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스마일맨’으로 알려진 말레이시아 압둘라 아맛 바다위 총리 단독 인터뷰
대화 그 자체가 말레이시아의 이익, 타이 남부 무슬림에 대해선 협상 계획 없어</font>
▣ 푸트라자야=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11월7일 12시, 총리 관저’로 잡혀 있던 단독 인터뷰 시간과 장소가 같은 날 오전 10시 무렵 느닷없이 ‘오후 1시30분, 외무부 본관’으로 돌변했다. 찬란한 행정수도 푸트라자야의 외무부 로비에는 30여 명의 현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11월8일부터 동티모르 방문과 부산 APEC 정상회담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는 숨가쁜 압둘라 아맛 바다위 총리는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대신 기자들에게 점심을 돌리는 것으로 때웠다. 나는 약속 시간 오후 1시30분이 지나면서부터 장기전 돌입 태세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최고위 정치가의 인터뷰를 앞두고 팔자 좋게 소파에서 눈을 붙였다. 2시, 총리실 언론 담당 비서가 부랴부랴 달려와 외무부 고위 접견실로 끌고 갔다.
참석·협력·책임이 내 의제
접견실에는 바다위 총리를 중심으로 10여 명에 이르는 보좌관들이 원형으로 둘러앉았고, 그 뒤쪽으로는 공식 기록원, 사진사를 비롯해 총리실 공보관과 외무부 관련자들이 또 10여 명 겹겹이 둘러쌌다. 이런 ‘인해전술’과 마주치기는 처음이었다. 단독 인터뷰란 기껏해야 비서 한 명 정도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배석하는 게 보통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적진을 빼곡히 메운 병력 앞에 주눅 든 상태로 ‘일당이십식’ 희한한 단독 아닌 단독 인터뷰 자리가 펼쳐졌다.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서는, 그리하여 세상에 둘도 없는 ‘스마일 맨’으로 소문난 바다위 총리는 결코 웃지 않는 근엄한 표정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대중들 앞에서 언제나 그 백만불짜리 미소를 짓던 바다위 총리를 봐왔던 나는 적잖이 당황스런 상태로 첫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font color="6b8e23"> 먼저, 부산 APEC에 들고 갈 당신의 주요 의제부터 이야기해보자.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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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의제는 한국에서 이번 정상회담이 성공할 수 있게끔 ‘참석’하고 ‘협력’하고 ‘책임’지는 일이다. 모든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동시에 APEC 회원국들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인 무역·투자 증대, 그리고 최근 중대한 사안으로 떠오른 조류독감 같은 의제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예컨대 테러리즘같이 무역과 경제협력에 악영향을 끼칠 사안이나 또 일상적인 주제였던 세계무역기구(WTO)를 의제에 올릴 수도 있겠고. 아무튼 성공적인 APEC을 위해 문제의 근본을 서로 이해해야만 실행 가능한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상호 경제협력에 필요한 모든 안건을 다루게 될 것이다.
<font color="6b8e23">이번 APEC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특별한 의제가 있는가. </font>
=특별한 건 없다. 쌍무적인 것들은 가까이 다가온 한국 대통령의 말레이시아 방문에서 다룰 수 있겠고. 다만 우린 국경을 넘나드는 질병인 조류독감 같은 것들을 놓고 APEC에서 한국 정부의 지원과 협력을 구하려고 한다. 그 밖에는 이번 APEC에서 다자간 의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font color="6b8e23">그러면 말레이시아가 APEC 2005 참석으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가. </font>
= 앞서 말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우리는 APEC에 참석해서 회원국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할 것이고, 바로 그 자체가 말레이시아의 이익이다.
<font color="6b8e23">많은 이들이 APEC의 근본을 의심해왔다. 특히 9·11 공격 뒤, APEC이 미국의 주도권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당신은 APEC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font>
= 난 그런 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APEC은 누구의 도구도 아니다. APEC은 모든 회원국들의 소유물이며, 모든 회원국들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또 누구도 회원국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 협력이라고 한다면 그건 협력일 뿐이지, 그게 일방적이거나 누군가 의제를 지시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타이에게 해법을 지시하고 싶진 않다
<font color="6b8e23">말레이시아를 낀 국제관계로 화제를 돌려보자. 이번 APEC 정상회담에서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한 타이 남부 무슬림 분쟁을 놓고 탁신 친나왓 타이 총리와 만나 이야기할 계획이 있는가. </font>
= 그건 알 수 없다. 그 사안을 놓고 어떤 대화가 오갈지는.
<font color="6b8e23">특별한 회담 계획이 없다는 뜻인가? </font>
= 만약 그가 대화를 원한다면 나도 할 용의가 있지만, 아니라면 내가 굳이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font color="6b8e23">타이 남부 무슬림 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font>
= 말레이시아 쪽에서 보면, 타이 남부 사안은 우리에게 매우 위험한, (잠시 침묵)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지만 중대한 관심거리다. 만약 그쪽의 상황이 더 악화되면, 신변 안전을 염려해 온 수많은 타이 남부 사람들이 우리 쪽 국경을 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font color="6b8e23"> 외신기자 입장에서 정직하게 말하면, 그동안 쿠알라룸푸르와 방콕이 타이 남부 무슬림 분쟁을 놓고 외교적 충돌을 일으킨 상태에서 당신 정부는 처음부터 공격적인 탁신 정부에 대해 매우 수세적으로 대응해왔다고 보는데. </font>
= 그건 아니다. 우린 방콕과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탁신과 나는 친구고, 또 외무장관을 함께했던 시절부터 오랫동안 같이 일해왔다. 우린 남부 사안을 놓고 만나 대화를 나눠왔다. 물론, 특별한 조건들에 대해 우리 입장과 그쪽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지금도 대화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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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6b8e23">어쨌든 타이 남부 무슬림 분쟁 해법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font>
= 타이 정부가 알아서 해법을 찾겠지만, 그들이 우리와 마주 앉아 공통 해법을 찾겠다면 우리 쪽에는 문제될 게 없다. 나는 타이에게 뭘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타이 정부가 분쟁 지역에 대해 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그 지역 사람들이 계속 타이에 살면서 개발의 열매를 맛볼 수 있도록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까닭도 없이 자기 나라에서 달아나지는 않는다(지난 8월 말 타이 남부 무슬림 분쟁지역에서 주민 131명이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어 난민 신청을 한 사실을 놓고). 자, (손사래를 크게 치며) 타이 남부 사안은 이걸로 충분하다.
<font color="6b8e23">-그러면 말레이시아의 국내 사안으로 넘어가자. 곧 개각할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오는데. </font>
= (두 손을 크게 내저으며) 개각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자.
<font color="6b8e23">정치 평론가들이나 전문가들은 허가증 공개(무역장관이 관장해온 자동차 수입으로 막대한 이문을 챙겨왔던 이들에 대한 비밀 명단) 건에 관련된 라피다 아지즈(전임 마하티르 총리 직계) 무역장관이 현 당신 내각에 큰 부담거리라고 말해왔다. 이번 개각에서 그녀를 축출할 것인가. </font>
=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자유다. 어떤 이들을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부분은 최종적으로 내가 결정한다.
<font color="6b8e23">경제를 잠깐 보자. 민족자동차정책(NAP) 통과와 당신이 추구하는 말레이시아 자동차산업 개혁은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가.</font>
= 우린 말레이시아가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지닌 허브가 되기를 원한다. 강력하게 자동차 부품을 개발해서 말레이시아의 국민차뿐만 아니라 전세계 자동차산업에 공급하겠다는 뜻이다. 최고급 성능에 저렴한 가격이 목표다. 말레이시아는 그런 능력을 지녔다. 우리에겐 노하우가 있고, 숙련공들이 있다.
부정부패 척결은 전방위적이어야
<font color="6b8e23">그러면 말레이시아의 국민차를 위한 보호무역주의를 끝내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가.</font>
=영원히 보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민족산업’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일어서고 경쟁할 수 있게 된다. 다만,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민족산업’을 돕고 지원해야 한다는 뜻이다.
<font color="6b8e23">정확하게 말해서 ‘민족자동차정책’이 현대나 도요타 같은 외국 자동차 업계에 어떤 신호를 던진 셈인가.</font>
= 간단하게 말하면 말레이시아에 와서 투자하라는 신호다. 한마디로 우리 쪽 투자 풍토가 아주 좋다. 이미 다른 자동차회사들이 말레이시아에 들어와 투자하고 있다.
<font color="6b8e23">동남아시아 각국들이 자동차산업의 지역 허브를 주장해왔는데, 말레이시아가 경쟁국인 타이에 비해 어떤 장점이 있는가.</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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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국민차가 있다면, 타이엔 국민차가 없다. 이건 큰 차이다. 우리도 그쪽과 마찬가지로 세계 자동차산업들에서 개발과 서비스를 요구받고 있는 실정인데, 말레이시아는 그런 분야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지녔고 동시에 자동차를 만들고 조립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린 자동차정책으로 가장 유리하게끔 지원한다는 뜻이다. 이미 유럽의 자동차회사들이 말레이시아를 기지로 삼아 이익을 창출하고 있음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font color="6b8e23">부정부패라는 게 장애요인 아닌가? 지난 총선 때, 마하티르 전 총리와의 인터뷰에서 “압둘라 바다위가 선거공약으로 내건 부정부패 척결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낄낄 웃으며 “바다위가 확실하게 해나갈걸세. 내가 그랬던 것처럼!”이라고 매우 의미심장하게 대답하던데.</font>
=그래서 지금 내가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는가. (좌중들 속에서 웃음이 터져나옴)
<font color="6b8e23">전임 마하티르 총리에 비해, 당신이 벌여온 부정부패 척결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font>
= 원했던 만큼 충분히 척결하진 못했지만, 성공적으로 추진해나가고 있다. 부정부패 척결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부정부패 척결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체포해 법정에 세우는지에만 관심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부정부패 조사와 수사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증거 잡아내기가 쉽지 않은데다, 충분한 증거가 없으면 법정에서도 결국 무죄로 빠져나가고 만다. 결국 중요한 건, 수사뿐만 아니라 부정부패를 사전 예방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부정부패 의지를 아예 지닐 수 없도록 만들어버릴 생각이다. 예컨대 정책과 공무 결정을 최대한 빨리 함으로써 누군가 돈으로 기회를 노리게 되는 느슨한 틈새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말하자면 관료들의 지체가 부정부패를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허가 과정이 지나치게 많아 부정부패를 키우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스템과 법을 개선하고 동시에 정직과 책임에 대한 가치를 가르쳐나가고 있다. 그렇게 부정부패 척결은 전방위적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font color="6b8e23">아시아 정치가들이 흔히 아시아적 가치를 말해왔고 그 가치 속에 정직과 책임이라는 문화가 담겨 있다고 해왔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부정부패가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건가.</font>
= 나도 그건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쉽고 빠르게 부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닐까?
안와르의 제기? 내 알 바 아니다
<font color="6b8e23"> 그럼 아시아적 가치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가.</font>
= 우리 모두가 이런 주제들을 강조함으로써 부정부패가 국가나 개인 모두에게 나쁜 일이며, 사업적 비용을 높이는 불리한 일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해외 투자자들이 발길을 돌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font color="6b8e23">좀 현실적인 사안으로 넘어와서, 당신의 리더십 아래 말레이시아가 그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는 데 모두가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특히 당신이 안와르 이브라힘(마하티르 총리 정부에서 부총리 겸 제2인자였다가 부정 혐의와 이슬람이 금지한 동성애자로 몰려 투옥되면서 정치적 박해 논란을 일으켰고, 그 과정 속에서 반마하티르 정서를 지닌 서구와 말레이시아 내 야당 세력들에게 민주화운동의 상징처럼 떠오른 인물)을 석방한 뒤부터 그런 분위기가 더욱 커진 듯싶다. 안와르가 정치적으로 다시 재기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는가.</font>
= 그건 내가 알 수 없지. 그이에게 달렸고. 그는 정치가이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결정하지 않겠나.
<font color="6b8e23">당신이 생각하는 말레이시아를 위한 성숙한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font>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투표할 권리가 있다는 걸 확인시키고 싶다.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하면서 시민들이 5년마다 총선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 모두가 헌법과 법치를 존경하고, 정부는 선과 책임과 투명성이라는 관리 원칙을 지킨다. 이 모든 것들이 민주주의를 지켜가기 위해 중요한 원칙들이다.
<font color="6b8e23">시민사회는 어떤가. 당신은 개방적인 사회를 위해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할 의지가 있는가.</font>
= 우린 이미 시민사회를 위해 모든 걸 개방했다. 분명한 건 모두가 법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법이란 제국의 칙령 같은 게 아니라 의회를 통과한 것이고, 의원은 시민들이 뽑은 대표자들이다.
<font color="6b8e23">바쁜 일정 속에서 특별한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 한국 시민들에게 보낼 메시지가 있는가.</font>
= 말레이시아가 한국의 좋은 친구라는 사실을 한국 시민들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함께 투자하고 교역을 더 늘려나가길 바란다.
‘모범답안’만 풀어낸 모범생 총리
바다위 총리는 역시 알려진 대로 매우 반듯한 인물임이 드러났다. 그이는 인터뷰 내내 초등학교 교사 같은 공식적인 ‘모범답안’만을 풀어냈다. 인터뷰 전체를 통틀어 마찰도 충돌도 긴장도 일어날 소지가 전혀 없었다. 비판이라는 날이 무뎌져버린, 지루하고 꺼림칙하기로 소문난 말레이시아 신문들을 읽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대신 나는 그이가 ‘스마일 맨’일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닌 ‘인상파’임을 확인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꺼내기 무섭게, 그이는 대뜸 목소리를 높여 “왜 당신들은 늘 그렇게 안와르를 화제에 올리는가?”라며 불쾌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내가 “우린 뉴스를 좇는 사람들이고, 그이는 뉴스 가치가 큰 인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맞받아치자, 배석했던 모든 이들이 ‘과장된’ 웃음으로 분위기를 돌렸다. 그제야 비로소 바다위 총리 얼굴이 펴지면서 접견실도 밝아졌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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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 악령’이여 안녕</font>
지난 2003년 10월, 22년간 ‘마하티르 신화’를 겹겹이 쌓아올렸던 마하티르 전 총리가 눈물로 매달리는 ‘충신’들을 뿌리치고 총리실을 떠날 때만 해도 말레이시아 시민들은 미래를 의심했다. 그리고 2004년 3월, 마하티르의 그늘 아래 숨죽여 살아왔던 압둘라 아맛 바다위가 말레이시아연합국민기구(UMNO) 간판을 대신 메고 총선에서 홀로서기를 시도할 때만 해도 말레이시아 시민들은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바다위는 총선에서 여당 연합체인 민족전선(BN)을 내세워 의석 90%를 장악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마하티르의 공격적인 독설과 대조를 이룬 바다위의 부드러움은 성공적인 팍라(Pak Lah·바다위를 일컫는) 현상으로 결판났다. 그 무렵 바다위는 ‘부패척결’과 ‘경제개발’ ‘대안적 진보’ ‘관용적 현대 이슬람’을 담은 ‘이슬람 하다리’(Islam Hadhari·이슬람 통치)를 선언하면서 무슬림과 비무슬림 모두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바다위 총리는 끊임없이 ‘마하티르 악령’에 시달리며 ‘의심받는’ 제1인자로 지난 1년 반을 지나왔다. 공교롭게도 그이와 인터뷰를 한 11월7일 조간신문들에는 “절대로 정계 복귀는 없다”는 마하티르 전 총리의 성명서가 실렸다. 바꿔 말하면, 이건 현직을 떠난 마하티르가 원하건 원치 않건 여전히 말레이시아 정치판에 도화선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나라 밖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의욕적인 해외 방문과 강연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는 마하티르는 국제사회에서도 여전히 말레이시아의 ‘대표선수’로 강렬하게 각인돼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바다위 총리가 지난 1년 반 동안 자신의 성격대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영역을 확대해왔다는 사실이다. 아시아 정치판에서 보기 드물게 ‘깨끗한 손’으로 불리는 강점을 살려 부정부패 척결 카드를 빼들고 마하티르 구식 진영을 압박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고, 밖으로는 타이 남부 무슬림 분쟁을 낀 타이 정부와 외교전에서 밀리지 않는 강인한 인상을 심어 ‘국제용’으로도 손색없음을 인식시켜나가고 있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난 현재, 말레이시아 사회가 지녔던 그이에 대한 의심은 서서히 걷혀가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소문난 잉꼬부부였던 바다위 총리는 지난 10월20일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내면서 시민들로부터 감성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어쨌든 바다위 총리의 지반 다지기는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1인 장기 집권 후유증을 앓고 있는 아시아 정치판 전체에 중요한 ‘시험용’으로 떠오른 셈이다. 그러나 아직 바다위 총리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그이 앞에는 깨끗하게 걷어내야 할 ‘마하티르 악령’ 말고도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개방과 민주화라는 큰 장애물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다위 총리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건 진검승부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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