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과 정부 통제 지역을 차별하지 않은 스리랑카 해일피해… 구호 작업 함께 하며 새로운 나라 건설해야
▣ 콜롬보= 수마두 위라와르네(Sumadhu Weerawarne)/ <아일랜드> 기자
스리랑카엔 2300여년 전부터 내려오는 고대의 전설이 있다. 어린 공주가 왕국을 구하기 위해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내용이다. 분노한 신들이 바다를 들끓게 하자 자신을 재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그 뒤로 스리랑카에선 대규모 자연재해는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때론 점쟁이들이 임박한 위험을 예고하기도 했고, 점성술사들이 바다가 육지로 거슬러 올라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제껏 해일(쓰나미)은 일어난 적이 없었고, 이를 두려워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스리랑카의 고대 전설을 아시나요
첫 번째 해일이 스리랑카 남부와 북동부를 할퀴고 지나간 뒤에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해변가로 달려가 솟아오른 바다를 구경하려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내가 살던 곳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이 해변으로 달려가 철로 부근까지 치솟았다 점차 빠져나가는 바닷물을 구경했다. 다른 지역에선 해일이 밀려왔다 빠진 뒤 더욱 강력해진 힘으로 육지를 다시 덮치기 전까지 사람들이 해변에서 바닷게와 물고기를 줍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지 경찰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휘둘러야 했다. 또 다른 곳에선 해일을 기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넋놓고 이를 구경하기도 했다.
초강력 해일이 밀려든 지난 12월26일은 스리랑카에선 특별히 성스러운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직후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축제는 계속되고 있었고, 불교도에게 성스러운 ‘풀문 포야데이’(불교도가 많은 스리랑카에선 매월 음력 보름날을 부처의 행적과 연결해 기념한다·편집자)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흰옷을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불교 사원으로 향했다. 휴일을 낀 주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휴가를 떠나거나 순례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해안가 도로는 인파로 북적댔고, 바닷가 리조트는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참사가 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이재민에게 보내는 구호물품을 실은 트럭을 타고 남부 해안 지역의 마타라로 향했다. 이곳에선 이번 참사로 주민 5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가 실종됐다. 이날 밤 9시께 시내 들머리로 들어서면서 바라본 장면은 초현실적이었다. 겉보기에 거리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신호등도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시내 중심가 사원에선 휘황찬란한 불빛이 반짝였다. 확성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설법을 들으러 오라고 촉구하는 종교적 구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서도 다급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2만여 이재민이 임시로 기거하고 있는 73개 난민캠프로 보낼 구호품을 전달하는 작업을 조정하기 위해 임시로 세워진 사무실이 유일한 재난의 흔적이었다.
참사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바다와 맞닿은 도로를 따라가봤다. 길은 어두웠고, 전기는 끊긴 상태였다. 길 양쪽으로는 무너진 건물 잔해가 쌓여 있었다. 황폐하고 괴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은 조용했고, 잔잔한 파도가 부드럽게 해변을 두드리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하얀 물거품이 유령처럼 눈에 들어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봤던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와 다급한 비명소리를 떠올리며 어둠을 응시했다. 이번 참사로 피해를 입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엔 경계선이라도 그어진 것처럼 보였다. 건물 잔해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곳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건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내 가족 안에서의 안도와 슬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내와 해안가에선 주검이 넘쳐났지만, 이제는 물질적 피해만 눈에 띌 뿐이다. 마트라병원 원장은 안전을 위해 취한 조처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병원에만 주검이 500구나 있었다. 그 가운데 250구는 가족이나 친지가 나타나 찾아갔고, 나머지 주검들은 집단 매장했다.” 현재 이 병원의 영안실에는 외국인 주검 4구만 보관돼 있다. 그의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복도에서 18살 난 젊은이가 흐느끼고 있었다. 이번 참사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그는 슬픔에 겨워 몸서리치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이런 장면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제 의료진들은 살아남은 이들이 겪고 있는 충격을 어떻게 씻어줄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한 이들도 있다.
지금 스리랑카는 느닷없이 닥친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2만7천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사망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거의 매일 바다는 해안가로 주검을 토해내고 있고, 더 많은 주검이 무너진 건물 더미나 한적한 해안가에서 발견되고 있다.
내 가족 안에서도 안도와 슬픔, 영웅담이 교차하고 있다. 해안 지역인 탕갈레에 살던 고모 2명은 가까스로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한명은 파도에 떠밀렸지만 다행히 이웃집 지붕 위로 올라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다른 한명은 건물 더미에 깔린 덕분에 물이 빠질 때 바다로 휩쓸려가지 않아 살아남았다. 하지만 고모부에게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일흔살 고령임에도 물길에 휩쓸린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고모부는 결국 물살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피해가 가장 극심한 곳은 지난 20년 동안 전쟁이 이어져온 북부와 동부 해안가다. 3년 전 휴전이 이뤄지면서 잠시 동안 평화를 맛본 그곳 주민들에게 다시 잔혹한 죽음의 손길이 뻗친 것이다. 다민족 국가인 스리랑카에선 권력을 나누는 방법을 놓고 국민들이 여전히 극단적으로 갈라서 있지만, 대자연의 분노는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해일은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지역과 반군이 통제하는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밀어닥쳤다. 신할리즈족과 타밀족, 무슬림 모두 목숨을 잃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제 문제는 스리랑카인들이 역경을 기회로 삼아 과거의 분열을 극복할 만한 힘을 가졌느냐에 모아진다. 첫걸음은 좋아 보인다. 온 나라에서 전례 없는 형제애가 쏟아지고 있다. 시민단체와 기업체, 개인들까지 나서 이재민을 돕기 위한 정부와 국제기구의 노력을 지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을 위해 식량과 의약품, 의류와 취사도구를 가득 실은 트럭이 피해 지역으로 내달리고 있다. 모든 국민이 차별 없이 해일 피해를 입었듯이, 구호작업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희망을 갖게 하는 이유다.
‘정부-타밀반군 노력’합의 나와야
2300년 전 전설은 왕국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어린 공주는 머나먼 왕국 사람들에게 구조됐다고 전해진다. 공주는 나중에 왕비가 됐고, 전쟁을 통해 스리랑카를 재통일한 영웅적인 성군 두투게무누왕을 낳게 된다. 지난 20년 동안 내전을 겪어오면서 스리랑카 국민들은 무력 분쟁에 신물이 나 있다. 이제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 모두가 공유한 슬픔과 선의로 함께 나선 구호작업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북동부 지역 피해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해 정부와 타밀반군이 함께 노력한다는 합의가 나와야 한다.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북동부 지역은 해일 피해가 극심한 상태다. 하지만 반군세력은 이들을 지원할 인적·물적 자원이 전무한 상태다. 당연히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이재민 구호작업을 위한 협력은 이들 지역에 대한 통제와 나아가 새로운 통치 제제 구성을 위한 협력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참사로 인한 희생도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밤중에 차를 몰고 해안도로를 따라 콜롬보로 돌아왔다. 도로에 있던 파편들은 치워졌지만, 파괴의 흔적은 도처에서 목격됐다. 그러나 참혹한 재난의 와중에서도 군데군데 멀쩡한 집들이 눈에 띄었고, 집안엔 불도 밝혀져 있었다. 급류에 휩쓸린 버스는 길가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닻을 잃은 어선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던 해안가는 인적이 끊긴 채 멀리서 바다의 속삭임만 들려올 뿐이었다.
스리랑카는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는 나라다. 이번 참사로 스리랑카인들이 신을 저버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있다. 마트라에선 강력한 해일도 사원이 있는 지역까지는 침범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신성한 곳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콜롬보 북쪽의 해안마을 파무누구마 주민들은 지역 교회가 참사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밀려들던 물살이 용하게도 교회 바로 앞에서 멈춰섰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기적이 아니겠느냐고 주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스리랑카 국민들은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이번 참사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어쩌면 신들이 짓궂은 유머감각을 발동해 수많은 이들의 목숨과 삶의 터전을 유린한 곳에 평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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