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관심도 없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세대, 아들 시노하라 다이가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이 역사를 떠나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기를
▣ 도쿄=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내 이름은 다이가(大我)다. 시노하라 다이가. 어릴 때 호랑이라는 뜻의 ‘타이거’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1986년 6월19일생으로 세이케이대학 법학과 1학년이다. 올봄에 입학했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이름에 대해 ‘소아’(小我)을 넘어서 ‘대아’(大我), 즉 우주로 나가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설명하자) 아, 그냥 대충 느낌으로 알았는데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일본에서 대학 신입생들은 ‘5월병’을 앓는다. 갓 입학해 4월까지는 들뜬 마음으로 지내다 점점 대학 공부에 흥미를 잃는 현상을 일컫는다. 대학의 수업은 고등학생 때 수업방식과 180도 다르다. 대학 때는 스스로 예습·복습을 해야 한다. 그런 수업방식의 차이 때문에 당황스러워하는 친구들이 많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없고 ‘탤런트·가수·애인이 생기면 좋겠다’는 얘기만 한다. ‘일단 놀아두자’는 친구들도 있다. 그래서 난 대학 서클 두곳에 가입했다. 한곳은 사회 문제를 조사하고 발표·토론한다.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을 연구한다.
광고
대안학교에서 자신의 개성을 찾다
다른 친구들과 좀 다르게 토론을 좋아하는 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자유의 숲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경쟁’과 ‘시험’이 없는 학교로 유명하다. 수업도 토론 위주다. 아, 한국에서는 ‘대안학교’라고 부르나? 그 학교의 가장 좋은 점은 뷔페에서 음식을 골라먹듯이 자기 마음대로 보내는 것이다. 내 개성이 무엇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다.
처음엔 내게 개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그런 점에서 고1 때 프로레슬링부에 들어간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규칙도 익히고 흉내를 내는 훈련을 한 뒤에 손님을 초대해 시합도 한다. 내겐 그것이 스포츠의 하나였다. 연구회 부장까지 했다. 시합 구성을 어떻게 할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내 생각과 지식을 모두 활용했다. 프로레슬링에는 시나리오가 없다. 선수 두명이 싸우면서 관객의 반응을 끌어내야 하고 승부를 떠나 관객과 호흡해야 한다. ‘아프겠다’ ‘아쉽다’ 등의 관객 반응을 이끌어내야 한다. 기승전결이 있고, 상호작용하는 드라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웃음을 주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 경험 때문에 내 특기가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쉽게 표현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게 장점이었다.
광고
얼마 전에 헌법 판례를 보고하는 수업을 했다. 앞서 보고한 학생들은 설명을 어렵게 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가장 쉽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수업이 끝난 뒤 여학생 한명이 복도에서 따라왔다. 내 보고가 아주 좋았다면서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더라. 압도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웃음) 내가 잘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친구들도 생기고 좋은 관계도 맺을 수 있구나 하는 점을 느꼈다. 원래 평화헌법 9조에 관심이 많았다. 고2 때는 평화헌법 9조에 대해서
전쟁보다 원폭 투하에 분노를…
법학과를 선택한 건,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지만 사회가 잘못됐다고 비판하고 싶어도 사회의 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대학에는 다양한 입시제도가 있다. 글쓰기와 토론 시험만 보는 곳도 있다. 난 그 방식을 택했다. 문제 하나는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때는 언제인가’였고, 또 하나는 ‘폐쇄회로TV(CCTV)의 폐해와 긍정적 기능에 대해 논하라’였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1920년대 벌어진 ‘평정산 사건’을 알아보려고 중국에 갔던 여행 경험을 썼다. 일본인이 중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었다. 박물관에는 몇백구의 뼈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죽기 전에 버둥거린 것이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살아 있구나’ 하고 느꼈고 그 느낌을 시험에서 썼다.
그렇지만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다. 동아리 친구 10여명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친구는 나를 포함해 2명 정도다. 우리 세대는 정치적으로 무감각하다. ‘편하게 살고 싶다’거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주류인 것 같다.
사실 한국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문제를 삭제한 건 문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터뷰가 실린 책을 본 적이 있다. 부끄러워서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한국의 올해 상반기 인터넷 검색순위 1위가 ‘독도’였다고 설명하자 놀라는 표정으로) 정말 그런가? 다케시마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잘 모른다. 텔레비전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욘사마’와 다케시마 문제를 비교해보면 90 대 10 정도나 될까. 그 정도로 신경을 안 쓴다. ‘지도의 작은 점 하나 때문에 왜 그렇게 난리야’라고 생각한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 화를 내는 이유도 잘 모른다. 그냥 ‘또 시작했군’ 한다.
8·15에 대해선 ‘전쟁이 끝나 좋은 날이구나’ 하는 느낌 정도다. 우리 세대는 전쟁을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별로 없다. 벌써 60년 전의 일이 아닌가. 8월6일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대해서 더 생각한다. (원폭 투하로) 비참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50만명의 미국인 생명을 지켜낸 기념할 만한 사건으로 원폭 투하를 거론하는 미국을 보고 분노와 함께 의문이 들었다.
미국의 논리도 ‘허구의 논리’는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미국인 친구를 만나면 얘기할 수 있도록 알아두려 했다. 그래서 내일부터 친구 두명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 끝나면 구마모토에 있는 외가에 들를 생각이다.
민족을 떠나 희생자 모두의 입장에 서자
조선 사람들도 원폭 피해를 당한 것으로 안다. 전후 보상도 제대로 안 됐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기 민족만 챙기는 게 아니라 평화를 위해 희생자 모두의 입장에 섰으면 좋겠다. 얼마 전 사회학 수업 시간에 국가시험을 치를 예정이던 재일 조선인이 시험을 못 본 사건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수업이 진지하게 이뤄지는데도 아이들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속으로 ‘이런 건 제대로 들어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조선인들이 소수민족이라서 자영업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세대는 매일 천황을 위해 인사하고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 세상에 살았다. 불과 60년 전에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기준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였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일본 젊은이들은 천황이 일본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족도 같은 인간인데 천황제를 유지하는 건 세금 낭비라는 것이다.
한국 친구를 사귀고 싶다. 특히 우리 세대는 한국에 대한 가해의식이 없다. 역사를 떠나 공기 같은 존재처럼 먼저 만나서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축구 교류가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라이벌 의식에서 좀더 자유롭다.
![]() | ||||
![]() | 사람이 정어리가 돼버린 그날 |
▣ 번역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시노하라 다이가는 <한겨레21> 인터뷰 도중이었던 8월5일부터 1주일 동안 고등학교 친구 2명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둘러보는 여행을 떠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보는 그곳에서 느낀 점을 글로 표현해달라는 취재진의 요청을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여행 막바지였던 8월11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이 글을 보내왔다.
히로시마의 여름은 매우 덥다. 새하얀 햇볕이 마치 바늘처럼 내 피부에 내리쬔다. 히로시마에서 전후 60년간 8월6일이 쾌청하지 않았던 날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마치 원폭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경험을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듯하다.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 도심 상공 800m에서 전체 길이 3m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폭발하자 폭심지에서 반경 2km 안이 초토화됐다. 폭심지는 섭씨 3천~4천도, 1km 떨어진 곳은 1800도, 1.5km 떨어진 곳은 600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일이었는지 짐작하려면 히로시마 상공 800m에 작은 태양이 하나 생겼다고 상상해보면 된다. 태양 근처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조금 떨어진 것들은 탄화되고, 한층 더 떨어진 것들은 발화한다. 나가사키의 원폭 자료관에는 누글누글해진 빈 병이나 레일 등도 전시돼 있다. 이런 폭탄이 8시15분,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들과 쇼핑을 하는 주부들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다음 순간, 격렬한 빛·열선·폭풍이 사람들을 덮쳤고, 한순간에 14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히로시마의 원폭 자료관에는 한장의 그림이 있다. 그림은 실제 원폭 피해를 당한 이가 당시 풍경을 떠올려서 그린 것이다. 처음엔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몰랐다. 평행선 사이에는 ‘붉은 좁쌀 알갱이’가 가득했다. 무엇일까 싶어 가까이 다가갔더니, 잘 보였다. 충격적이었다. 그 ‘알갱이’들은 인간들이었다. 무릎에 찰과상을 입었을 때 볼 수 있는 색깔을 한 인간들. 폭 25m의 강에 붉은 점으로 보이는 인간들이 가득 떠 있었다. 원폭의 열선에 노출된 인간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검게 눌어버린다. 운 좋게 살았다 해도 옷이 타고 전라가 돼버려 전신의 살가죽이 짓무른다. 그리고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찾게 된다. 강에 도착해 강물에 뛰어들어 물을 마시고는 죽는 것이다. 그림은 그런 사람들이 강에 떠 있는 장면이었다.
어떤 이는 “정어리가 들어간 상자를 뒤집어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런 광경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정어리와는 다르다. 각자 살 권리가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고, 인생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단 한발의 폭탄으로 ‘강에 뜬 붉은 정어리’로 변해버렸다. 많은 사람들을 한순간에 ‘사람’에서 ‘물건’으로 바꿔버린 원폭의 위력은 충격적이었다. 나가사키에도 원폭 ‘패트맨’이 떨어져서 7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지금 그 폭심지에서 이 글을 쓴다.
히로시마의 원폭 위령비에는 ‘편안히 잠드세요. 과오는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요’라고 씌어 있다. 전후 60년, 문제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고 있다. 원폭 피해자 보상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에게는 더더욱 원조가 어렵다. 전세계에서는 2천번 이상의 핵실험이 진행되고, 얼마 전 열린 핵확산금지조약 관련 국제회의도 별 진전이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히로시마에서 들은 중의원 의장의 말과 나가사키에서 들은 시장의 말을 소개하고 싶다. “위령비가 말하는 ‘과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인류를 상대로 핵병기를 사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 안에서 협조를 구하는 대신 전쟁의 길을 택한 것이다.”(중의원 의장) “평화를 위해 비핵3원칙을 법제화해야 한다. 지금 관계국이 노력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일본 비핵3원칙을 묶으면, 동북아 비핵병기지대화의 길이 열린다.”(나가사키 시장)
두번 다시 원폭탄 희생자를 내지 않으려면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협력해야 한다. 다시는 정어리처럼 강물에 뜬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오세훈 부인 강의실 들어갔다가 기소…‘더탐사’ 전 대표 무죄 확정
지진에 끊어지는 52층 다리 점프한 한국인…“아내·딸 생각뿐”
[단독] 이진숙 ‘4억 예금’ 재산신고 또 누락…“도덕성 문제”
세상의 적대에도 우아한 68살 배우 “트랜스젠더인 내가 좋다”
계엄군, 케이블타이로 민간인 묶으려 했다…‘윤석열 거짓말’ 증거
[사설] 헌재 ‘윤석열 파면’ 지연이 환율·신용위험 올린다
‘용산’ 출신, 대통령기록관장 지원…야당 “내란 은폐 시도”
‘65살’ 노인 연령 기준, 44년 만에 손보나…논의 본격화
산불에 할머니 업고 뛴 외국인, 법무부 “장기거주 자격 검토”
탄핵소추 111일 만에…4일 11시 ‘윤석열 심판’ 선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