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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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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책] 권위의 벨트, 문화를 조이다

등록 2005-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권력의 입맛대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구분해 가차없는 탄압을 가한 박정희의 문화정책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문세광의 육영수씨 저격 사건에 관한 외교문서가 최근 공개됐다. 당시 육영수씨가 총탄에 쓰러진 자리는 국립극장 대극장이었다. 남산 자락을 중장비로 파내어 땅을 고르고 질서정연하게 좌우 균형을 맞춘 열주를 올려 세운 국립극장. 마치 군인들이 최고권력자를 향해 빳빳한 주름바지를 입고 도열한 형상이다. 국립극장은 지난해 10월 모두 176억원의 공사비를 투입한 리모델링으로 탈권위적인 국민 속의 극장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하지만 소시민들이 국립극장에 가는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대중교통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를 떠난 국립극장

누가 명동의 국립극장을 남산 자락으로 옮겼을까. 국립극장은 올해로 개관 55주년을 맞는다. 한국전쟁 발발 두달 전, 일제 때 건축물을 이용해 명동에 문을 연 국립극장은 명동 문화의 산실 구실을 했다. 명동이 없는 1960년대 문화예술을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명동의 국립극장을 옮긴 명분은 공간의 부족과 시설의 현대화였다. 하지만 속내는 대중과 문화의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 상지대학교 홍성태 교수(사회학)는 “박정희는 도심을 통치의 공간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 곳에 누구나 드나들며 신명을 나누는 문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화의 향유자를 구별할 필요도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남산 자락은 문화적 구별짓기 공간으로 손색이 없었다. 산속으로 들어간 국립극장을 찾을 사람들은 뻔했다. 대중들이 10분 이상 버티고갯길을 올라 공연을 즐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고급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정권의 수혜자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통해 군사정권이 ‘고급’이라는 인식을 확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박정희 정권은 군사 쿠데타 초기인 1964년 자유센터를 지으며 남산 동쪽 자락에 흠집을 냈다. 여기에 국립극장을 세워 ‘권위의 벨트’를 조성한 것이다. 대중들은 고급 예술의 ‘요새’에 대한 부러움에 사로잡히길 기대하면서 속세를 떠난 ‘문화시설의 유배’를 지켜봐야만 했다.

도심이라 해서 박정희 정권의 고급 문화 지향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지난 1978년 개관한 세종문화회관도 마찬가지다. 세종로라는 통치의 공간에 거대 문화시설이 들어선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은 일반적인 문화시설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종의 ‘정치 회관’ 구실을 했다. 대규모 정치행사 공간 구실에 충실했기에 대중문화인은 무대에 오를 기회가 없었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당시 개관예술제 사무국장을 역임한 이상만 고양문화재단 총감독은 “로열발레단이나 뉴욕필 하모닉 등 외국팀을 초청하는 공연이 주류였다”고 말한다. 특별한 공간에서 정경·정언 등의 유착이 이뤄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전통 복원과 인습 타파?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박정희식 문화정책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문화정책은 경제개발하듯이 하는 게 아니다. 내버려두는 게 제일 좋다”고.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사상 통제에 기반한 문화정책을 집권 기간 내내 유지했다. 문화를 정치의 하위 개념으로 여기며 국가주의나 반공주의를 심어주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엔 쿠데타 권력기관이나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몫이 컸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 서울대 박종홍 교수다. 그는 박정희의 통치이념을 보편적 언어로 정당화하면서 교육과 문화정책의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사상적 허약함을 ‘제2의 근대화’를 통해 메우려고 했다. 여기엔 국민적 차원의 정신개조를 위한 인습 타파와 전통 복원도 포함됐다. 전통문화 진흥 차원에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태권도가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문화재 복원도 잇따랐다. 문제는 복원을 속도전식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개발독재의 상징인 시멘트 콘크리트 광화문이 대표적이다. 최근 현판 글씨 논란에 대해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광화문 현판 교체는 경복궁 원형 복원계획에 맞춰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화문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세종로쪽으로 14.5m 끌어내고, 동쪽으로 5.6도 틀어진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

당시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총체적 동원 체제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로 이어졌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지난 1970년 국권 회복을 위한 희생정신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남산 공원에 건립됐다. 조선 신궁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안 의사 기념관은 국적 불명의 건축물이다. 외형은 전통을 되살린 듯하다. 하지만 일체의 단청을 배제하고 외벽을 모두 베이지색으로 칠했다. 이는 일본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일부에서 “일본에서 볼 수 없는 단청을 박정희가 싫어했기 때문”이라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를 위한 애국심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이처럼 뚝딱뚝딱 전통을 복원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습 타파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집권 통치에 이로운 것은 전통이요 그렇지 않으면 인습이었다. 전통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당시 무속의 제의(祭儀)로서 공동체 의식을 다지던 굿의 명맥이 끊길 위기를 맞았다. 굿이 미신 타파의 주요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무속인들은 산속으로 떠나야 했다. 나라굿으로 알려진 김금화 선생도 예외일 수 없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미신 타파 바람이 걷잡을 수 없었다. 온 가족이 파출소에 끌려가 뜬눈으로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각서를 쓰고 풀려나길 반복하다 76년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대중가요의 싹을 자르다

이로 인해 인생의 항로를 바꾼 사람이 있다. 당시 일간지 사진기자로 일하던 김수남씨는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길을 넓히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다가 무속인들이 제주도 등지에서 구속되는 사태를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굿 사진을 찍어 20여권의 사진집을 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미신 타파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본보기로 삼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때도 대규모 굿 탄압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불교와 신도가 뒤섞인 굿을 구별해 산 사람을 위한 신도는 신사로 보내고 죽은 사람을 위한 불교는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것을 본떠 미신 타파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내세운 ‘건전성’을 잣대로 문화적 재단을 시도했다. 전통의 복원은 유교적 가부장제가 정권의 버팀목 구실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웅 이순신의 숭배 역시 같은 맥락이다. 호국정신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보았던 것이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임학순 정책개발팀장은 “당시 문화의 건전성에 대한 기준은 객관적인 지표나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설정됐다”고 말한다. 당연히 반공교육과 유신헌법 등에 기여하는 문화예술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른바 대중문화 정화 차원에서 이뤄진 검열이 대중가요의 싹을 송두리째 자르기도 했다. 고급 문화를 지향하는 정권에서 저속한 가사나 불신풍조 조장, 시의 부적절 등이 단죄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기성곡에 대해서까지 모두 예륜(공륜으로 바뀜)의 재심의가 이뤄져 모두 222곡의 대중가요를 금지시켰다. 여기에 대마초 파동까지 불거져 가요계는 쑥대밭이 됐다. 이런 문화계의 공안정국으로 인해 상상력을 억압·통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저속’ 혹은 ‘퇴폐’의 딱지로 퇴출당한 대중가요의 자리는 1977년 시작된 대학가요제를 통해 메워졌다. 대학가요제는 방송을 장악한 정부의 입김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시절의 멘탈리티가

지난해 ‘7080’ 바람이 대중가요계에 거세게 몰아쳤다. 놀라운 사실 하나는 대마초 파동 전후가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7080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가수들 가운데 1976년 이전에 활동한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에 대해 대중음악평론가 신현준씨는 “대중가요 검열과 대마초 파동으로 인한 시련을 겪은 가수들은 정권에 증오감이 극심했던 결과”라 진단했다. “1970년대 검열의 내면화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창조적 재능을 많이 잃었다. 당시 대중음악은 20여년 후퇴하면서 지금도 문화적 다양성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박정희 시대의 멘탈리티가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박정희 시대에 미디어를 통해 파시즘 문화를 세뇌받은 세대들은 교육을 통해서도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했다. 지금도 문화적 독단의 그림자가 우리 주변을 휘감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물리적 폭압이 사라졌어도 감수성 예민한 시절의 경험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 일대를 ‘문화지구’로 조성하겠다는 국가균형발전위의 ‘서울시 발전전략’ 청사진에 거는 기대가 크다. 통치의 문화로 점철된 공간이 문화적 자양분의 산실로 거듭나는 셈이다. 도시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형성되듯 문화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단 박정희 시대의 반문화 흔적을 지우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왜 과감하지 못했나




<박하사탕>의 영호는 1980년대를 살면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자멸한다. 70년대 말을 공단에서 보내고 80년 광주를 체험한 뒤 공안경찰로 변신하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상황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4년 뒤에 만난 <효자동 이발사>의 성한모는 수동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권력의 심장부 인근을 생활 공간으로 삼은 탓에 4·19 시위대와 5·16 쿠데타를 정면에서 경험한다. 두 영화는 근현대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하나는 역사의 ‘몰입’을, 다른 하나는 역사의 ‘탈주’를 경험하게 한다.
우리에게 박정희 시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재현한 영화는 적지 않다. <그때 그사람들>을 빼더라도 <하류인생> <말죽거리 잔혹사> <실미도> <효자동 이발사> 등이 만들어졌다. 이들이 시대에 접근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하류인생>은 정치적으로 혼탁하고 억압적인 시대상을 보여주면서도 권력의 주변부를 다룰 뿐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역시 시대의 풍경을 통해 향수를 자극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과거의 흔적을 재현하면서 과감하게 재해석을 시도하지 못한 것이다.
<실미도> 역시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역사적 사건에 진전된 방식으로 접근했으면서도 본질적인 분석을 암시로만 처리하는 한계를 보였다. 우익은 ‘동지’마저 저버리는 나쁜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게 성과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욱 아쉬운 것은 <효자동 이발사>다. 가족 안에서 역사와 싸우는 성한모는 어느 순간 우화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무려 10억원을 들여 재현한 역사의 시공간이 우화적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당연히 박정희 시대의 실체는 세트 속에 꼭꼭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군사정권에 의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너무 깊었던 탓일까. 어쩌면 관객은 스크린에서 박정희 시대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평론가 주유신씨는 “그동안 영화에서 다룬 박정희 시대는 내용(기의)이 사라진 흔적(기표)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역사를 소재로 삼으면서도 정치적 의미를 퇴색시키는 휴머니즘적 시선이 너무 강렬하다. 이로 인해 대중의 기억이 유희나 기표에 집착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시대를 스크린에서 발견하려면 무엇보다 영화적 상상력이 절실하다. 역사를 제대로 기술하면서 현재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박하사탕>의 영호를 통해 역사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확인했던 것처럼. 물론 영화적 상상력에 대한 대중의 공감은 필수적이다. 할리우드 영화 <닉슨>에서는 대통령을 ‘마마보이’로 설정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도 역사에 정면으로 다가서며 시대를 버무려 즐겨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세포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를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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