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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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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노라 치료했노라 추웠노라

등록 2005-11-03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비야의 파키스탄 리포트 4일째]

공병대가 길을 뚫어줘서 간신히 도착한 자보리 인근 산간마을
오늘 우리 아니었으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을 주민들을 돌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른 하늘부터 보았다. 아직 흐려 있었지만 멀리 보이는 구름이 밝은 하얀색이라 약간 안심이 되었다. 긴급구호팀은 한 가지 상황에 대해 항상 세 가지 계획을 세워놓는다. 최선의 경우: Plan A, 최악의 경우: Plan C,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경우: Plan B. 오늘의 Plan A는 말할 것도 없이 계획대로 자보리로 가서 순조롭게 진료를 하고 오늘 안으로 만세라로 돌아오는 것. Plan B는 자보리에 가되, 오는 길이 순조롭지 않아 현장에서 일박하는 일. 이럴 경우에 대비해 침낭 등 하루 묵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떠나야 한다. Plan C는 어제처럼 길이 막혀 아예 자보리에 접근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 오전까지는 노력을 하겠지만 시간은 금인지라 대신 만세라 근처에서 진료활동을 한다.

아지즈 사단장의 특별명령

우리 차가 산길에 접어들자마자 일군의 군인들이 길목을 막아섰다. 어제 여진으로 자보리까지 가는 길에 6군데나 산이 무너져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는 어제 이 길을 가지 못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건 그렇고, 갈 수 있으면 가야 하는데. 군인들의 말투와 태도로 봐서는 무조건 못 가게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파키스탄에서 유일하게 조직과 물자와 인력과 결단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가 군부라는 것을 누누이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자보리에 가려는 목적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들은 인도적 구호단체가 의료진과 함께 한국에서 왔다는 내 말에 관심을 보였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이 지역 사단장의 비서급 장교여서 당장 우리를 사단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결과는? 우리를 안내해준 핫산 장교가 직접 공병을 앞세우고 길을 뚫어가며 자보리까지 호위해주라는 아지즈 사단장의 특별명령. 우리끼리 갔더라면 하루 종일도 모자랐을 거리를 덕분에 3시간여 만에 갈 수 있었다. 땡잡았다.

그런데 자보리에서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겠는가. 바로 별 셋의 사단장이었다. 그는 우리 의료진에게 당장 후송이 필요한 중환자 2명의 상태를 체크해달라고 부탁했다. 외과의사가 보고 환자가 골절이 심해 당장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소견을 말해주었더니 매우 흡족해하며 그렇게 하겠단다.

자보리에서 약 30분쯤 차를 타고 방금 뚫린 것이 분명한 산길을 따라 다시 나와자바드라는 곳으로 갔다. 국경 끝 북쪽 산간지방으로 가기 위한 전진기지다. 이곳에는 병력 350명 정도의 중령이 이끄는 병영이 있었는데, 아지즈 사단장이 뭐라고 일러놓았는지 아주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원래의 계획대로 길이 뚫리는 즉시 공병을 따라 의료진이 전혀 닿지 않은 마을로 들어가기로 했다.

“오늘 오전 중에 새로 뚫린 길은 어디인가요?” 중령에게 물었다. “자바까지는 뚫렸습니다.” “지진 뒤에 처음 길이 열렸으니 부상이 심한 환자들이 많을 텐데…. 오늘 오후 거기서 진료를 해도 괜찮을까요?” “오늘요? 지금이 벌써 2시인데….”

동행 의료진의 결의에 찬 표정을 둘러보고 확신을 한 내가 자신 있게 말했다.“여기서 거기까지는 차로 30분, 진료소 차리는 데 20~30분, 그러면 5시까지 적어도 2시간 정도는 환자를 볼 수 있으니 갈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중령은 옆에 있던 소령에게 인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곧 소형 버스에 있던 의약품 등 짐을 작은 지프차 두 대에 나눠싣고 아직 위험천만한 길을 따라 더 북쪽 산골마을로 떠났다.

두개골 갈라진 아이, 피똥을 싸는 아이…

자바에 도착하자마자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개미처럼 달라붙어 이동진료소부터 설치했다. 우선 천막 4개를 치고 외과, 내과, 한의과 병동, 약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놓은 환자 접수대를 만들었는데, 접수대에서 환자를 받아 각 과로 보낸 뒤 처방을 받아 약국을 거쳐 진료 과정을 마치는 것으로 했다. 천막마다 필요한 물품을 배치하고 약국 약들을 배분하기 좋게 늘어놓고 만들어간 ‘월드비전 - 안양 샘병원 파키스탄 긴급 의료 지원’이라고 영어와 한글로 쓴 현수막까지 걸어놓으니 20여 분 만에 이동병원이 완공(?)되었다. 어디서 그런 일사불란함이 나오는 건지. 훈련 잘 받은 병사들까지 이러는 우리를 외계인 보듯 한다.

오후 3시, 드디어 첫 진료가 시작됐다. 우리가 진료소를 꾸미는 동안 소문을 듣고 온 환자 100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아주 심한 외상환자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지진 때 무너지는 지붕에 맞아 머리의 두개골이 완전히 갈라진 아이, 오른쪽 다리로 벽이 무너져 뼈와 힘줄이 다 보이도록 깊게 상처가 난 할아버지, 갈비뼈가 잘게 부서져 내장을 모두 찌르고 있는 젊은 여자, 지진이 날 때부터 피똥을 싸느라 완전히 탈진한 2주 된 아이까지, 우리가 오늘 들어오지 않았으면 내일까지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몇 명은 도저히 우리 손으로는 어쩔 수 없는 중환자여서 중령에게 보고해 헬기를 띄워 후방으로 즉각 후송했다.

한국말과 영어와 우루드어에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한참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병영에 있던 군인들이 일제히 얼어붙은 동태처럼 빳빳해져서 누군가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허리를 펴고 돌아보니 아니, 아지즈 사단장이 눈앞에서 싱긋이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랍고도 반가워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앗 살람 알레이쿰. 사단장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여러분은 멀리 한국에서도 오셨는데 제가 여기까지 왜 못 오겠습니까? 그런데 금방 도착했을 텐데 벌써 진료를 시작한 건가요?”

“네. 한국 사람들이 좀 행동이 빠르거든요. 환자들을 한시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놀랍습니다. 여러분께 마음 깊이 경의를 표합니다.”

사단장은 의료진 한명 한명과 악수하며 고마움을 전했는데, 경의의 표시로 우리에게 거수경례까지 붙일 때는 황공해 몸둘 바를 몰랐다. 옆에 있던 자바 캠프의 지휘관인 타무르 소령도 덩달아 신이 나서 싱글벙글이다. 라마단 단식 때문에 입술이 하얗게 갈라진 채로 말이다.

산속이라 해가 빨리 지고 5시40분경까지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5시 정도에 진료를 마쳤다. 그 1시간 반 동안 본 환자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거나 사지를 절단할 뻔한 사람을 포함해 81명이었다. 약국이 갖가지 처방에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세트 처방으로 외상, 소화기, 호흡기 등 가장 기초가 되는 약들을 미리 봉지에 수천 세트 담아왔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떤 의료진과도 쓸 수 있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아,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나는 동지애여

우리는 그날 만세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가 진료를 하는 사이 자보리까지 가는 길이 무너진데다 깜깜한 밤길을 간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까. 별수 없이 병영에서 일박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 8명은 남녀 구별 없이 대형 천막 하나에서 모여 자기로 했다. 해가 지면 기온이 뚝 떨어져 한 사람의 온기라도 아쉬웠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취사병이 만든 차파티와 볶음밥, 감자 반찬과 우유가 듬뿍 든 차이를 먹고는 이만 겨우 닦고 잠자리에 들었다. 침낭을 깔고 군용 담요를 깔고 덮었지만 땅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와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옷이란 옷은 몽땅 껴입고도 모자라 수건을 목에 두르고, 머리에 모자 대신 비닐봉지를 쓰고, 있는 대로 몸을 잔뜩 움츠리고도 밤새도록 달달 떠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등산 다니면서 겨울 야영을 많이 해본 나에게도 이렇게 추운 날씨가, 만날 진료실에서만 사는 ‘진료실 귀신’들에게 얼마나 가혹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우리는 체면 볼 것 없이 양처럼 모두 어깨가 딱 붙을 정도로 붙어서 잠을 청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찬 데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아 서로 소곤소곤대다 보니, 갑자기 확 친해진 듯한 느낌이다. 함께 덮고 있는 담요를 들썩이면 옆사람이 추워질까봐 숨도 마음껏 쉬지 못하고, 괜스레 옆사람의 드러난 어깨를 담요로 여며주게 된다. 아, 척박한 환경에서 새록새록 피어나는 동지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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