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반발에 대한 사법개혁추진위원회의 입장…검찰 신문조서 인정 안되도 수사권 넘어가지 않는다
▣ 하태훈/ 고려대 법대 교수·사법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 기획연구팀장
지금까지 우리는 형사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벌어져야 할 치열한 구두변론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공개된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공격과 방어가 교차하는 이상적인 재판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법정공방을 지켜보면서 유·무죄와 형의 종류와 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관 집무실에서 검사가 제출한 수사서류 더미를 뒤적여보면서 유죄의 심증을 형성해도 상관없도록 법이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조서재판의 관행이다. 그뿐이 아니다. 법정에서 심리 절차가 열린다고 해도 사건 부담 때문에 절차가 축소되거나 생략되는 것이 보통이다. 공판 심리의 효율성에 치중해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 공판 절차가 진행되다 보니 방청객은 물론이고 피고인조차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어 어떤 결론이 났는지 잘 모른다. 피고인은 하고 싶은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재판이 끝나버리니, 재판부를 불신하고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못해 항소하고 상고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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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추세에 맞춰 피고인 방어권 보장해야
피의자·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나 공개재판주의, 직접심리주의, 구두변론주의 같은 공판 절차의 기본 원칙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그저 ‘기록돼 있을 뿐’, 법전과 실무 현실은 엄연한 괴리를 보이고 있다. 그러길 벌써 50년이 지났다. 일제시대의 왜곡된 형사재판을 답습하길 반세기가 흘렀다. 법조 실무가들은 그동안 한번쯤이라도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했어야 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럽게 지난 2년간 활동했던 사법개혁위원회에서는 과거의 실무관행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공판중심주의적 법정심리 절차가 확립돼야 함을 공감한 바 있다. 앞으로는 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형사절차를 실현하기 위해 공판중심주의가 확립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형사사건의 실체를 공개된 법정에서 심리된 것을 기초로 판단한다는 공판중심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판이 열리기 전에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 수사기록 등을 열람하게 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온전히 보장하고 재판 준비를 철저하게 해 재판정에서 집중적으로 증거조사 등 심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보장, 직접주의, 구두주의에 충실하지 못한 현행 형사소송법의 증거법 규정을 전면 재검토하고 공소 사실을 실질적으로 다투는 피고인이 공판정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피고인 신문 제도나 법정 구조를 재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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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건의 내용은 2007년 도입되는 국민사법참여제도의 시행에 필수적이다. 재판에 참여할 시민을 몇 개월이고 재판이 진행될 때마다 생업을 포기하고 재판에 참여하라고 붙들 수도 없고, 재판에 참여한 시민들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져야 할 법정공방 대신 신문조서의 내용을 듣고 유·무죄를 판단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법개혁위원회의 건의문을 토대로 지난 몇달 동안 판사·검사·변호사 등 실무가와 학자들이 참여해 수많은 논의를 거쳐 그 결과를 정리한 것이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이다. 개정안 중에서 검찰이 수사권을 무력화할 것이라고 오해를 받는 안은 다음과 같다. 즉, 피의자 신문조서를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것, 법정에서 피고인 신문은 피고인이 원할 때만 하고, 공판심리가 피고인 신문부터 시작되게 할 것이 아니라 증거조사를 다 마친 다음에 피고인을 신문하자는 것 등이다. 좀더 자극적으로 표현한다면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부인’과 ‘피고인 신문 제도의 폐지’이다. 또 개정안에 따르면 참고인 진술조서도 그 참고인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진술하지 않는 한 증거로 쓸 수 없다. 피고인이 반대신문권을 행사할 기회가 없었던 조서이기 때문이다.
자백이 ‘증거의 왕’으로 군림해야 하나
검찰은 수사 단계에서 어렵사리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증거로 쓸 수 없게 하는 것은 검찰 수사의 한 축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만일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부인이 수사권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지금까지 검찰 수사가 피의자의 자백이나 진술에 의존했고 그것이 수사의 전부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공판중심주의 실현을 위한 개정안은 수사권 조정과도 상관없다.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사법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검사가 작성한 조서의 증거능력이 부인된다고 해서 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수사 단계에서 피의자의 진술에 의존하는 수사와 재판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검·경의 수사권이 조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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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검찰이 공판 절차와 증거법 개정에 조직적으로 반발할 이유는 없다. 공판중심주의가 아니라 ‘법원중심주의’ 또는 ‘법원전제주의’라느니 ‘원님재판’이 될 것이라는 등의 원색적 비난을 할 이유도 없다. 1주일 만에 누구의 지시에 따라 급조한 것이라거나 실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그린 것이라고 폄하할 것도 아니다. 아마도 검찰은 그동안 사개위와 그 후속 추진기구인 사개추위 등 사법개혁 논의 과정에 참여했으면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검찰 내부에서도 논의를 거쳐 공판중심주의적 법정심리 절차의 확립에 관한 논의 과정에 참여했지만, 의견 수렴을 위한 내부 논의가 일부 극소수에 한정돼 많은 검사들에게 생소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조직적 반발로 비치는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검찰 안에서 공론화된 이상 차분히 앞으로의 논의 과정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공판중심주의가 실현된다면 지금보다는 검찰과 사법경찰의 수사권이 약화될지 모른다. 그러나 인적·물적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형사사건을 법정 공방에 부치겠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검찰도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선 선택과 집중이 이뤄져야 한다. 즉, 비교적 가벼운 사건은 신속처리 절차를 두어 처리하면 공판중심주의적 법정심리 절차로 다룰 사건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에만 충실한 공판심리를 진행할 것이기 때문에 수사권이 무력화될 것이라는 주장은 과장된 판단으로 보인다.
검찰도 인정하듯이 공판중심주의의 실현은 거스를 수 없는 방향이다.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공방을 통해서, 그리고 물증을 통해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독일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재판 모습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검찰의 수사 결과를 조서로 확인하는 재판, 자백이 기재된 조서만 제출하면 거의 유죄가 인정되는 통과의례적 재판, 자백이 ‘증거의 왕’의 권좌에서 요지부동인 재판을 경험하고 있다.
기소 여부와 재판에 대비하는 수사를
피고인이 공판정에 나와 있음에도 그의 진술을 들어보는 대신 신문조서를 증거로 쓴다는 것은 재판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제 피의자나 피고인의 입에 의지하는 수사와 재판이 진행돼서는 안 된다. 앞으로 사법경찰이나 검찰의 수사는 기소 여부와 재판에 대비하는 수사여야 한다. 한마디로 게임은 재판정이라는 링 위에서 피고인과 변호인, 검사가 모두 참여한 가운데 벌어져야 한다. 어느 일방(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변호인도 없는 폐쇄된 조사실에서 주도하는 수사 절차가 본게임화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 공판중심주의의 핵심이다. 공개된 법정이 형사절차의 중심에 서야 투명성도 확보되고 국민의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져 사법 신뢰가 회복될 것이다. 이를 통해 자백에 편중된 수사 관행도 개선될 것이며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과 같은 위법수사의 유혹도 사라지게 돼 수사기관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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