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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그늘] 그때 그 헌법, 한 사람을 노래했네

등록 2005-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독재정권의 악순환을 개시했던 유신헌법… ‘통일주체국민회의’와 ‘긴급조치’에 기본권은 없었다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국민들의 압도적 찬성과 지지를 받고 통과 확정된 것은 우리 국가 장래를 위해 매우 경하할 일이다. …며칠 전 내가 담화에서도 강조했듯이 10월 유신은 헌법 개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산적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인 길을 마련한 데 지나지 않으며 유신 과업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각부 장관들은 이러한 뜻을 위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인식시켜 우리 정부가 보다 더 깨끗하고 명랑하고 훌륭한 정부가 되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확정된 지 사흘 뒤인 1972년 11월24일. 청와대는 이런 내용의 ‘유신헌법 확정 통과에 따른 대통령 각하 유시’를 정부 부처와 관공서에 전파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투표율 91.9%, 찬성률 91.5%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된 유신헌법으로 ‘깨끗하고 명랑하고 훌륭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을지 모른다. 당시 정부도 권력의 힘이 닫는 모든 영역에서 유신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성전’으로 홍보했다.

투표율 91.9%, 찬성률 91.5%로 통과!

하지만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박정희의 헌법’을 지향했던 유신헌법은 출발부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개헌 논의 자체가 1972년 10월17일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강요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하지만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971년 ‘4·27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하자 더 이상 합법적인 임기 연장이 어려워진 박 대통령의 장기 집권 음모였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박 대통령은 유신선언 직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정치활동 금지, 대학 휴교령, 언론·출판·보도·방송에 대한 사전 검열 조치를 취하는 등 반대세력을 철저히 봉쇄한 가운데 유신헌법으로 개헌을 밀어붙였다. 당시 신직수 법무 장관, 김기춘 법무 과장, 서일교 총무처 장관, 한태연(서울법대)·갈봉근(중앙대) 교수가 참여한 ‘법무부 헌법심의위원회’에서 마련한 유신헌법은 10월27일 박 대통령이 주재한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한 뒤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유신헌법의 내용은 근대 헌법의 핵심인 국민기본권 보장, 3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 경쟁적 선거제도라는 자유민주의 기본 원리조차 부정했고, 오직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전근대적 내용으로 채워졌다.

유신헌법은 형식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제1조)고 명시했다. 그러나 실제 주권은 대통령이 의장을 맡도록 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별도의 국민대표 기관을 만들어 사실상 박 대통령에게 이양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온 국민의 총의에 의한 국민적 조직체로서 조국 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헌법 제35조)으로 규정하고 △대통령 선거권(제39조 1항) △국회가 발의·의결한 헌법개정안에 대한 의결·확정권(제41조 1항)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선거권 등 국민주권 사항에 속하는 핵심 권한을 몰아준 것이다. 물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도록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의장직을 맡고 대의원의 정당 가입을 금지한 가운데, ‘토론 없이 무기명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해 사실상 박 대통령을 위한 거수기 집단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체육관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실제 유신헌법 확정 직후인 1972년 12월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 대의원 2359명이 참석한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당선됐다. 반대표는 단 1표도 없었다.

긴급조치1호 ‘유신헌법 비판금지’

유신헌법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도 철저히 무력화했다. 일단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되, ‘그 후보자는 대통령이 일괄 추천하고,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 투표를 붙여 당선을 결정’(제40조 1, 2항)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사실상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유정회 의원’을 탄생시킨 것이다. 3년 임기의 유정회 의원들은 10·26 사태 다음해인 1980년 10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해체될 때까지 국회에서 박 대통령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친위대 역할을 수행했다.

유신헌법은 국회의 국정감사 권한을 폐지하고, 국회 회기도 ‘정기회·임시회를 포함해 연 150일을 초과해 개회할 수 없다’(제82조 3항)고 규정했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 권한도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에게는 국회해산권(제59조)을 부여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유정회 의원이 국회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여기에 공화당 의원까지 가세해 항상 과반수를 넘기도록 만든 국회조차 활성화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유신헌법의 백미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기존 헌법 조항을 삭제하고, ‘긴급조치권’으로 대표되는 국민 기본권 제약 수단을 명시한 것이다. 유신헌법 제53조는 ‘대통령은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제53조 2항에 ‘이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박 대통령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 국민기본권과 사법부의 기능을 유보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유신정권에서 긴급조치권은 그렇게 악용됐다. 1974년 1월8일 발동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적 논의 금지’,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였다. 이에 따라 유신헌법에 대해 비방, 반대하는 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구속돼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 첫 피해자는 유신반대 운동을 주도한 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 두 사람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종언될 때까지 긴급조치는 정권 안보용으로 남발됐다. 4호 ‘민청학련 관련 활동 엄단’(74년 4월3일) - 7호 ‘고려대학교 휴교령’(75년 4월8일) - 9호 ‘헌법비방·반대금지’(5년 5월13일)가 그 예다.

박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보장하는 유신헌법은 10·26과 함께 뜻밖의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성전으로 찬양됐던 유신헌법은 이제 헌법학자들 사이에서 반민주 악법으로 비판받는다.

헌법학자들 “헌법적 요소가 희박했다"

권형준 교수(한양대)는 “근대 이후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만드는 핵심 이유는 권력 분립과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한 것이라면서 “권력자의 이해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을 유보한 유신헌법은 헌법이라기보다 독재자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강경근 교수(숭실대)도 “대통령이 발동하는 긴급조치권으로 국민 기본권을 본질부터 침해한 유신헌법은 헌법적 요소가 희박하다는 게 정설”이라고 혹평했다. 물론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했던 한태연 교수 등 일부 보수적인 헌법학자들은 “이른 시간 안에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 기본권을 일시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론을 내세워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대해 권형준 교수는 “유신 당시 공화당 정책위의장으로 실력자였던 한태연 교수 등이 권력자의 뜻에 따라 만든 법안에 대해 스스로 부정하기 어려워서 만들어낸 옹호 논리일 뿐, 헌법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의 기본 원리를 침해한 법으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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