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케이드 안에서 국가와 싸운 전공투 세대, 아버지 시노하라 이쇼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일본의 이중성을 이해해야 일본인이 보인다
▣ 도쿄=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시노하라 이쇼. 1951년에 태어나 이제 54살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 지역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다리 하나가 불편해졌다. 초등학교 때 기억나는 건 다른 친구들은 뛰는데 나는 뛰지 못해 너무 안타까웠다는 점이다. 하루는 체육 시간이라서 다른 친구들은 뜀틀 뛰기를 하는데 나는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내게 두 팔을 벌려보라고 하셨다. “너는 이만큼이다” 하면서 나를 인정해주셨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투쟁의 연장, 직장에서도 노조 활동
우리 또래들은 전쟁 이후 진주한 미군을 따라다니면서 ‘기브 미 초콜릿’ ‘기브 미 추잉껌’ 하던 세대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잊지 못할 분이다. 베트남 전쟁 사진집을 보여줬는데 충격적이었다. 사회 문제에 눈을 뜬 계기였다. 고등학교 때는 최지우씨 같은 유명한 여배우가 우리 학교에서 영화를 촬영한 게 기억난다. (웃음)
1971년 도쿄 요쓰야에 있는 소피아대학(상지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우리는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세대다. 헬멧과 곤봉으로 상징되는 투쟁의 시기였다. 전공투 투쟁은 1968년 도쿄대 의학부에서 시작됐다. 인턴들이 가까운 곳에 무급으로 일하도록 돼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돈도 안 받고 무리하게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일어났다. 또 학비 인상 반대투쟁도 거셌다. 부자들만 다니는 곳이 대학이냐는 비판이었다. 도쿄대에서 전국 국립대와 사립대로 퍼져나갔다. 당시 운동은 조직적으로 계획되지는 않았지만 한번 불붙은 투쟁은 자연스럽게 전국으로 번져갔다. 사회적 배경이나 시대 상황도 한몫했다. 베트남전이 있었고 일본 국내에서는 일-미 안전보장조약을 다시 체결해야 할 시점이었다. 게다가 학생 몇명이 국회의사당 경관에게 맞아 숨졌다. 도쿄대 의학생인 간바 미쓰코였다. 데모대와 경찰의 격전 과정에서 깔려죽은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 이데올로기적 일치는 적었지만, 감정이 일치했다. 세대적인 정체성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수험 전쟁을 벌이다 대학에 들어간 뒤 쌓인 게 한꺼번에 폭발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사회는 바리케이드 밖에 있었고, 우리는 바리케이드 ‘안’에서 ‘함께’ 있었다. 전공투 세대는 이후 공산당이나 사회당 등 야당이나 시민단체로 많이 들어갔다. 여성들은 지방자치단체 의원으로 많이 활동한다. 지역운동과 생활네크워크쪽도 활발하다.
대학 시절 유행하던 노래가 있었다. ‘딸기백서 한번 더’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노래다. “취직이 정해져서 머리를 자르고 와서는 더 이상 젊지 않아…” 하는 뭐 그런 식의 가사다. (그는 직접 노래를 불러주었다) ‘홈리스’(homeless·집이 없는 사람)가 되면 안 되니까 대학을 졸업한 뒤 1976년에 ‘우정국’(우체국)에 취직했다. 대학 때 우리가 주장했던 내용을 직장에서 실현해보자는 논의도 있었다. 체신노조에 가입해 활동했다. 정월이 되면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연하장을 돌리는 일본의 풍습이 있어서 우정국이 엄청나게 바빠진다. 우리는 그 일을 거부하는 식의 파업도 벌였다. 징계 처분도 많이 받았다. 그 과정에서 해고당한 사람도 많았다.
사회적 발언이 중요했던 시대는 가고…
당시 사회는 우리에게 너무 과격하다고 비난했고, 우리는 직장에서 고립됐다. 노조활동을 하기에도 벅찬 시대였다. 직장을 계속 다니다가 2002년에 퇴직했다. 그리고 내 차 번호도 2002번이다. 나는 장애인이라서 남보다 10년을 먼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0대에 퇴직했다. 일단 아내가 일(교사)을 하니까 경제적인 고민은 덜하다.
요즘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방에 틀어박혀 몇달 동안 외부와 접촉을 끊는 현상)가 심해졌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점수 받아야 하는 게 교육의 목적이 되니까 그런 가치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부등교 학생’(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이 된다. 아이들 잘못이 아니다. 그런 걸 강요하는 사회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딸은 내가 다닌 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때는 워낙 친구가 많았다. 그런데 딸의 한 친구가 ‘이지메’를 당했다. 당하는 친구를 위하려다가 자기도 이지메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딸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의 숲 학교’로 보냈다. 대학 진학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도록 하니까 그런 점이 좋았다. 아들도 중학교·고등학교 6년 동안 따로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도 좋은 사립대학에 들어갔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안 받으니까 오히려 대학에 가서는 여러 가지 학문에 관심을 보이더라. 경쟁을 하지 않는 학교에 보낸 것이 너무 다행이다.
아들 딸 세대는 우리보다 사회적 관심이 없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다. 35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지금 젊은 세대가 무기력해 보이지만 그들은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정말 사회적 발언이 중요했지만 내 아이들 세대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8·15를 중요하게 생각한다지만, 일본에서는 조선반도에서 있었던 일을 일반 시민들이 잘 모른다. 현지에서 싸운 병사들이 말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전쟁을 주도한 세력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 후세에게 알려야 하는데 가해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8·15 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있었던 원폭 투하만을 떠올린다.
가해자 국가, 피해자 시민들
일본은 침략전쟁의 주체로서 전쟁의 가해자이지만, 일본 시민들 입장에서는 피해자로 느끼는 이들도 많다. 도쿄 대공습에서 보는 것처럼 여성·노인·어린이 등 ‘내지인’(외국에 나가서 싸운 이들과 달리 일본 본토에 있던 이들을 부르는 말)들은 피해받은 기억밖에 없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도쿄 시민이 하룻밤 사이에 30만명 이상이 죽어나가는 식이었다. 미군은 알루미늄과 나트륨을 혼합해 만든 소이탄을 썼는데 그것은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발화해서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열기는 섭씨 3천℃라고 한다. 이 사진을 한번 보라.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가다 공습을 받아 타 죽은 모습이다(그는 도쿄 대공습을 다룬 사진집을 보여줬다. 사진 참조). 너무 참혹하다. 대부분의 주검이 타버렸다. 물을 마시려고 강가에 갔다가 집단적으로 숨진 사진도 많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사람 300만명이 죽었다. 태반이 민간인이었다. 가해자 의식을 지니기 힘든 면이 있다.
일본이 전쟁 때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국내에 있던 일본인들은 일본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나쁜 짓을 한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을 수행한 병사들의 경우에도 피해자의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징병 영장인 빨간 종이 하나를 달랑 받고 조선반도에 가서, 또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로 가서 다른 사람을 살육한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농사짓던 사람들이 아이들을 두고 억지로 떠나야 했던 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강요받았다.
평범한 일본인이 전쟁터에 나가서 ‘살인마’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일본인들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최종적으로는 말단 병사가 아니라 정말 가해자가 누구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들을 보낸 군부, 전쟁으로 돈을 번 권력자들을 봐야 한다. 천황 절대주의도 원인이다. 천황제의 가장 큰 문제는 천황과 국민을 차별하는 데 있다. 1억2천만 국민이 차별되는 제도다.
이 시대를 알려면 태평양전쟁을 이해해야
문부성(한국의 교육부)에서는 8·15를 ‘종전’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패전’이다. 정치적인 조작이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해야 한다. 종전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끝났다는 것인데, 국민과 시민의 관점에서 전쟁을 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일본 매스컴들도 8월이 되면 8월 초부터 히로시마·나가사키 얘기만 한다.
일본인 관료들의 망언 문제가 나오면 변함없이 바보짓을 한다는 생각을 한다. 상대국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하고 알아가고 의사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한겨레21>과의 인터뷰도 받아들였다. (기자에게 그가 물었다) 일본 대공습 사건을 아는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측면을 모두 지닌, 이중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본사람들의 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태평양전쟁을 연구한다. 텔레비전에서 관련 프로그램이 나오면 녹화해놓기도 하고 책도 읽는다. 그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 일본 역사와 지금 이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제는 아사히 텔레비전에서 정말 오랜만에 전쟁 경험이 있는 늙은 세대들의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그는 취재진을 방으로 데리고 가 녹화한 내용을 보여줬다). 정말 보기 드문 프로그램인데 반응이 좋으니까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에도 또 했다. 그런데 방영 시간이 밤 12시부터 4~5시간 하는 것이다. 인상적인 얘기는 “전쟁에는 좋은 전쟁도 없고, 나쁜 전쟁도 없다”는 증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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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의 장애는 국제정치 때문 |
아내 시노하라 유코는 요코하마 국립대를 다닐 때부터 장애인·부락민·재일 조선인 등 사회적 소수자 문제나 장애아와 비장애아가 함께 교육받는 시스템(한국에서는 ‘통합교육’이라 부른다)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올해로 29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정통신문은 직접 쓴다.
구마모토가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무척 보수적이었다. “미나마타병을 앓는 환자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저거 다 연기하는 거야’ 할 정도였다”는 게 그의 회상이다. 고등학교 때 누가 불을 질러 학교가 다 탄 적이 있는데 이유가 성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내 아이들만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고 결국 아들과 딸을 경쟁을 하지 않는 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여성 문제는 일본에서도 여전한가”라고 묻자, 그는 “부모한테서 산후 휴가를 받지 말라는 얘기까지 들었다”면서 “이중 부담은 똑같다”고 털어놨다. 김대중 납치사건, 김지하 시인 석방운동, 대학 때 본 황씨 성을 지닌 멋진 조선인 학생 등이 그가 한국과 관련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일본 전교조 소속 교사인 그는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상을 받았지만 피해자 입장만 드러내고 가해자 입장을 드러내는 데는 인색하다”면서 “전쟁의 본질이 감춰져 있다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남편이 술을 무척 좋아해서 아침에 마실 때도 있었다”고 귀띔하자, 남편 시노하라는 “그 얘기를 지금 하고 그러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역시 보통 부부의 모습이었다. 남편은 인터뷰 중간중간에 “내 입 좀 보지 마. 나 말 잘 못하잖아” 하는 얘기도 했다. 남편이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것에 대해 아내는 “소련제 백신이 수입됐으면 장애를 겪지 않았을 텐데 미-소 냉전 체제여서 수입이 연기되는 바람에 고치지 못했다”면서 “국제정치가 개인의 생활에 이렇게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
남편 시노하라는 전공투 세대답게 여전히 사회참여적이다. 그는 퇴직 이후 근처 요코다 미 공군기지 소음 피해를 막기 위한 소송단의 일원이 됐다. 전쟁 이후 계속 주둔 중인 미군은 3500m짜리 활주로에서 밤낮 없이 비행해 근처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이시하라 도쿄도지사는 이 기지를 민간 항공사들도 이용하도록 하자는 ‘군민 공용화’를 제기한 상태다.
부부는 4박5일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한겨레21>과의 인터뷰 덕분에 한국이 가깝게 느껴진다”면서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이전 세대가 벌인 일이지만, 일제 때의 문화말살 정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타협과 화해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집에는 한·중·일 학자들이 공동 연구한 <미래를 여는 역사> 일본어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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