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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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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언어엔 ‘결정적 시기’가 있다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조기 이중언어 교육은 약인가 독인가…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유아의 초언어 발달에 긍정적 영향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1988년 미국 연례교육보고서는 이례적으로 이중언어 교육의 필요성과 장점을 역설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주요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대부분이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된 가정에서 자라나 이중언어를 구사했다는 것이다. 언어만큼 인간의 정신활동과 인간 사고의 복잡함·풍부함을 반영하는 존재는 없다. 이처럼 언어가 인간의 지적 능력과 직접 맞닿아 있는 이유는 사고와의 관계 때문이다. 언어와 사고가 상호 작용하며 발달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중언어 또는 다중언어는 사고의 발달을 변증법적으로 촉진한다. 특히 성장하면서 모국어는 물론 제1, 제2 언어까지 공부한 사람은 단일언어를 말하는 사람보다 2~3배수의 어휘를 알고 있고, 언어 체계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지능까지 발달하게 된다.

강압적 교육에 따른 스트레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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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내에서는 조기 이중언어 교육의 유효성이나 적절성 등에 대해 아직 학문적 수준의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20세기 중반 이후 조기 이중언어 교육과 관련한 전세계의 연구결과(표 참조)와 최근 몇년 동안 이뤄진 국내 연구성과를 종합해보면 ‘조기 이중언어 교육이 유용하며 그 사회적 매뉴얼과 기준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는 쪽에 힘이 실리고 있다. 두개 언어를 동시에 습득하거나 학습하는 게 언어 발달과 인지적 성장, 교육적 성취에 긍정적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모국어가 아닌 제2언어를 배우는 데는 ‘결정적 시기’ 또는 ‘중요한 시기’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신경학적·병리학적 요인에 비춰볼 때 성인은 복잡한 주변환경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언어습관을 형성하고 모방하는 것이 어려운 데 비해, 아동은 시간도 많고 지속적 연습이 가능하며 놀이로 언어를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성인의 경우 모국어 언어습관이 고정되는 것도 단점으로 지적된다. 결국 중요한 시기가 끝난다고 여겨지는 사춘기 이후에는 모국어 화자와 같은 언어 능력, 특히 발음을 습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언어를 배울 수 있었던 능력이 경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제2언어 학습에서 어린이가 어른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입증하는 이론들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뇌 유연성 이론’이다. 어린이의 두뇌는 언어 습득에 대한 세포 자체 내의 수용성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어른들은 이 수용성이 줄어들어 언어 능력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실제 더 어린 나이에 언어에 노출될수록 원어민과 비슷한 발음을 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물론 반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모국어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지는 이중언어 교육은 자칫 두 언어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언어 혼합’ 현상을 가져온다는 주장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친숙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강압적인 방식의 외국어 교육이 학습 대상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바람에 생기는 스트레스 현상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가 몇살 때부터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좋을까. 학자마다 차이가 있는데다 개인별 언어 능력의 차이도 커서 평균적인 시점을 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한국의 경우 정도(수준)와 방식의 차이가 있더라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중언어 환경에 자연스럽게 노출시키고 자극을 줘야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970년대 발칸이라는 학자는 이중언어 유아를 ‘초기 이중언어 유아’(제2언어를 4살 이전에 경험한 유아)와 ‘후기 이중언어 유아’(제2언어를 4∼8살에 경험한 유아)로 나눠 연구한 결과 이 두 집단의 유아는 모두 단일언어 유아보다 과제수행률이 높았고, 초기 이중언어 유아가 후기 이중언어 유아보다 높은 점수를 보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이중언어 환경을 조성해주는 시점은 4살 이전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살 이전의 유아를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할 경우 될 수 있는 대로 모국어에 대한 언어적 이해도가 높아야 영어에 대한 흡수나 노출이 자연스럽고 효과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과 경험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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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호체계 변경 경험하며 이해 높아져

1970년대 해외 학자의 연구에 부합하는 연구 사례가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김옥련씨의 논문 ‘유아의 조기 외국어 경험이 초언어능력 및 초인지에 미치는 영향’(숭실대 교육대학원)에 따르면 조기 외국어 경험은 유아의 초언어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 즉, 음운인지(음소를 조작하고 단어를 음소로 분절하고 다시 음소를 단어로 합성하는 능력), 단어인지(단어를 언어의 단위로 인지하고 단어가 임의적인 음성적 이름표임을 이해하는 능력), 통사인지(문장의 문법성 여부와 의미론적 진위를 판단하는 등 문장에 대해 숙고하는 능력) 영역에서 조기에 이중언어 경험을 한 유아들은 그렇지 않은 유아들에 비해 유의미한 차이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들 유아는 이중언어를 쓰면서 부호체계 변경을 경험한다. 즉, 두 가지 언어를 경험하게 되면 자신의 언어를 여러 언어 체계 중 하나로 여기면서 언어현상을 더 일반적인 범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적 조작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초언어능력’(Metalinguistic ability·언어의 적절성, 형식, 복잡성에 대한 판단을 비롯해 발성, 단어, 구문론적 수용성에 대한 판단 능력)의 발달이 촉진된다는 결론이다.

2003년 발표된 남혜경씨의 논문 ‘3세, 4세 유아의 이중언어 경험과 상위언어 능력’(서울대 아동가족학과 대학원)도 이중언어 경험이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남씨는 논문 결론 부분에서 “이중언어 유아가 단일언어 유아보다 단어의 이름이 임의적이라는 것을 더 잘 알고 있고 이름 바꾸기 과제를 쉽게 수행했다”며 “또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같은 이름 혹은 같은 발음을 가진 단어들을 더 잘 찾아냈다”고 밝혔다.



“정신연령이 달라진다”

1940년대 이후 아동의 조기 이중언어 경험에 대한 주요 연구 요약

- “영어만 쓰는 아동들의 정신연령이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함께 쓰는 아동들의 정신연령을 훨씬 능가했다.”(Darcy·1946)
- 두 가지 언어를 쓰는 자신의 딸을 관찰한 뒤 “이중언어 사용이 인지적 발달을 가져오며 단어의 추상성과 상징성을 일찍 배우게 해 각각의 말이 의미하는 표상을 구분하며, 단어의 구성에 주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인지적인 성장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Leopold·1949)
- “아동은 두 가지 언어에 접하게 되면 자신의 언어를 언어체계 중 하나로 보며 ‘초언어 발달’을 촉진할 수 있다.”(Vygotsky·1962)
- “캐나다의 이중언어(프랑스어와 영어) 유아가 대상물 선택 인지 과제에서 단일언어 유아보다 더 높은 수행력을 갖고 있다.”(Peal & Lambert·1962)
- “이중언어 유아를 ‘초기 이중언어 유아’(제2언어를 4살 이전에 경험한 유아)와 ‘후기 이중언어 유아’(제2언어를 4∼8살에 경험한 유아)로 나눠볼 때 이 두 집단의 유아는 모두 단일언어 유아보다 과제수행률이 높았고, 초기 이중언어 유아가 후기 이중언어 유아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Balkan·1970)
- “5살 유아 중 이중언어 유아가 단일언어 유아보다 이름 바꾸기 과제를 더 잘 수행했다.”(Felman & Shen·1972)
- “4∼9살 남아프리카 유아들의 영어와 아프리카어의 능숙함을 비교한 결과 이중언어 유아가 단어간의 의미 관계에 더욱 민감했고 언어의 임의성 과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Ianco & Worall·1972)
- “이중언어 유아들이 가지는 언어처리 전략을 보면 이중언어 유아들은 언어 분석과 단서에 대한 피드백에 민감히 반응하고, 언어의 구조적 차이점을 최대화하고 언어 내 구조를 중립화했다.”(Ben & Zeev·1977)
- “이중언어 유아들은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과정을 통해 인지적인 유연성이 발달한다.”(Cummins·1987)

*김옥련씨 논문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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