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징용인과 그 후손들이 펼치는 치열한 생존 투쟁… 한·일 정부에 거주권 보장을 요구하다
▣ 우토로=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우토로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지난 5월5일 ‘믿음직한 동생’ 한명을 떠나보냈다. 8일 밤 <한겨레21> 취재진이 도착한 일본의 마지막 조선인 강제징용촌인 우토로 마을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고 서신웅(60)씨. 그는 5월6일 낮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우토로 사람은 이로써 203명에서 202명으로 줄었다.
“이제야 살 만해지니까 여든이 넘은 노모를 남기고 떠나다니.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 이제 좀 할 일을 찾는가 싶더니….”
“이제야 살 만해지니까 떠나다니…”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미나미야마시로 지부에서 일하며 우토로 문제에 한평생을 바친 김선측(82)씨는 서씨의 갑작스런 죽음에 망연자실했다. 더욱이 우토로 문제에 대해 이제 막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갖고, 시민단체들이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일 참이었다. 김씨는 “그동안 우토로 1세대(조선인 1세)들에게만 한정됐던 우토로 사수 운동이 2·3세로 확산되는 시점에 서씨가 떠나 안타깝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우토로를 없애는 건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없애는 것이다.”
“우토로를 없애는 건 일본의 양심을 없애는 것이다.”
“우토로를 없애는 건 일본의 과거사 반성이 없는 것과 같다.”
우토로 마을에 들어선 취재진을 처음 맞은 건 주민들이 손수 ‘작문’해 쓴 구호들이었다. 번듯한 일본 주택가와 자위대 부대 속에 고립돼 우토로 마을을 수년 동안 지킨 ‘독립선언’과 같았다.
우토로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착취에 맞서 노동으로 견뎠고, 해방 뒤에는 마을을 군부대로 만드려는 미국과 싸웠다. 지금도 마을 중앙에 두 채 남은 ‘함바집’은 반세기 전 식민지 조선 반도인의 고된 하루를 보여준다.
“함바 건물 하나를 6~7개로 나눠, 식구가 많건 적건 한 집에 한 가족씩 살았어. 판자를 대서 집을 나눴기 때문에 옆집에 아이 울음소리가 나면 잠을 못 잤지. 전등 하나로 두 집을 비췄고….”
1941년 우토로에 들어온 문광자(85)씨는 함바집 생활을 이렇게 회상했다. 문씨 가족은 ‘국가에서 공지한 인부 모집에 응하면 남편에게 떨어진 군출두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도쿄의 쪽방에서 우토로의 함바집으로 옮겼다. 일요일도 없고 매달 초하룻날만 쉬던 고된 노동의 시절이었다. 남편이 하루 13시간씩 비행장에 나가 일해 받은 세 홉의 잡곡이 모자라, 문씨는 나물을 캐서 아들 딸 6명의 밥상을 차렸다.
1945년 해방이 되고서도 우토로 주민은 취직 알선, 생활 보호, 민족 교육과 문화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싸웠다.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고, 1947년 우토로에 있던 재일 조선인 학교가 폐교되는 아픔도 겪었다.
투쟁의 역사, 미군을 몰아내다
“어느 날 갑자기 미군이 들어와서 우토로 마을을 둘러싸는 거야. 마을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며 빨리 나가라고 그랬지. 그렇지만 갈 곳도 없고, 돈도 없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일렬로 서서 맞서 싸웠어. 미군이 땅을 향해 총을 갈겼지만, 굽히지 않고 돌을 던지며 싸웠어.”
예전의 미군부대 자리인 자위대 부대가 서 있는 마을 남쪽을 가리키며, 황순례(73)씨는 그렇게 우토로를 지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1945년 며칠 만에 ‘미군을 몰아낸’ 우토로 주민들은 관행적으로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법적으로는 닛산차체의 사유지였지만 우토로에 사는 주민들을 뭐라 하지 않았다.
1970~80년대 들어 우토로 주민들의 투쟁은 주거권 확보로 바뀌었다. 우토로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1980년대까지 우물물을 길어다 써야 했다. 닛산차체가 주민들의 점유를 묵인하면서도, 상·하수도 등 사회기반시설의 설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1980년대 초반부터 우지시를 상대로 ‘상수도 설치 투쟁’을 벌였고, 여론의 호응을 입어 1987년 상수도 시설을 마을 안에 들이는 데 성공했다. 일본 시민단체인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하이토 마사키 사무국장은 “1987년 우지시의 상수도 보급률이 99%였다”며 “일본의 조선인 차별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동포 사회도 ‘통일의 길’로
우토로 인구의 5분의 1인 40명이 1세대 주민들이다. 그리고 65가구 가운데 17가구가 생활보호 세대다. 이들은 강제 퇴거가 집행된다면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단호했다.
조갑순(79)씨는 “10년 전에 얹은 양철지붕이 아까워서라도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우물물을 끌어다 쓰는 집이 태반이지만, 리무율 총련 미나미야마시로 지부 부위원장은 “우토로 1세대에게는 주거환경 개선보다 우토로에서 이대로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전했다.
재일 조선인 3세의 목소리는 좀더 낭랑했다. 우토로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1세대의 손자·손녀들이거나 1980년대 이전에 들어온 2세대의 후손들인 이들은 우토로에서 80~90명 정도가 산다.
“일본 정부는 종전 이후 재일 조선인에 대해 아무런 전후 배상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에게 텃밭을 일구라고 유휴지를 제공하는 일본 정부가 우토로 땅을 매입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우지시, 교토부, 중앙 정부가 땅을 사들여야 합니다.”
와카야마에 살다가 우토로로 시집 온 권정미(44)씨는 일본 정부가 우토로를 책임져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딸 넷을 대학까지 보내야 하는데, 여태껏 살아온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건 생존권을 위협하는 ‘인권의 문제’라고도 했다.
아직 주민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고, 10년 이상 주민들과 함께한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과 한국쪽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사이에 여러 이견이 있지만,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우토로 땅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한국 정부는 미비한 한-일협정으로 재일 조선인 문제를 방치한 점 △일본 정부는 제대로 된 전후 배상을 시행하지 않은 점을 들어 한·일 정부가 우토로 땅을 매입해 1세대의 거주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방침이다.
동포 사회도 우토로 문제를 계기로 ‘통일’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총련과 민단 교토지부는 우토로 마을에 대한 공동 실태조사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고, 총련은 우토로 주민회에 지원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엄명부(49) 우토로 주민회 부회장은 “주민들이 60년 넘게 우토로를 살기 좋은 마을로 일궈왔던 것처럼 이번엔 주민이 직접 주체가 돼 땅을 사려고 한다”며 “한국 정부와 민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 ||||
5월7일 만난 엄명부(49) 우토로 주민회 부회장은 일본 사회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에 지친 모습이었다. ‘우토로 2세대’인 그는 “일본 정부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며 “주민들이 땅 매입을 추진하고 있으니, 한국 정부와 민간이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주민들이 우토로 땅을 직접 사들일 것인가.
최근 땅 소유주인 이노우에 마사미가 5억5천만엔을 제시했다. 시세에 견줘 꽤 낮은 액수다. 하지만 주민들이 모을 수 있는 돈은 1억엔 정도다. 현격한 차이가 있다. (매입이) 불가능할 것이다.
소유주가 누구이든 간에 땅을 사려면 자금이 더 많이 필요할 텐데.
최소한 계약금 정도는 우토로 주민들이 모을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 올해 안에 우토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이 도와달라.
일본도 강제 징용의 책임이 있으므로 일정 부분 부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에 대한 기대는 이미 버렸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같은 훌륭한 시민단체가 있지만 일본 사회에서 아주 극소수일 뿐이다. 일본에서 모금운동을 한다고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일본이 우토로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자칫 과거사 문제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닌가.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일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전후 배상 문제에 팔을 걷어붙이고 모금 운동을 벌인다고 생각해봐라. 일본의 양심세력과 정부가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나.
| ||||
일본의 시민단체인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하 모임)은 우토로 주민들의 ‘수호천사’ 같은 존재다.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뿌리 깊은 일본 사회에서 1988년부터 시작한 이들의 활동은 일본인의 양심을 일깨우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모임은 사법부의 강제 퇴거 명령이 인권조약에 위반된다는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의 2001년 8월 권고를 이끄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5월13일 ‘우토로의 사이토’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사이토 마사키(56) 사무국장에게서 이 모임의 활동상을 들어봤다.
어떻게 모임이 결성됐나.
1988년께 우토로에 사는 재일 조선인 2세가 지문날인 거부 투쟁을 벌였는데, 이 투쟁에 동참하면서 우토로 문제를 알게 됐다. 이어 1989년 서일본식산이 제기한 우토로 토지명도 소송이 제기된 직후 시민들 중심으로 모임이 결성됐다.
모임의 규모는.
기관지를 받는 사람이 1500여명, 활동가가 10여명쯤이다. 강제 퇴거가 집행될 때 바로 모여 막을 수 있는 사람은 500명 정도다. 우토로가 위치한 우지시 주민보다 오사카, 교토 등 다른 지역 회원들이 많다.
타 지역 회원이 많은 이유는 뭔가.
아직 일본인들에겐 재일 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이 있다. 심지어 우지 시민들은 나에게 ‘당신이 우토로를 잘 모르니까 그런 일을 한다’고 말한다. 우지시 한가운데에 재일 조선인의 집단 거주촌이 있다는 게 이들에게 불편할지 모른다.
우토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과거사로 반목하던 한·일 양국이 화해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의 전후 배상 책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우토로에 사는 재일 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후 배상이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우토로를 ‘상징적 전체’로 취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 정부에게 할 말은 없나.
일본 정부는 재일 조선인을 ‘인간’으로 취급하라. 교토부와 우지시는 우토로 주민 실태조사를 즉시 실시하라.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대법, 윤상현에 ‘1025표차 낙선’ 남영희 선거무효 소송 기각
![[단독] 김용범 “똘똘한 한 채, 보유·양도세 누진율 상향 검토” [단독] 김용범 “똘똘한 한 채, 보유·양도세 누진율 상향 검토”](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116/53_17685117073291_20260115504278.jpg)
[단독] 김용범 “똘똘한 한 채, 보유·양도세 누진율 상향 검토”

‘통일교 의혹’ 전재수 “장동혁, 밥 며칠 굶지 말고 정치생명 걸라”

국방부, 여인형 ‘일반이적 혐의’ 인정…재판 중 파면

미국, 75개국 이민 비자 심사 무기한 중단…한국은 포함 안 돼
![[단독] 김용범 “기대 이상 부동산 공급대책 곧 나올 것…태릉CC급 규모 포함” [단독] 김용범 “기대 이상 부동산 공급대책 곧 나올 것…태릉CC급 규모 포함”](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116/53_17685122408538_20260115504270.jpg)
[단독] 김용범 “기대 이상 부동산 공급대책 곧 나올 것…태릉CC급 규모 포함”

“속내 빤해”…‘제명 파동’ 속 장동혁 단식에 냉랭
![“마이 무따, 이제 단식” [그림판] “마이 무따, 이제 단식” [그림판]](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6/0115/20260115503898.jpg)
“마이 무따, 이제 단식” [그림판]

전두환이 낮춘 국방차관 의전서열, 9위서 2위로 올린다…문민통제 확립

김동연 경기지사, 정체성 논란에 “민주당과 일체감 부족…오만했다”
![[단독] ‘탈팡’ 확산 현실로…쿠팡 카드 매출액 매일 56억원씩 증발 [단독] ‘탈팡’ 확산 현실로…쿠팡 카드 매출액 매일 56억원씩 증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6/0114/20260114503893.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