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노동자들 울리는 대기업·정규직·남성 중심 ‘주류 노동운동’의 패권적 행태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누구하고도 통화가 어려울 겁니다”(기아차 광주공장 노조 관계자), “불났는데 부채질하는 것 같아서 영…”(기아차 화성공장 비정규 노동자), “언론의 몰매가 아프오. 어떻게 보도될지도 모르고…”(기아차 광주공장 현장활동가), “집행부 물러나고 바로 선거 체제 들어갔으니 온통 그쪽으로 쏠리겄제… 두고 볼 뿐이제”(기아차 광주공장 대의원).
설 연휴 전에도, 또 그 뒤에도 기아차 노동자들은 도통 취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기아차 밖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꾸준히 쓴소리를 내왔던 운동가들마저 “할 말은 많지만 다음에 얘기하자”며 입을 다물었다. 전국여성노조 관계자는 “누굴 탓하고 뭘 지적할 상황조차 못 된다”고 말했다.
노동운동이 벼랑 끝에 몰렸다. ‘외부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지지대’가 무너진 양상이다. 도덕성과 명분의 밑바닥이 드러났다. 현장 노동자들은 처지와 조건에 따라 상황 인식에 온도차를 보였으나, 대기업·정규직·남성 중심의 ‘주류 노동운동’이 자기 한계를 적나라하게 내보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 폐단을 몸으로 겪었던 이들의 ‘말 못할 울분’은 더 크다.
“우리를 팔아먹지 말라”
기아차 노조는 채용 비리로 지탄을 받는 와중에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패권적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지난달 25일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도급업체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조 집행부가 비정규직 노조 문제로 공청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노조는 “노동자회보다는 노사협의체를 만드는 게 낫다”며 업체와 같은 논리를 폈다. 다른 공장과 마찬가지로 화성공장도 정규직들이 꺼리는 열악한 작업은 대부분 비정규직들의 몫이다. 쇳물을 부어 만든 엔진 부품을 다듬는 일을 하는 주철주조공장의 비정규직 가운데에는 60대 이상도 적지 않다. 이들 중 일부가 노동자회를 만들어, 지난달 초부터 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잔업 거부를 하고 있다.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솔직히 회사보다는 (정규직) 노조쪽에 원망이 더 많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회가 생기기 전에는 산재 처리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임금은 정규직 절반이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노조 말고 노사협의회를 하라고 할 수 있나. 자기들 편하자고 남 살길까지 막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체 인력이 1만500명인 화성공장에는 현재 24개 업체 2500명의 비정규직이 ‘사내 하청’ 명목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1997년 노사 합의로 비정규직을 1500명 이상 늘리지 않겠다고 정했으나, 계속 늘었다. 비용을 절감하려는 회사쪽과 열악한 작업을 피하려는 노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화성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월26일 수원지방노동사무소에 “기아차가 비정규직 2500명을 불법 파견 형태로 고용하고 있다”고 진정을 냈다.
지난달 22일 분신을 기도했던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최남선씨는 “우리도 정규직 드나드는 정문 앞에서 데모 한번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노동부가 현대차의 하청 노동에 대해 ‘도급을 위장한 불법 파견’ 판정을 내린 것을 계기로, 비정규직 노조가 정규직화를 내걸고 일부 라인에서 부분 파업을 벌일 때였다. 비정규직 노조 관계자는 “최씨의 분신 전날 비정규직 150여명이 잔업을 거부하고 정문 앞에 모였는데 경비대가 정말 작신댔다. 과연 정규직 집회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정규직이 몇명만 있었더라면 그랬을까 하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현대차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온 편이나, 피부에 와 닿는 지원은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한 현장활동가는 “비정규직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팔아먹지 말라’ ‘연대를 들먹이지 말라’는 격앙된 목소리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50여명은 설 연휴 기간에도 계속 농성을 벌였다.
정규직 노조의 결단이 필요하다
현대차의 한 정규직 조합원은 “비정규직 구호 속에 ‘정규직 때려잡고 비정규직 정규직화하자’는 게 있는데, 상대적 박탈감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그는 “조합원들은 비정규직이 정규직화하면 자신의 고용 위협이 심각해질 것이라 여기는 게 사실이나, 조합원들은 집행부 성향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류 노조’의 패권적 태도는 노동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 직접적인 고용 위협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광주 금호타이어 여성노동자 23명은 촉탁직 주부사원이라는 이름으로 1994년 고용돼 ‘비드반’에 배치됐다. 파업 후유증이 컸던 해였다. 회사는 시대 변화에 따른 여성 채용을 내세웠지만, 노조는 강성 부서의 투쟁력을 약화하려는 의도라고 반발했다. 여성노동자들은 그 뒤 6년 동안 상시적인 해고 위협을 느껴야 했다. 회사가 아닌 노조로부터였다. 이들의 ‘거취’는 대의원 선거 때마다 단골 쟁점이 됐다. 노조나 출마자는 설문조사를 통해 ‘투쟁력을 약화하는 회사의 기도는 분쇄해야 한다’는 여론을 부추겼다. 조사 결과 80% 이상이 “여성 인력을 남성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신들의 ‘단결’을 위해 ‘한줌도 안 되는’ 여성노동자들의 밥줄을 흔들어댄 것이다.
심지어 2000년 노사안정위원회는 여성노동자들을 1년에 8명씩 3년에 걸쳐 남성 정규직으로 대체하기로 합의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전국여성노조 산하 금호타이어 분회를 결성해 노조 대 노조로 협상을 시작했다. 3년에 걸친 싸움 끝에 2003년 이들은 다른 부서로 전환 배치됐다. 전국여성노조 관계자는 “노조는 조합원의 정서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대의원을 만나는 것도 도와주지 않았다”면서 “현장 조합원들은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이 턱없이 낮고 몇년 동안 함께 일하며 정도 들었는데, 노조의 논리에 휩쓸리면 수수방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흔히 조합원 정서 때문에 노조가 뭘 못한다고들 하나, 이 경우는 거꾸로 된 사례”라고 덧붙였다.
비주류 노동자들은 대기업노조의 패권적 행태가 도덕성과 연대 의식이라는 노조의 전통적 정체성마저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조합비라는 막강한 밑천과 쪽수라는 거대한 힘을 자신들의 특혜를 강화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며 울분을 터뜨린다. 기아차 채용 비리 사태에서 보듯 대기업노조의 밑천과 힘은 비리의 온상으로 작용할 위험도 있다.
노조지부장은 ‘그랜저’를 몰아도 될까?
현대차노조 전주지부(지부장 채규정)의 전임자윤리강령은 의미심장한 ‘금지 항목’들을 정하고 있다. △회사와 모든 협의 창구를 단일화하고 개인 합의를 금지한다 △회사쪽 간부와 회식 등 비공식 만남을 금지한다 △전임자 신분을 이용한 청탁이나 거래 일체를 금지한다 등이다. 2003년 현 집행부가 출발할 때 도입한 이 강령은 반성의 의미가 강했다. 그만큼 일상적인 문제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조 지도부가 누리는 특혜는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다. 5∼6년 전부터 회사가 각 본부별로 노조지부장에게 그랜저급(울산), 소나타급(전주·아산·남양) 차량을 지급해주는 것은 지금까지 찬반이 갈린다. “노조의 정체성을 흔드는 처사” “회사의 미끼를 무는 꼴”이라는 반대론과 “차를 만드는 노동자 대표가 응당 누릴 권리” “자본가만 고급차 타란 법 있냐”는 찬성론이 맞섰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한 현장활동가는 “집행부에는 ‘투쟁의 성과’일지 모르지만 하나둘 특혜를 받아들이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자본과의 타협에도 둔해진다”면서 “비정규직들뿐만이 아니라 현장 조합원들이 느끼는 위화감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귀족노조라는 일각의 지적을 자본의 음모라고만 치부할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기업·정규직·남성이 아닌 대다수 비주류 노동자들에게 대기업노조는 이미 노동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는 ‘전혀 다른 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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