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조기 이중언어 교육엔 어떤 비법이 있을까…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환경에 노출시켜야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무엇이 조기 이중언어 교육을 연착륙시킬까. ‘안착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첫 만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난해 2월 민족사관고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곧이어 하버드·프린스턴·스탠퍼드 등 미국 주요 대학 10곳에서 동시에 합격통지서를 받아 화제가 됐던 박원희(19·현재 하버드대 재학 중)양이 영어와 처음으로 만난 장면. 박양의 어머니 이가희(43)씨는 “원희가 여섯살 때였는데 당시에는 변변한 영어학원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 때 마침 이씨의 친구 한명이 미국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이웃으로 돌아왔다. 이씨는 당장 박양의 동생 등 4명으로 팀을 꾸렸다. 박양은 첫 수업을 잊지 못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영어 선생님은 4명의 아이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주방에는 오이·당근·배추·시금치 등 각종 야채가 준비돼 있었다. 선생님은 야채를 하나씩 들고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회화 공부 시작
“This is a cucumber.” “This is a carrot.” 그러더니 갑자기 오이를 부러뜨리면서 선생님은 “It’s fresh”라고 했단다. 문자의 형태로 단어를 접하기 전에 음성과 사물로 직접 영어와 조우한 것이다. 과자를 만들면서는 ‘triangle’ ‘rectangle’ 등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를 익히는 식이었다. 박양은 “적어도 영어를 처음 접하는 어린 시절에는 ‘재미’와 ‘흥미’가 가장 중요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시켜야 한다는 원칙은 조기 외국어 교육에서 고갱이에 해당한다. 그래야 일부러 암기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기억에 남아 학습 효과가 극대화한다. 모국어를 배울 때도 일상에서 부모 등 가장 친근한 이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듣는 게 언어에 익숙해지는 첫 단계인 것처럼 영어 등 제2언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영어교육에 적용해보면 ‘노는 영어’가 가장 훌륭한 조기영어 교육법인 셈이다.
그러면 누구와 함께 노는 게 제일 좋을까. 뭐니뭐니 해도 부모가 가장 좋은 선생님이다. 친근감과 신뢰감 때문에 아이가 쑥스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지연(36·인천시 부평구)씨는 아이들을 ‘바이링궐(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베이비’로 키우는 게 꿈이다. 4월7일 기자가 유씨 집을 찾았다. 유씨의 다섯살배기 아들 도형이가 “I wanna have icecream” 하는 발음을 들어보니 원어민의 그것이었다. 깜짝 놀라 물어봤더니 이 집 식구들은 모두 ‘국내파’란다. 유씨가 해외로 나가본 건 괌으로 간 3박4일짜리 신혼여행이 전부. 인하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도형이를 낳을 때까지 수능 영어강사를 한 것이 영어 체험의 전부였다. 유씨는 “이때까지도 영어회화에는 전혀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다 도형이를 낳고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기자가 작정을 하고 아이를 상대로 영어 테스트를 해봤다. 코를 가리키며 “What’s this?” 하고 물으니 기본으로 통과했다. “What’s your name?” 하고 묻자, “Danny”라고 대답한 뒤 곧바로 “English name”이라고 덧붙인다. 이번엔 수준을 좀 높여봤다. “How many friends do you have in kindergarten?”이라고 묻자, “I’m so shy”라는 다소 생뚱맞은 대답이 나왔다. “Why are you so shy?” 하는 질문에 도형이는 “Mom and Dad aren’t there”라고 답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본적인 생활회화의 수준을 약간씩 벗어나고 있는 듯했다. 도형이는 엄마가 팝콘을 다 굽자 “Would you please unfold?”라고 말했다. 유씨는 “목욕할 때, 부엌에 있을 때, 게임을 할 때 등 모든 상황에 맞는 문장 20~30개를 집안 곳곳에 붙이는 방식으로 ‘가족 생활영어 대본’을 만들 것을 권했다.
시기 놓쳤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부모가 주는 자극은 사실 제한이 없다. 제2의 언어를 넘어, 제3의 언어도 자극 대상이 될 수 있다. 인천에 사는 임주리(31)씨는 세살배기 아들 호수에게 세 가지 언어자극을 주고 있다. “처음에는 모국어를 확립시킨 뒤에 외국어 교육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스위스나 캐나다처럼 2개 국어를 일찍부터 시작하는 나라도 있고 국제결혼을 한 커플들도 생각해보니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어른이 된 뒤에 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돈과 노력이 들잖아요.” 우리말과 일본어 동시통역 능력이 있었던 임씨는 일본 동화책도 원어로 읽어주고 영어 동화책도 원어로 읽어줬다. 말도 하고 테이프도 들려줬다. 그러던 어느 날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하루는 호수가 ‘엄마 문 열어주세요’ 한 뒤에 ‘마마 도아오 아케테 구다사이’라고 하는 거에요, 글쎄. 꾸준히 자극을 주면 아이들은 어느 순간에 반응을 보이는구나 생각했죠.”
원어민들과 농담을 할 정도로 영어를 구사하는 딸 류영지(8)양을 둔 윤찬희(35·대구)씨는 “아이가 잘할까 못할까를 고민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좋아할까 안 좋아할까를 기준으로 삼아야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이중언어 교육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영지는 자신의 특기인 ‘외국인과 직접 대화하기’를 위해 영어만 써야 하는, 대구 계명대 국제라운지에 가끔씩 간다. 겁도 없고, 스스럼도 없이 외국인에게 불쑥 다가가는 버릇은 몇년 된 것이다. 윤씨는 첫 돌을 전후해서부터 언어와 관련한 자극을 충분히 줬다. 대신 사교육기관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안정적으로, 충분히, 양껏 주자는 생각에서 챙기다 보니 영어책 800권을 포함해 모두 4천권의 책과 영상물이 쌓였다. ‘관심’이라는 전압을 올리면 올리수록 전기에 감전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지도 모른다.
이중언어에 대한 노출의 시기를 놓쳤다고 이중언어 교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배려 깊은 사랑’이라는 기치로 온 나라에 독서교육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푸름이 아빠’ 최희수(43)씨는 “처음 이중언어 환경에 노출하는 시점도 중요하지만 이중언어를 노출할 당시의 환경과 학습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면서 “초등학교 이후라도 성공적인 이중언어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언어 영재인 푸름이(현재 중학교 2년 재학 중)가 이중언어에 노출된 경험을 들려줬다.
“초등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학교에서 영어학습을 시작한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알파벳부터 가르치는 겁니다. 예전에 우리가 그렇게 고생했던 방식이더라고요. 우리가 25년 동안 그렇게 영어 공부를 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상태로 만든 것이 바로 그 방법이에요. 그래서 다른 노출 방법을 찾았죠.” 최씨는 푸름이에게 모국어를 배우는 원리와 똑같이 많이 듣고, 동시에 많이 읽도록 했다. “이제는 전문 분야가 아닌 것은 대부분 듣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관해서는 읽는 수준이 전문가와 비슷하거나 높죠.”
모국어 수준을 높여야 한다
최씨는 ‘모국어의 추상성’이 깊어져야 영어의 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중언어 교육의 깊이를 높이기 위해서도 모국어를 구사하는 수준을 빨리 높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글은 배우기 쉽게 만들어져서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익힐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 큰 강점”이라는 게 최씨의 주장이다. 최씨의 얘기를 듣고 ‘언어’에 대해 한 학자가 내린 정의를 다시 살펴봤다. ‘언어는 청각적인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발음기관에 적응시키는 과정으로 획득되는 인지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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