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모인 강제 징집 피해자 3인의 회고담
감옥 보다 더한 고통, 제대하면 자괴감만 들어
▣ 진행·정리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세상사란 원래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꼭 알아야 할,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도무지 모르겠다’고 도리질을 치는 경우가 있다. 1980년대, 전두환의 폭압 통치 아래서 자행된 강제 징집과 녹화사업이 딱 그런 범주에 속한다. 공모하고 실행한 가해자는 “너무 오래됐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도저히 잊을 수 없다.
<한겨레21>은 강제 징집 피해자들과의 대담을 기획했다. 그들과 함께 ‘강제 징집과 녹화의 추억’을 더듬기 위해서였다. 400여명의 강제 징집자 명단을 확보하고, 연락처를 확보한 20여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올바른 과거 청산을 위해, 후배 대학생들을 위해 진저리 나는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자고. 대부분 취지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결론은 대부분 “싫다”였다. 이유는 처절했다. “그 시절이 나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줬고, 지금도 깊다. 되살리기 싫다”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고, 이제 겨우 제정신을 차렸는데 그 아픔을 또 후벼파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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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강제징집 피해자 3명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에 모였다. 김병년(44·연세대 독문과), 조영현(43·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윤병기(44·경희대 사학과). 모두 강제 징집자들을 대상으로 한 보안사령부의 사상개조 계획인 ‘녹화사업’이 맹위를 떨치던 1983년 군에 끌려간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과 함께 ‘강제 징집, 녹화사업의 추억’ 속으로 돌아가보자.
너 군대갈래 구속될래
사회:이 자리를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용기를 내줘 고맙다.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겠지만…. 요즘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때는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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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현(이하 조):나는 광주고 출신 서강대 신방과 학생이었다. 당시 서강대는 광주학우회의 영향력이 컸다. 회원이 70명 정도인데 많은 선배들이 학생운동하다 4학년쯤 되면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고 (감옥으로) 잡혀 들어갔다. 난 3학년 때 광주향우회 회장을 하면서 신방과 학회 결성을 주도했다. 1983년 4월1일 학회 결성식 겸 MT를 가기로 한 날 새벽이었다. MT 가려고 목욕하는데 마포서 형사 3명이 집에 들이닥쳤다. 막무가내로 정보과로 끌고 가 “너, 군대 가라” “자원입대서 써라”고 협박했다. 왜 군대를 가냐, 못 간다고 밤새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어머니와 외숙까지 경찰서로 달려왔다. “군대 안 가면 구속한다더라”며 어머니는 울면서 애원했다.
사회:왜 군대를 가야 하는지 설명했나.
조:넌 요주의 인물이다. 군대 안 갈 수 없다. 군대 가든지 구속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다음날 닭장차(경찰 호송버스) 타고 동대문 경찰서로 옮겨졌고, 그곳에는 서울 시내서 강제 징집된 대학생 16명이 모여 춘천 보충대로 실려갔다. 곧바로 머리 깎고 지프차가 와서 나를 비롯한 8명을 강원도 화천 7사단 훈련소로 데려갔다. 목욕하다 경찰에게 끌려갔고, 이틀 만에 입대가 끝났다. 1983년 4월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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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에 세워놓고 다 쏴죽여야 한다”
김병년(이하 김):난 1983년 7월29일에 끌려갔다. 연세대 독문과 학생으로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제일동포 고준석 선생의 일어판 <남조선학생운동사>를 방학 때 토론하자며 복사가게에 맞긴 게 문제였다. ‘남조선’을 보고 복사가게 아저씨가 서대문 경찰서에 연락했고, 복사물 찾으러 간 후배와 동아리 회장이 잡혀갔다. 조직 사건을 우려한 우리는 도망쳤다. 그런데 어느 날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을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문을 앞두고 경찰도 조직 사건으로 확대하기 부담스럽다며 잘 해결해주기로 했으니 경찰서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대문 경찰서로 찾아갔고, 정보과의 취조가 시작됐다. 두드려맞고 발길에 차이다 밤 8시쯤 되니 정보과장이 들어와 입영지원서를 내놓았다. “너 군대 갈래, 구속될래. 이미 결정된 것이니 버텨야 소용없다.” 무조건 쓰라고 했다. 다음날 서대문 경찰서 정보과 차를 타고 춘천 보충대로 갔다. 입대까지 딱 24시간 만이었다.
사회: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는 없었나.
김:행정병이 데려가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머리 깎고 그 다음이 신검이었다. 문서에는 이미 도장이 다 찍혀 있었고 키와 몸무게, 시력 재고 눈거풀 한번 까본 뒤 “너 병 있냐”고 물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삼척의 훈련소로 옮겨졌는데, 중사 한 사람이 “이 빨갱이 새끼는 철책에 세워놓고 다 쏴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미 나를 다 알고 있었다. 단 하루 만에 닥친 상황, 정말 섬뜩했다.
조:난 악에 받쳐서 “차라리 해병대로 보내달라”고 우겼다. 그런데 “너희는 철책으로밖에 못 간다”고 답했다.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강제 징집된 동기 8명과 함께 7사단 연병장에 도착하면서부터 바닥을 기었다. 대위 한명이 줄을 쫙 세우더니 “이 새끼들 데모나 하고 지랄이야”라며 당수로 목을 치고, 군홧발로 조인트를 까며 그렇게 한 시간을 굴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내무반에 배치됐다.
윤병기(이하 윤):난 1982년 10월 학내시위 주동 혐의로 무기정학을 당했는데, 다음해 3월30일 천안 공설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사회:군대 가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나.
윤:전혀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문리대 학장이 위에서 조치를 취하라고 압박해오니 나의 무기정학을 풀면서 군에 입대시키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공설운동장에 2천명 정도가 모였는데, 내 이름을 부른 뒤 단상 옆에 따로 앉혀놓고 기차 탈 때는 누군가를 옆에 붙여서 의정부 인근 보충대로 데려갔다. “시력이 너무 나빠 군대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더니 군의관에게 보내더라. 그런데 군의관이 서류를 보더니 “넌 그냥 군에 입대해야 한다. 가봐라”고 말했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28사단 훈련소에 갔는데, 훈련병 165명 가운데 강제 징집자가 16명이나 됐다. 훈련소서 매일 새벽 두시면 16명을 모두 깨워서 ‘왜 군대에 왔는지’ ‘어떻게 학생운동을 했는지’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내가 1983년 3월30일 군번인데, 강제 징집자가 16명이나 되니 제법 힘이 났다. 4월19일에는 훈련소 화장실에 모여 몰래 4·19 기념식을 하기도 했다.
사회:아무 설명도 없이 끌고 간 이유는 뭔가.
김:1980년대 초반부터 강제 징집이 시작됐기 때문에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군대 가든지, 빵(감옥) 가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을. 난 별로 의문을 갖지 안았고, 상대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윤:내 군대 동기 중에는 성균관대 81학번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키가 160cm도 안 된다. 그 친구도 집에서 밥 먹다 내가 있는 보충대까지 잡혀왔는데, 형사가 이미 머리를 ‘빡빡’ 밀어놓았다. 보충대 군의관은 키가 너무 작아 군에 갈 수 없다고 했고, 그 형사는 “미안하다”며 가발 사서 씌워 학교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보충대로 잡혀왔다. 강제 징집자들은 그렇게 예외 없이 현역 입대했다.
김:내가 간 훈련소에서도 안경을 썼는데도 눈이 너무 나빠 앞사람조차 볼 수 없는 한양대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냥 현역으로 끌려갔다.
휴가 짐 싸놓고 막판에 취소 명령
사회:군 생활은 어땠나. 감시의 눈초리가 적지 않았을 텐데.
조:훈련소 동기 중 같은 사단에 배치된 강제 징집자는 모두 8명인데, 7명이 7사단 5연대에 근무했다. 군에서 의문사한 한영현(한양대·1983년 7월2일 사망)도 그때 함께 7사단에 배속됐는데, 그 친구만 8연대로 배정받았다. 우린 휴가도 못 나갔는데, 한영현은 5월7일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서울까지 휴가를 갔다왔다고 했다. “동기들 이름 불어라”며 프락치로 만들려고 회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의문사했다. 나머지 7명은 모두 철책 근무를 섰는데, 난 10개월쯤 뒤에 수원 신갈에 있는 정보학교로 차출됐다. 거기서 북한군을 상대로 매일 국가에 대해 홍보하는 법, 북한에 대한 염증을 유발하는 법 등을 교육받았고 대북방송 면접요원으로 매일 전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북한을 향해 떠들었다. 그게 나에 대한 녹화사업인 것 같았다.
김:이미 강제 징집자라는 것은 다 알려졌고, 항상 우호적인 군인과 적대적인 군인 사이에 끼어 조마조마해하며 살았다. 훈련소에서 사단장 표창을 받으면 1주일 포상휴가를 준다고 했는데, 내가 1등 하니 휴가는 없다고 했다. 연대 행정병으로 뽑혔는데, 조금 있다가 넌 행정병을 할 수 없다며 철책으로 가라고 했다.
윤:난 중대에 배치된 뒤 보안대에 불려가 진술서 쓰고, 일주일에 한번씩 내가 보안대로 가든 그쪽에서 오든 했다. 또 우리 중대 선임하사는 자신이 광주항쟁에 투입된 삼청교육대 교관 출신이라며 술만 먹으며 내무반 들어와 “너 같은 놈 때문에 내가 광주 가서 사람을 몇명 죽였는지 아냐”면서 무작정 때렸다. 나도 그 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조:철책 근무 때 무식한 군인, 악질적인 학사장교(ROTC) 가운데는 나를 ‘빨갱이’ ‘데모하는 놈’이라며 압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전두환 전기인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내무반에서 매일 밤 몇 페이지씩 돌아가며 읽었다. 그렇게 살았다.
윤:한번은 풀베기를 하는데 대대장이 부른다고 해 갔더니 사단 보안대서 나를 데려가 열흘 동안 “학생운동 하던 동료 이름 불어라”며 조사했다. 또 15개월 동안 휴가도 못 갔다. 두번이나 대대장에게 휴가 보고까지 끝내고 짐을 다 쌌는데, 다음날 아침 대대장이 불러 “넌 가지 마라”고 했다. 세 번째 드디어 휴가를 나가는데, 사단 보안대에서 내 고향인 대구로 가 그곳 보안대원을 만나라고 했다. 전화했더니 보안대 직원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 “대구에서 운동하는 사람 이름 적어라. 그러면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네 아버지를 대구로 전근시켜주겠다”면서 돈까지 줬다. 2만원이었다. 프락치가 되라고 강요한 것이다.
대학 당국도 일정 부분 책임져야
김:1984년 2월인가, 주민증 일제 갱신 조치로 군인들을 다 휴가 보낸 때가 있었다. 나도 휴가 가라고 했는데, 그날 아침에 대대장이 “넌 가지 마”라고 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담당 행정병이 2주 동안 군기교육대에 갔다. 사전에 보안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나를 휴가자로 처리했다는 이유였다. 강릉에 있는 군단 보안사에서 김 중사라는 사람이 일주일에 한번씩 와 대대장, 중대장을 만나 나의 동태를 확인하고 갔다. 1984년에는 보안사 중사가 나타나 짐을 챙기라고 했다. 그러고는 경기도 과천의 한 주공아파트로 데려갔다. 거기서 8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4절지 갱지를 주고 성장 과정, 학생운동 과정을 쓰라고 했다. 8일 동안 쓰고, 또 썼다. 과연 어디까지 써야 할지, 잘못 쓰면 조직 사건이 만들어질 테고, 여차하면 두들겨 맞고. 난 그 경계를 맞추는 게 가장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8일째 되니 서식과 내용까지 담긴 서류를 주며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베껴썼다. 다음날 그 보안대 중사가 다시 와서 연말이니 휴가나 가라면서 휴가증을 써줬다. 그러고는 “학교에 가서 학생회가 뭐 하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난 학교에 가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방학이라 학생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윤:강제 징집된 동기 16명 가운데 나를 비롯해 5명은 제대하면 공장으로 가자고 결의하고 몰래 학습 모임을 결성했다. 제대한 뒤 실제 인천·부천으로 갔다. 한 1년쯤 뒤 인천에서 조직 사건이 났는데, 군에서 함께 학습 모임을 했던 동료 중 한명이 프락치였다. 군에 있을 때 그 친구는 외박도 자주 나갔고 우리와는 대우가 달랐다. 그런데 그게 다 보안대의 프락치 회유 공작이었던 것 같다.
사회:개인들의 상처는 깊지만 사회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고 잊으려 한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
조:강제 징집은 정권 차원에서 기획됐지만, 대학이 공모한 것도 명백하다. 대학도 일정 부분 책임져야 한다. 당시 학생처장, 주임 교수 등의 증언과 고백, 대학 당국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 강제 징집돼 군에서 의문사하고 피해 입은 사람들에 대해 정부가 보상하고, 보안사도 과거를 드러내고 사과해야 한다.
윤:지금은 강제 징집 얘기를 쉽게 하지만, 난 당시 돋보기를 구해 내 눈동자를 지지고 안경을 돌로 깨면서까지 병영에서 탈출하려 노력했다. 내가 당시 겪은 상황은 감옥에 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가장 존경받던 문리대 학장이 버티다 못해 사인해 나는 군대에 갔다. 그 학장은 나중에 나에게 “너한테 죄를 진 게 있다”고 말했다. 강제 징집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총체적 기획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예비검속이었다
김: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을 보면 사역부대로 강제 징집된 대학생이 자신을 감시하는 감시병이 사격대회에서 1등 상을 받고 돌아오자 잘했다며 아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이 감시병은 “만약 전쟁이 나면 내가 가장 먼저 너희를 쏴죽일 텐데 참 이상하다”고 말한다. 1980년대 강제 징집자들도 동일했다고 본다. 병역의 의무, 사상교육을 얘기했지만 이것은 예비 검속이었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보안사가 우리를 어디론가 몰고 가 모조리 쏴죽일 수 있는 그런 대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경찰서에 끌려가 입영지원서 쓰고 군에 갔는데, 이게 어떻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것이냐. 반정부 세력을 회유하고 타격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강제 징집이 행해진 것이다.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조:학생운동을 제대로 한 사람은 강제 징집이 아니라, 감옥에 가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미완의 상태로 군에 끌려갔고, 이것 때문에 후배들에게도 떳떳해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끌려갔고 고초를 겪었지만 충실하게 자기 역할을 못했다는 자괴감에 항상 시달렸다. 군대에서는 심리적 부담과 공포 속에 살았고, 제대한 뒤에는 그 군대의 경험을 내세울 수 없는… 그래서 우리는 이중의 피해자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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