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 증가율 둔화하며 소비에 청신호… 개인소득 제자리걸음이 경기 회복의 걸림돌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신용불량자 리스트에 올라 있는 김상훈(가명·39)씨는 지난 1월 200만원짜리 중고차를 한대 샀다. 100만원 이상 ‘큰돈’을 지갑에서 꺼내 쓴 건 한참 오랜만이다. 2002년 신용불량자 명단에 오를 당시 김씨의 채무는 5개 금융기관에 걸쳐 5천여만원에 달했다. 김씨는 2003년 초부터 신용회복위원회의 개인워크아웃 프로그램을 적용받고 있다. 2007년 초까지 50개월간 매월 87만원씩 갚아나가는 프로그램인데, 지금껏 꼬박꼬박 빚을 갚고 있다. 이제 중간 지점까지 왔다. 25개월 정도만 더 참고 갚으면 가계부채의 짐을 털고 새로 출발할 수 있다. 그는 “채무를 어느 정도씩 상환하면서 마음의 부담도 조금씩 덜고, 가계 긴축재정도 차츰 완화되고 있다”며 “자신감도 점차 생기고, 그래서 중고차라도 한대 구입할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빚 갚아나가는 사람 26만여명
김씨는 한달 소득 중 절반을 빚 갚는 데 쓰고, 남은 돈은 거의 몽땅 저축해왔다. 직장 급여가 다소 올랐지만 부업으로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다. 최근엔 디지털 카메라도 한대 장만했다. 김씨 부부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다. 아이를 가지려고 했는데 2002년에 가계부채의 수렁에 빠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소비할 여력이 서서히 생기고 이제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기 때문에 아이를 갖는 계획도 다시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역시 신용불량자로 등록돼 있는 장문희(가명·38)씨는 여성 가장이다. 장씨는 1천만원에 달하는 빚에 허덕이던 2003년 초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워크아웃 대상자로 선정돼 54개월간 23만원씩 갚아나가는 프로그램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다. 작은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장씨는 “이제 빚을 절반 정도 갚아 한숨 돌리고 있는데, 최근 아이들을 학원에도 보내기 시작했다”며 “우리 형편에서 좀 많은 돈을 오랜만에 학원비로 썼다”고 말했다. 또 “직장 소득만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이제 소비를 조금씩 늘려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2003년 이후 소비를 짓눌러온 ‘가계부채’가 순조롭게 조정되면서 소비에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김씨와 장씨처럼 채무 상환 규모와 일정이 확정돼 부채를 갚아나가고 있는 채무조정 완료자는 현재 26만8천명에 이른다.
2003년 이후 국내 소비침체 장기화를 부른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게 과도한 가계부채다. 2001년과 2002년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을 비롯해 가계들이 마구 빚을 얻어 소비한 덕분에 경기는 활황세를 보였지만, 급증한 가계부채는 그 뒤 한국 경제의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이 되고 말았다. 가계마다 과도한 부채에 허덕이면서 소비 여력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내수가 침체되면서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월15일 “(현재 경기 회복 조짐은) 수출이 예상보다 잘되고 가계부채 조정이 순조롭게 진행된 효과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연 우리나라 가계들은 부채의 수렁에서 점차 빠져나와 이제 소비를 늘릴 수 있을 만큼 숨통이 트인 것일까?
2004년 9월 말 총가계부채 잔액은 466조원이다. 1999년 말(214조원)의 두배를 넘는다. 가구당 빚은 1998년 말 1321만원에서 지난해 3분기 3041만원으로 급증했다. 빚이 급증하면서 가계의 부채 상환 부담도 대폭 늘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4년 1∼3분기 도시근로자 가구의 가구당 부채상환액은 월평균 64만원으로 가처분소득(월평균 271만원)의 23%에 달했다. 그러나 가계의 부채 규모는 늘고 있지만 부채 증가율은 뚜렷하게 감소하고 있다. 통계청 ‘가계수지동향’에 따르면, 가계신용(금융권 가계대출+판매신용)은 2000년(266조원)부터 2002년(439조원)까지 연간 24∼28%의 폭발적 증가를 보였다가 2003년(447조원)에는 1.9% 증가에 그쳤다. 지난해에도 1분기 0.6%, 2분기 1.7%, 3분기 1.6%로 증가율이 크게 둔화됐다.
LG경제연구원의 ‘가계부실지수’(이자상환비율·실업률·가계흑자율·금융자산/금융부채 비율을 종합해 산출)를 보면, 전분기 대비 가계부실지수 증가율이 지난해 1분기부터 높아지기 시작했으나 4분기에 정점을 찍고 올 1분기에 완만하게 하락하고 있다(표 참조).
가계부실지수 올 1분기부터 하락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가계 부실의 수준은 여전히 높지만 심화되는 정도는 약해지고 있다. 가계 부실이 완화되면 소비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올 들어 가계부실지수 증가율이 둔화되면서 완만한 소비 증가를 예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 연구위원은 또 “가계부실지수 증가율은 민간 소비 증가율과 역관계를 갖는데, 실제로 민간 소비가 증가하는 것보다 1∼2분기 정도 선행한다”고 말했다.
가계부채의 조정 속도는 ‘비소비 지출’(차입금 이자·조세·연금·사회보험·교육비 송금 등) 규모에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도시근로자 가구의 월평균 비소비 지출 규모는 2002년 30만9천원에서 2003년 2분기 33만8천원, 3분기 36만2천원에 이어 지난해 1분기 38만6천원(전년 동기 대비 20% 증가), 3분기 40만원(10% 증가)으로 계속 증가했다. 2002년까지는 가계마다 빚을 얻어 펑펑 썼으나 2003년 2∼4분기(비소비 지출 증가율 14%대)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돼 차입금 이자 상환 등을 통해 부채를 조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비소비 지출 항목에 조세와 교육비 송금 등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가계마다 가처분소득 중 상당 부분을 빚 갚는 데 써왔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부채 상환 부담 때문에 소비 여력이 약화된 게 사실이지만, 동시에 부채 상환이 진행되면서 가계마다 소비에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기고 있는 셈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2002년 말 115%에서 2003년 말 110%로 낮아졌고, 가처분소득 대비 이자부담 비율도 2002년 말 10.4%에서 2003년 말 9.6%로 떨어졌다. 부채 상환 능력이 점차 향상되는 것이다.
자동차 등 내구소비재 소비 회복
사실 소비가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는 지난해 하반기 가계신용(가계부채+판매신용) 지표를 통해 솔솔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자동차 할부·백화점 카드를 합친 ‘판매신용’ 잔액(2004년 9월 말 현재 24조원)의 감소폭은 지난해 4분기부터 뚜렷하게 둔화됐다. 판매신용은 내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던 2000∼2002년까지 연간 16∼47%의 대폭적인 증가를 기록했으나 소비가 크게 위축되기 시작한 2003년에는 무려 44.5%나 감소했다. 판매신용 감소폭 추이를 보면 2003년 1분기 -11.2%(5조3천억원), 2분기 -14.2%(6조원), 3분기 -16.8%(6조1300억원)를 찍은 뒤 감소폭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2003년 4분기 -12.4%(3조7600억원), 2004년 1분기 -7.0%(1조8600억원), 2분기 -2.1%(5천억원), 3분기 -1.0%(2500억원)를 기록했다. 지난해 4분기에는 플러스로 돌아섰을 것으로 점쳐진다.
한국은행 금융통계팀 정유성 차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판매신용 감소폭이 크게 둔화됐기 때문에 한국은행 내부적으로 소비가 회복 궤도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전망을 했으나, 재정경제부쪽에서 긍정적 전망을 섣불리 내놓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해서 당시에 소비 회복 조짐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했다”며 “판매신용이 플러스로 돌아서는 시점이 소비가 본격적으로 회복되는 시점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등 비교적 값비싼 소비지출에 속하는 내구소비재는 생활필수품과 달리 전체 소비가 회복될 때 다른 품목보다 일찍 반등하는 특징을 보인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소비자태도조사’(전국 1천가구 대상으로 1월 중순 조사)를 보면, 내구재구입 태도지수는 지난해 3분기 47.8로 기준치(50)를 밑돌았으나 4분기에 49.8로 오른 뒤 올 1분기 52.8로 기준치를 웃돌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지훈 수석연구원은 “2003년과 2004년에 내구재 소비가 지나칠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며 “장기간 내구재 구입을 지연시켰기 때문에 억제돼 있던 소비자들의 구매 심리가 소비 사이클상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지난해 말 가계부채가 5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등 가계부채 규모는 여전히 계속 늘고 있다. 하지만 가계부채 측면에서 소비 회복 여력을 따질 때는 명목국내총생산(GDP)을 고려해야 한다. 명목GDP와 견줘볼 때 가계부채 비율은 2001년 54.9%, 2002년 말 64.2%로 치솟아 가계 부채가 규모와 속도 면에서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그러나 명목GDP 대비 가계부채는 2003년 62.0%, 2004년 말 59.5%로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가계대출은 명목GDP 증가율 정도만큼 늘어나게 마련이다. 한 나라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명목GDP가 증가하는 만큼 가계가 대출받아 쓰는 부채도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비록 가계부채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증가율은 ‘적정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가계신용 비율은 높은 수준
그러나 가계부채가 여전히 경기 회복과 소비 확대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명목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가계부채가 대폭 늘어나기 직전인 2001년을 100으로 기준)은 지난해 3분기 말에 126으로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가계신용 규모가 앞으로 지난해 평균증가율 정도에서만 늘어나더라도 2001년 수준에 도달하는 건 2010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LG경제연구원쪽은 “여전히 높은 가계부채 수준, 고용 없는 성장 추세 등을 감안할 때 가계부채가 당분간 크게 개선되기는 어렵다”며 “가계부채가 지속적으로 소비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계부채가 개선되고 이에 따라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되살아나려면 무엇보다 소득 증가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데 한국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기업소득은 급증하는 반면 개인소득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소득과 개인소득간 양극화는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임금소득과 소규모 자영업자 소득을 모두 합쳐 ‘노동소득’으로 간주할 경우 개인소득 증가율은 1990∼96년 7.0%에서 2000∼2004년 2.4%로 떨어진 반면, 기업소득 증가율은 같은 기간에 6.5%에서 18.9%로 대폭 늘었다. 2000∼2003년까지 개인 실질소득 증가율은 0.3%에 그쳤으나 기업소득 증가율은 무려 62.6%에 달했고, 2004년에 개인소득 증가율은 2.6%, 기업소득 증가율은 38.7%에 달했다. 한국은행 국민소득팀 최규권 과장은 “가계소득은 거의 늘지 않는 데 비해 기업소득은 높은 증가율을 기록해 소비 부진과 체감경기 악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설비투자를 통해 고용을 늘림으로써 크게 늘어난 기업소득이 가계 부문으로 빨리 흘러들어가게 해야 경기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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