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국민의 정부 창조적 계승’은 호남엔 청산으로 영남엔 보여주기용으로
대북정책과 정치개혁 작업 역시 김대중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어</font>
▣ 신승근 기자 whanita@freechal.com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전임 대통령 DJ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실의 이면에는 현직 대통령 노무현의 고민과 한계가 존재한다. 이른바 ‘노무현의 DJ 딜레마’다. 노 대통령은 집권 5년 동안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나름의 역사를 써야 한다. 당연히 전임자인 DJ 유산을 계승할 뿐 아니라, 그 한계를 극복하고 때로는 청산해야 한다. 하지만 확고한 정치적 기반 없이 DJ의 정치적 자산인 민주당 후보로 DJ 지지자, 특히 호남 유권자의 전폭적 지원 속에 집권한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그런 시도는 번번이 ‘DJ의 현실적 힘’에 부닥치고 굴절되는 것이다.
대북송금 특검에 맺힌 한은 남아
물론 노 대통령은 전임자에 대한 청산과 극복, 차별화 과정을 통해 권력기반을 다져온 과거 대통령들과 참여정부는 다르다고 외친다.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국민의 정부 5년에 대한 반성과 창조적 계승’을 참여정부의 새 국정목표로 설정했고, 노 대통령 역시 취임 뒤 일관되게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 정책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 대한 창조적 계승’이라는 노 대통령의 국정지표는 구체적 실천 과정에서 항상 구 동교동과 민주당·호남 유권자들에게는 ‘DJ 청산과 단절’, 한나라당과 영남 유권자들에게는 ‘노통의 영남 보여주기용 정치술’로 해석됐고,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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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이 취임 초 DJ의 주요 업적인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시켰다며 ‘평화·번영 정책’를 주창했지만 집권 초반 불거진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면서 그 진정성은 부정됐다. 당시 노 대통령은 “남북 화해는 옳지만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거 시대의 뒷거래 관행은 근절돼야 한다”고 밝혔다. DJ의 계승 발전 논리인 셈이다. 하지만 DJ와 그 지지자 상당수는 6·15 남북정상회담을 주도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민족적 지도자 ‘DJ에 대한 차별화’로 받아들였고, 노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은 그만큼 약화됐다. 지금까지 DJ 정권의 핵심 실세, 구 동교동 인사들은 참여정부 출범 2년 반 동안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고, 호남에서 노 대통령이 의심받는 이유를 대북송금 특검에서부터 찾는다. 구 동교동계의 한 전직 의원은 “지금 국내 언론사들조차 북한에 돈을 주고 취재하는데, 당시 어떻게 북한에 뒷돈을 안 주고 남북관계의 획기적 물꼬를 틀 수 있었겠냐”면서 “대통령의 특권인 거부권을 행사해 민족의 화해를 위해 목숨 걸고 북한에 간 DJ의 결단과 용기를 보듬지 못한 채 남북간의 외교적 뒷거래까지 까발린 것에 대해 DJ와 그 측근들은 아직도 가슴에 한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다른 방식의 남북관계를 시도했지만, DJ 벽에 발목을 잡힌 꼴이 된 것이다.
김대중 기념사업비 전격 지원했건만…
노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추진해온 지역패권적 정당구조 개혁과 망국적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권위주의적 권력문화 청산을 위한 탈권위 드라이브와 과거청산 작업 역시 ‘DJ 딜레마’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노 대통령은 대선 때 자신을 뒤흔들었던 후보단일화협의회 인사들과 구 동교동계가 주도권을 장악한 민주당으로는 시대적 요구인 민주정당·전국정당을 실현할 수 없다며 신당 창당을 결행했다. 하지만 민주당 사수파들이 DJ가 만든 반세기 정통 야당을 분열시키고 노무현 당을 만들려는 ‘탈DJ, 팽호남’ 음모로 맞섰고, 끝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할됐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인사들 상당수는 지금까지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각종 선거전에서 고전하는 이유를 두 당의 지지층 분할에서 찾고 있다. 결과적으로 ‘DJ 딜레마’는 노 대통령의 민주정당·전국정당 건설론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셈이다.
최근 노 대통령이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제안한 한나라당과 대연정론, 국정원의 DJ 정권 시절 불법도청 발표가 ‘DJ 청산을 위한 광주학살의 원흉과의 야합 음모론’로 확대되는 바탕에도 ‘노무현의 DJ 딜레마’가 있다.
김형준 교수(국민대 정치학과)는 “노 대통령이 연정론과 국정원의 김대중 정부 시절 도청 발표의 순수성을 강조하지만 비주류로 소외받으며 오랫동안 DJ와 동고동락하며 형성한 정서적 일체감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호남 유권자들은 기본적으로 노 대통령의 ‘3김식 지역주의’ 청산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면서 “노 대통령이 나서면 나설수록 호남 유권자들의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고,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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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핵심인사, 열린우리당 관계자들 대부분은 ‘지역적 독식에 기반한 낡은 정치지형 타파’와 ‘과거 권위주의 시절 권력기관의 악행 청산’이라는 노 대통령의 논리를 역설하며 ‘음모론’은 민주당·한나라당·보수세력이 만들어낸 정치적 공세라고 해명한다. 친노 직계로 분류되는 서갑원 의원(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은 ‘내 업적을 남기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만들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자주 말해왔다”면서 “DJ와 갈등, 또는 DJ 극복이나 청산 의도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서 의원은 오히려 “IMF 사태를 극복하고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연 DJ조차 집권기간 내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을 간곡히 호소했지만, 한나라당은 물론 현 민주당 지도부조차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며 “DJ가 좌절했던 과업을 노 대통령이 자기 권력의 절반을 내주면서까지 완성하려는 것을 ‘DJ 청산 음모’로 모는 것은 DJ를 팔아 이익을 챙기려는 정치집단의 공세”라고 비판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지난 4월 김대중 도서관이 추진 중인 김대중 기념사업비 124억원 가운데 48%인 60억원을 국고에서 지원하는 결정을 할 당시 노 대통령의 태도를 설명하며 “대통령은 항상 DJ를 항상 존경하고 있고, 뭔가 하나라도 더 해드려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많은 참모들이 ‘박정희 기념관 문제도 종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반발과 비판에 예상된다’며 반대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런 반론과 공격은 내 몸으로 막겠다. 김 전 대통령이 좋아하실 일이라면 무조건 해드려라. 빠른 속도로 해드려라’고 지시해 60억원 지원이 성사됐다”고 말했다.
“의도 보다는 일반인의 인식이 중요”
그러나 청와대와 여권의 끝없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의 정치행위는 DJ를 통해 해석되고 윤색될 수밖에 없다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유명 사립대 교수는 “정치는 내면의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의도가 나타낸 행위의 결과와 일반인의 인식이 중요하다”면서 “국민이 DJ와 노 대통령간 싸움이 붙었다고 인식하는 한 노 대통령쪽의 설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진정성보다는 DJ와 노 대통령 사이에 현실적인 정치역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명 여론조사 전문기관 소장도 “노 대통령이 DJ 정권의 계승 발전을 외치지만 본질적으로 한반도 문제 등 주요 국정과제에 대한 시각 차이가 존재하고, 거기서 두 사람의 갈등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한편,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는 노 대통령의 주요 행보를 ‘영남 보여주기 심리’로 설명한다. 강 교수는 <인물과 사상> 8월호에서 “민주당 분당은 ‘10석을 건지더라도 전국정당을 하겠다’는 명분과 더불어 자신의 정치적 고향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노무현의 강력한 의지가 만들어낸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표는 호남에서 얻고 공은 영남에서 들이는 상황에 대한 호남의 반발을 무마하고 선거 때마다 호남표 이탈을 막기 위한 차원에서 김대중에 대한 상징적 예우도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 대통령의 김대중 기념사업 국고지원 등을 이런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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