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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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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앞바다에 놀러오게 하라

등록 2005-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고 이수현씨를 기억하는 보통의 일본인들… 시마네현의 ‘물갈이 총선’ 끌어낼 적극적인 민간교류를

▣ 신명직/ 일본 구마모토가쿠엔대학 조교수

신주쿠 방면 뒤쪽에서 33m를 지나 50m 지점에 이르는 17m 마의 플랫폼. 옆 철로와의 사이엔 높이 1m짜리 철책이 있고, 플랫폼 발 밑의 대피공간조차 막혀 있던 그곳에서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을 고 이수현씨.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다 죽은 고 이수현씨의 어떤 힘 같은 것이 나에게 이 글을 쓰게 하는 것 같다.

‘반성’의 메시지, 나고야의 용기로 이어져

나는 지난해 1월에 있었던 이수현 추모 3주기 행사에서 일본의 경제평론가 다케우치 히로시가 했던 추모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고 이수현씨의 행동이 일본 사회에 준 충격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 “그것은 그의 행동이 일본 사회와 일본인을 반성하게 했다는 점”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반성’이다. 이수현은 일본인을 ‘반성’하게 했다. 해방 이후 무수히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정말이지 일본인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 ‘반성’은 물론 거창한 일본의 정치가나 지도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이수현씨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고야에서 한 일본인이 고등학생을 구하기 위해 열차 도착 방송이 나온 상황에서도 선로로 뛰어들어 그 학생을 구해낸 사건이 있었다. 사건 직후 열차에 뛰어들었던 그는 “사고가 난 순간, 신오쿠보역에서의 사고가 머리를 스쳤고,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기주의를 ‘반성’하는 힘,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고 이수현씨는 보통의 일본 사람들에게 준 것이다.

정말이지 한국이 일본 사람의 진정한 ‘반성’을 촉구하고, 일본인들에게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하고 싶다면, 나는 지금 한국에 고 이수현씨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일본을 향해 규탄의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과연 일본이 진정한 ‘반성’을 할 수 있을까. 한국을 향해 열어가던 마음조차 오히려 문을 닫아버릴 성싶다.

최근 일본 텔레비전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허수아비와 일장기를 태우는 모습이 여과 없이 장시간 방영되고 있다. 한류 붐을 통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된 보통의 일본 사람들은 의아한 눈초리와 경계의 눈초리로 텔레비전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만으로도 독도 문제를 일본 전국민의 문제로 확대시키고자 했던 시마네현 몇몇 사람들의 목표가 달성됐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시마네현 몇몇 사람들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을, 일본 전 매스컴이 주목하고 일본의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안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대체 일본에 평화보다 전쟁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지. 분명한 것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전쟁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아니 전쟁을 사랑하는 사람은 1천명 혹은 1만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본 텔레비전에 장시간 방영된 한국의 규탄방송을 지켜보면서, 평화보다 전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9999만명의 일본인을 줄세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배용준과 원빈의 미소를 사랑하는 보통의 일본 사람들을 전쟁주의자의 발 밑으로 떠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일본의 소수 전쟁주의자일 뿐, 보통의 일본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겐 이들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수의 동아시아인들, 평화와 공존을 더 사랑하는 동아시아인들의 바다에 그 전쟁주의자들을 포위·고립시켜 그들을 고독한 섬으로 만들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왜곡된 교과서 전파 막은 건 ‘교류의 힘’

나는 일본을 향해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한국을 다시 한번 살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삼성전자의 순이익이 소니를 비롯한 일본 내 전자회사 톱10의 순이익을 합친 것과 같고, 정치는 다른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민주화와 투명화를 이루어냈으며, 문화 역시 아시아에 ‘한류’라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나라라면 이젠 아시아의 리더답게 통 크게 나와야 하지 않을까. 굶주린 사람들이 넘쳐나고,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도쿄유학을 떠나던 100년 전의 조선이 아니다.

성숙하고 통 큰 코리아의 목소리란 어떤 것일까. 이를테면 시마네현에 사는 일본 어부들의 생계가 문제라면, 그들을 독도까지가 아니라 자매관계를 맺고 있는 경상북도 앞바다까지 와서 조업을 하게 하고, 자매 자치단체인 경상북도 어부들 역시 시마네현 앞바다까지 가서 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함께 웃으며 고기를 낚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경상북도와 시마네현의 바다에 ‘평화의 배’를 띄우고, 그들 사이에 있는 외로운 섬을 ‘평화의 섬’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건 정말 꿈에 불과한 것일까.

시마네현 의원들 역시 시마네현에 사는 보통의 일본 주민들의 투표에 따라 결정된다. 시마네현에 사는 보통의 일본 사람들을 믿고 그들과 함께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만들어내, 대립과 갈등의 길을 선택한 시마네현 의원들을 심판하게 할 순 없을까.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선택을 한 국회의원들을 물갈이해낸 한국의 지난 총선 때처럼 말이다. 경상북도의 시민단체는 시마네현과의 관계 단절을 선포할 것이 아니라, 더욱 왕성하게 평화를 사랑하는 대다수 현민들과 교류를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역사교과서 문제만 해도 그렇다. 몇년 전 ‘새로운 역사 교과서’ 채택을 둘러싸고 역시 화형식과 규탄대회가 열리고, 교류 단절 선포식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 교과서’ 채택을 최소한의 퍼센트로 막아낸 것은 한-일간의 민간교류, 평화교류를 강화한 덕택이었다. 한-일 민간교류를 통해 일본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역사체험을 하도록 한 것 등이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채택을 막아낼 수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 이수현씨의 죽음, 한국이 생각할 차례

전쟁주의자들은 일본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다. 문제는 그들을 규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평화와 우정의 목소리를 만들어낼지 서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목소리 높인 규탄대회는 보통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전쟁주의자의 재무장 주장에 동조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믿어야 한다. 그것만이 오늘날의 대립과 반목과 전쟁을 넘어서는 유일한 힘이다. 우리는 ‘추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 두꺼운 옷을 벗게 한다’는 진리를 믿고 있고, 그것을 실천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보통의 일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진리가 통할 수 있음을 믿고 역시 실천해나가야 한다.

고 이수현씨의 죽음은 일본인들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그리고 자기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게 하는 자성의 힘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고 이수현씨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추운 바람’이 아닌 ‘따뜻한 햇볕’이야말로 모두를 껴안는 힘이 아닐까. 올해가 말 그대로 ‘한-일 우정의 해’ 원년이 되길 간절히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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