로 탈바꿈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다. 도두리벌의 간척은 고향에 송곳 하나 꽂을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의 손으로 진행됐다. 이들은 거의 맨손으로 산을 허물어 마을 앞 작은 갯벌부터 메워나갔다. 그래서 가수 정태춘의 고향이기도 한 도두리 마을에는 ‘보미사논’ ‘구원들’ ‘다섯가래논’과 같은 지명이 만들어졌다. 보미사논은 봄에 개간한 논, 구원들은 아홉 개의 원둑을 쌓아 개간한 들, 다섯가래 논은 가래 다섯 개로 개간한 논을 말한다. 바다를 메워 자기 땅을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마을의 민중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해일에 둑이 무너지면 다시 둑을 쌓고, 소금기가 많아 식수가 없으면 백반을 갈아넣어 마시며 버텼다. 먹는 것이 부실하고 식수가 좋지 않은 민중들에게 전염병은 하늘이 내린 재앙이었다. 도두리 주민 송아무개씨는 보릿고개에 호열자라도 돌면 수십 명씩 죽어나갈 때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 땅’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황해도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승만 정권은 북쪽에서 밀려드는 피난민들을 간척이 가능한 황무지와 갯고랑을 골라 집단 수용소를 만들었다. 팽성읍 지역에는 남산리, 석봉리, 신대리 일대에 수용소가 지어졌다. 수용소는 출신 지역 이름을 따서 ‘장단수용소’ ‘영창마을’ 등으로 불렀다. 정부는 이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토사로 메워진 도두리들 일부를 개간했다. 그 땅이 40만 평이라고 했던가! 더 이상 피난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피난민들은 개간사업에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마저도 주인이 될 수 없었다. 해방 전후의 혼란기에 갯벌을 자기 땅으로 등기한 봉이 김선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땅 주인은 주민들과의 갈등 끝에 이 토지를 세종대학교 재단인 대양학원에 기증했고, 주민들은 정부의 비호를 받는 거대 공룡 대양학원과 40년에 걸친 지루한 소유권 분쟁을 시작한 것이다.
대추리는 유배의 땅이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크고 포실해서 주변 동리의 부러움을 샀던 이 마을을 빼앗아간 것은 미군기지였다. 일명 캠프 험프리즈라고 불리는 팽성읍 미군기지의 역사는 일제 말 일본군 비행장 건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시체제기 일제는 중국 본토 공격의 후방 보급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안정리 일대에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다. 당시 비행장 건설은 안정리와 송화리 일대 30, 40만여 평 토지에 약 2만여 명에 이르는 징용 노동력과 평택지방 일대 민중들을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해 시행됐다. 하지만 비행장 건설은 매우 지지부진했고 안전관리도 허술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전시체제기라 보급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료를 먹지 못한 소와 노새들이 굶어죽어 앙상한 뼈만 남긴 채 길에 버려지는 사례도 빈번했다. 대추리 주민들 말로는 완공된 비행장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해방 뒤 비행장은 미군이 접수했다. 비행장을 접수한 미군은 주민들과 큰 마찰 없이 몇 년을 보내다 정부 수립 뒤 철수했다.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휴전협정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미군이 비행장을 다시 접수하면서다. 미군은 전쟁 뒤 냉전체제하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대두하자 안정리와 송탄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을 군사기지화했다. 새로운 전술개념에서 조성된 미군기지는 전쟁 전보다 규모와 인원에서 크게 확대됐다. 미군기지가 확대되면서 대추리, 안정리 서정자마을 등 새로운 공여지로 편입된 지역의 주민들은 강제 축출됐다. 정부와 미군은 짧은 이주기간을 정해주고 자진 철거를 종용했으며 불응할 때는 당시만 해도 보기 힘든 중장비를 동원해 부숴버렸다. 이주대책이라는 것도 인근의 곤지나루에 부서진 집에서 거둬들인 목재와 지급된 두 지게 분량의 목재, 그리고 하얀 천막 한 동에 두 집씩 입주하게 한 뒤 보리쌀을 한 가마씩 나눠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주민들은 크게 저항하지 못했다. 미군은 우리를 도와준 은인이라는 생각과 정부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는 봉건적 정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에 쫓겨난 빈농들의 몸부림
이주 뒤의 생활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대추리는 대부분의 생산기반이 미군기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당장 먹고살 집과 농지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이들은 대추리와 함정리 사이의 황새울들과 아직도 갯벌 상태로 남아 있던 흑무개들에 눈을 돌렸다. 황새울들은 이주 전부터 간척이 됐지만 질퍽한 수렁이어서 가격이 헐했고, 흑무개들은 개간만 하면 내 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간은 농사 일 짬짬이 진행됐다. 그래서 지명도 가을에 막았다고 ‘가을원’, 남쪽에 막았다고 ‘남원’, 당집 밑에 막았다고 ‘당집원’, 갈대가 무성한 들을 막았다고 ‘갈대원’, 흥농계 사람들이 막았다고 ‘흥농계원’, 함정리 섬마을 사람들이 막았다고 ‘섬마을원’ 등 복잡하고도 다양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 땅마저도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하지 못했다. 땅 주인이라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소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심은 모를 뽑고 모내기를 막기도 했다. 주민들은 써레질한 무논에 들어가 몸부림을 치고, 가진 자들이 좋아하는 법에도 호소했지만 권력도 법도 그들 편이었다.
30여 년 전에는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됐다. 방조제 건설은 새로운 농지를 만들어줬다. 농지가 형성되자 충청도 공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빈농들이 몰려들었다. 도두2리 신흥마을은 그 시기를 전후해 형성됐다. 이들은 농지가 있는 들판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다. 그리고 소금이 허옇게 드러나는 소금논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이들도 고통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집을 지은 대지는 말썽 많은 대양학원 땅이었고, 농사를 짓는 땅은 분쟁의 씨앗이 됐다.
농민들에게 땅은 하늘이고 희망이다. 도두리벌은 도두리, 대추리, 함정리, 신대리 주민들에게는 목숨이다. 미군기지 확장은 주민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주민들은 자기 땅에서 살다가 그곳에 묻히고 싶어한다. 그것은 땅에 한평생을 바친 농투성이의 최소한의 행복추구권이다. 그래서 오늘도 주민들은 저녁이면 아리랑고개로 달린다. 촛불을 켠다. 두 주먹을 불끈 들어올린다. 승리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양보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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