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늙은이 이야기를 다룬 영화 <고독이 몸부림칠때> 감독이 말하는 ‘진짜 노인문제’
▣ 이수인/ 영화감독
나는 일곱 남매의 막내다. 위로 형 셋, 누나 셋이 있다. 사십을 훌쩍 넘긴 지금도 나는 집안에선 늘 ‘우리 막내’란 이름의 애일 뿐이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뜬 뒤라 ‘불쌍한 막내’에 대한 형과 누나들의 연민과 애정은 때로 짜증이 날 정도로 유별난 데가 있다. 특히 일곱살 터울인 바로 위 형이 그렇다. 이 양반은 나만 보면, 면도 좀 하고 다녀라, 옷 좀 귀티나게 입어라, 술 좀 덜 마셔라… 안 하는 잔소리가 없다. 나이를 들먹이며 저항을 해보지만, 가소롭다는 웃음만 돌아온다. 형이 술에 취해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기라도 하면, 저 양반 혹시 뽀뽀라도 하는 거 아닐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아마 내 나이 쉰, 예순이 넘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나는 영원히 노인 대접 받기는 글렀다.
영화에선 11살 꼬마가 더 노인스러워
나이 든 남녀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한편을 만든 뒤로, 노인과 노년 문화를 다루려는 잡지나 방송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심심찮게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영 어색하고 당혹스럽다. 나는 한번도 그런 주제를 각별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노인영화’를 만들었으니 노인 문제에 대해 나름의 관점과 철학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노인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 ‘노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비교적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노인 혹은 노년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건 없었다. 지금까지 영화가 자주 다루지 않았던 환경, 주목하지 않았던 세대의 얘기로도 재미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계산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자기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나이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짧은 인생,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다 갈, 인간으로 봐줄 것을 요망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영화에선 오히려 11살 꼬마애가 훨씬 어른스럽다 못해 노인스럽다. 정작 나이 든 주인공들은 툭하면 치고받고, 유치하게 연애질하고,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수틀리면 깽판치는 철부지들이다.
나는 노인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관점과 발상이 문제라고 본다.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노인, 노인집단을 규정하는 그 순간, 그 의식 안에서 진짜 ‘노인 문제’가 발생한다. 일흔다섯의 나이에 세계가 놀랄 만한 영화를 만들어낸 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인 문제’는 뭘까? 삼성그룹의 노인 이건희는 어떤 ‘노인 문제’로 고통받고 있을까? 얼마 전 술에 취해 서울 합정동의 밤거리를 걷다 세 사람의 늙은 깡패를 만난 적이 있다. 청바지에 가죽점퍼, 사납고 불량스런 눈매를 가진 명백한 깡패였다. 얼핏 보기에도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 깡패들은 우리 일행이 좀 떠든다는 이유 하나로 느닷없이 시비를 걸고는 눈을 부라리고 욕설을 퍼붓더니 금세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잽싸게 도망쳐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늙은 깡패가 더 무섭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깡패 노인이 있고 선량한 노인이 있다. 부자 노인이 있고 가난한 노인이 있다. 옹졸한 노인이 있고 너그러운 노인이 있다. 세계는 넓어서 할 일이 많은 노인이 있고 장기 두고 막걸리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노인이 있다. 튼튼한 노인이 있고 병든 노인이 있다. 쿨하고 샤프한 노인이 있고 주책맞고 덜 떨어진 노인이 있으며, 밝히는 노인이 있고 덜 밝히는 노인이 있다.
부디 노인을 공경하지 말지어다
노인 일반은 없다. 살아온 햇수가 많다는 것 말고는 노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 마땅한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노인은 없다. 돈 없고 힘 없고 빽 없고 일 없고 아프고 외로운 노인들은 있다. 하나 그런 애들도 있고 그런 청년들도 있다. 애건 청년이건 노인이건, 중요한 건 저마다의 삶을 둘러싼 환경과 처지, 그리고 삶을 대하는 각자의 태도일 뿐이다.
부디 노인을 공경하지 말자. 애건 어른이건 착하고 훌륭한 사람만 공경하자. 노인을 멀리하지 말자. 애건 어른이건 나쁘고 더러운 인간만 멀리하자. 버스와 지하철의 경로석을 없애버리자. 경로당 간판도 내려버리자. 노인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자. 노인은 없다. 사람이 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내란대행’ 한덕수 석달 전 본심 인터뷰 “윤석열은 대인, 계엄령은 괴담”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한덕수, ‘200표 미만’ 탄핵안 가결땐 버틸 수도…국회, 권한쟁의 소송내야
형사법 학자 “내란 반대했어도 회의 참여한 국무위원 처벌 받아야”
새 해운대구청 터 팠더니 쏟아져 나온 이것…누구 소행인가?
국힘 김상욱·김예지·조경태·한지아, 헌법재판관 선출안 표결 참여
분노한 시민들 “헌법 재판관 임명 보류 한덕수 퇴진하라” 긴급 집회
아침에 침대 정리하면 건강을 해칩니다 [건강한겨레]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단독] 문상호 “계엄요원 38명 명단 일방 통보받아 황당” 선발 관여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