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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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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불나요, 가슴에 불나요”

등록 2005-11-03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비야의 파키스탄 리포트 5일째]

자바캠프에서 만난 환자들, 여성은 나이건 임신 여부건 당최 말을 안하니…
플라스틱 한장 깔고 자며 겨울을 날 식량도 없지만 하산하지 않는 사람들

새벽녘에는 여진으로 땅이 마구 흔들렸다. 처음에는 골골골 소리를 내며 미동이 감지되더니 한 5분 정도 있으니 놀이동산의 탈것이 서서히 움직일 때만큼의 진동이 일면서 발밑으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료진들은 약간 당황해했다. 나 역시 놀랐지만 짐짓 의연한 척했다. 이런 경우 팀장이 얼마나 태연한 척하는지가 팀원들 마음의 안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짐꾼이라도 하겠다는 부잣집 아들 이샴

자바 캠프의 총책임자인 35살의 타무르 소령은 집안이 3대째 군인인 장군의 아들인데, 현주민들을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병사를 둘씩 짝지어 산골마을 곳곳에 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 의사가 진료한다는 것을 알리고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환자들은 들것에 실어 날랐다. 고통을 겪는 마을의 한 사람이라도 더 오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침 8시30분쯤 캠프에 도착하니 벌써 150여 명 정도가 길게 줄을 서 있고 어제보다 심한 외상 환자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통역으로는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난 자원봉사자인 20대 초반의 이샴과 카자르, KBDO 소속 자원봉사자 아가와 와카르가 있었다. 이샴과 카자르는 미국 유학을 마친 컴퓨터 공학도고, 아가와 와카르는 만세라에서 내로라하는 보석상과 변호사였다. 특히 부잣집 아들로 곱게 자란 이샴은 하루하루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라마단 기간이라 아침을 먹으려면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지만 잠을 자느라 아침을 놓치기 일쑤였고, 고생해본 경험도 없는 아이가 그 추운 병영에서 며칠을 보내니, 얼굴이 나날이 수척해졌다. 보다 못한 내가 “이샴, 너 집에 가야겠다. 그러다 쓰러지겠어.” 그러자 이샴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런 말 마세요. 우리나라랑 아무 상관없는 나라의 누나들도 여기 와서 열심히 일하는데. 전 파키스탄에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파키스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죠.” 그러면서 진료가 시작된 접수대로, 내과 병동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하루 종일 같은 말을 계속 하면서 우리를 도왔다. 그런 이샴을 보면서, 문득 우리나라에 재난이 났을 때 부잣집 유학파 젊은이가 과연 달려와 팔을 걷어붙이고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와 와카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어느 보석상과 변호사가 의료진의 짐꾼이 되어 의약품을 나르고 잔심부름을 할까. 사회적으로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자연스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이들이 멋져 보여서 함께 일하는 내내 즐거웠다.

일손이 모자라면 나도 접수를 도왔는데, 접수할 때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여자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줘야 말이지. 접수에는 이름과 나이, 임신 여부 그리고 어디가 불편해서 왔는지를 적어야 하는데, 여자들은 이름까지는 모기만 한 소리로 말해주지만 나이부터는 입을 다물고 웃고만 있다. 그냥 알아맞혀보라는 식이다. 아니, 그보다 자기 나이가 얼마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나이는 말해주는 것보다 한 10살은 많다고 생각해야 한다. 어떤 파파 할머니는 자기 나이를 자신 있게 25살이라고 해서 나도 자신 있게 52살이라고 적었다.

큰아이와 남편을 잃고 아이는 전신화상

“얍카카 남해?”(이름이 뭐죠?)

“우므르 캐트내해?”(몇 살이에요?)

"타클리프 카해?”(어디가 아파요?)

이 세 마디는 하도 많이 써서 죽어도 안 잊어버릴 것 같다.

임산부에게는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약이 있기 때문에 임신 여부를 꼭 알아야 하는데, 절대 말을 해주지 않아서 내과의사가 무척 곤란해했다. 모두 헐렁한 옷을 입고 다녀서 그냥 봐서는 알 수가 없다. 타무르 소령의 말로는 시골 마을에서 여자의 임신 여부는 친정아버지나 오빠는커녕 친정어머니나 언니도 물어볼 수 없단다. 자기 남편 이외에는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보아서도 안 된다는데, 젊은 남자가 통역이라고 앉아서 임신을 했느냐고 물어보니 누가 대답을 할 것인가.

증상을 얘기할 때도 부인질환은 부끄러워 얘기 못하고 그저 기침이 나느니 토한다는 말만 한다. 여자 의사가 두 분이나 있지만 우르두어를 못하니, 청진기를 대고 자세히 물어보기 전에는 알아낼 수가 없어 시간이 무한정 들었다. 외상 환자들이야 한눈에 척 알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내과 증상을 얘기할 때는 아래와 같은 표현으로 사람을 웃기고 만다.

머리에 불이 있다는 고열, 가슴에 불이 붙었다는 격심한 기침, 대변 대신 물과 피가 나온다는 심한 설사, 저녁에만 생기는 현상으로 까만 눈이 노랗게 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벌벌 떤다는 간질로 추정, 며칠 만에 대변을 보았더니 고기가 함께 나왔다면 치질인가?

한 12시쯤 외과 텐트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얼른 가보니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채 그대로 땅으로 굴렀는지 흙투성이 온몸에 화상을 입은 3살 남짓의 여자아이를 외과의사가 알코올로 닦아내고 있었다. 아랫마을에 사는 아이인데, 아 이걸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의사가 있을 때 다쳐 응급처치라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동진료소가 떠내려갈 듯 울어젖히는 아이를 젊은 엄마는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 지진으로 큰아이와 남편을 잃었다는데, 하나 남은 아이마저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얼마나 망연자실하겠는가? 조그만 아이의 얼굴과 팔 다리를 붕대로 친친 감아놓았더니 꼭 미라 같다. 의사 말로는 화상이 깊어 상처가 많이 남을 것 같다는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큰 병원에 가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병원까지 누가 데려갈 것이며, 병원비는 무슨 수로 낼 것인가?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더 상처를 소독해주고 깨끗한 붕대를 감아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게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진 다신 안 와”라는 거짓말

오후가 되니 진료소 천막마다 “아차, 아차!”(그래요, 그래요), “티이케, 티이케.”(알았어요, 잘되었어요)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걸 보면 병원(?) 시스템이 그런대로 잘 돌아가는 것 같다. 드디어 내 볼일도 좀 볼 수 있겠다. 이번 파견근무 중 내가 해야 할 일은 긴급구호 의료활동과 함께 다양한 현지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어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긴급구호 단계 뒤 어떤 프로그램을 지원해야 할지 알아보는 것이다.

우선은 타무르 소령이 사탕으로 한 20명쯤의 아이들을 꼬드겨 모이게 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은커녕 외국인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동글납작하게 생긴 우리를 신기하게 보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가 “앗살람 알레이쿰”이라고 인사를 하면 그저 멀리서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앗살람 알레이쿰”이라고 대답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만 굴리고 있었다. 우리를 서로 앞에서 보려고 밀치다가 아이들끼리 싸우기도 했다.

소령의 통역으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10월8일 지진이 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니?” “갈갈갈갈 산이 이상한 소리를 냈어요.” “나는 발밑에서 괴물이 산을 들어올리는 줄 알았어요.” “먼지가 많이 나서 앞이 안 보였어요. 무서워서 엄마만 찾았죠.” “나는 무너진 벽에 몇 시간 깔려 있었어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어요. 여기 이 멍은 그때 다 든 거예요.” “요즘도 매일 여진이 있는데 무섭지 않니?” “무서워요. 얘는 매일 오줌을 싼대요.”

10살 정도 된 오빠가 어린 남동생을 가리키며 고자질한다. 자기 얼굴에도 두려움이 가득한 줄은 모르고. “너희 중에서 식구가 다치거나 죽은 사람 있니?” 내 우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왜 아닐까. 인구 4천여 명이 있는 마을에서 600명 이상이 죽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직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다. 그러더니 아까 그 녀석이 나에게 묻는다. “큰 지진이 또 올까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 산골 마을에는 또 다른 지진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한데. 보통 큰 지진이 일어나면 지반이 제자리를 찾느라 여진이 사나흘 정도 있다가 사라지는데, 이번에는 일주일이 넘도록 거의 매일 새벽에 서너 번씩 진동을 하니 그런 소문이 무성한 게 오히려 정상일 거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물론 다시는 안 와.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왔겠니? 안전하니까 너희 마을에도 온 거지. 안 그래?” 아이들의 얼굴에는 일순간 안도의 빛이 지나갔다.

아예 5일 정도 눌러 있자고!

조금 뒤에 이웃마을의 지도자를 비롯한 마을 유지들 한 10명 정도와 그룹 인터뷰를 했다. 군 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2만여 명이 살고 있던 이 지역은 가옥의 95%가 파괴됐고 1729명이 사망, 3300명이 다쳤다고 한다. “뭐가 제일 필요하세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텐트와 담요죠. 벌써 땅에서 냉기가 올라오는데 은 플라스틱 한 장을 깔고 지내려니 힘들어요.” “무너진 집에서 무엇이라도 꺼내어 얼기설기 집이라고 지어놓고 지내기는 하지만 이렇게는 도저히 겨울을 넘길 수 없어요. 이제 앞으로 한 달만 지나면 눈이 올 텐데 걱정입니다.” “식량은 충분한가요?” “여기 산골에는 옥수수 농사밖에 안 돼요. 보통 때도 1년에 3∼4개월치의 식량을 확보할 수 없죠. 그래서 한 집에 한 사람은 도시나 인도 등 다른 나라에 가서 돈을 벌고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죠. 지금은 라마단 기간이라 그나마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하지 않지만 라마단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정부에서는 만세라 근처에 5천 가정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천막촌을 만들어 일단 이재민들의 겨울나기를 돕겠다고 하던데, 왜 그곳으로 안 가죠?” “우리는 고향을 떠날 수 없어요. 우린 가난하고 가진 것도 없어서 일가 친척들이 모여 살지 않으면 안 돼요. 그저 텐트와 담요와 약간의 식량만 있으면 우리끼리 겨울을 날 수 있답니다. 우리는 안 내려갈 거예요.”

오후 5시, 해가 지기 시작하니 날씨가 다시 으슬으슬해진다. 진료를 마칠 시간. 이틀 동안 우리의 온갖 수발을 들어주던 정든 분대원들, 동네 유지들과 타무르 소령과 기념사진을 찍고 한 줄로 서서 “미션 컴플리티드”라고 크게 소리친 뒤 자바 이동진료를 마쳤다. 진료 차트를 정리해보니 그날 하루 진료와 투약 환자 수만 무려 220명이었다.

오늘도 길이 막혀 만세라로 돌아가기는 글렀다. 의료진들에게 아예 5일 정도 여기 있을 각오를 하라고 했다. 왔다갔다 길에서 시간을 없애느니 한 환자라도 더 돌보는 게 좋을 테니 그냥 안 감은 머리, 냄새 나는 발 같은 건 서로 좀 참아주면서 지내자고 했더니 군말이 없다. 역시 멋진 비정부기구(NGO) 협력 의료진이다.

저 집의 사람들은 살아남았을까

천막으로 돌아오니 우리를 돌보는 라시드 취사병이 따뜻한 차를 만들어 내놓는다. 차를 마시며 건너다본 천막 바로 앞에는 이번 지진으로 무너진 집들이 언덕에 반쯤 걸쳐 있다. 처음에는 그나마 언덕 위에 있더니 그사이 몇 번의 여진 때문에 내려온 거다. 저 집에 살던 사람은 살아남았을까? 살아남았다고 해도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를 닦으러 밖으로 나왔는데, 깜깜해진 밤하늘에 보름에서 이틀 정도 모자란 노란 달이 떠 있다. 그 옆의 큰 별은 무엇일까? 앞에 흐르는 개울 소리도 맑고 깨끗하다. 이렇게 대자연은 ‘무슨 일 있었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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